[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2. 두부공장의 생물학자, 그리고 과학적 아나키즘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2. 두부공장의 생물학자, 그리고 과학적 아나키즘
  • 이로운넷=김우재 박사
  • 승인 2020.03.03 04: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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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동아시아에 진출하다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20세기 초, 격변하던 그곳은 각종 이념의 전쟁터였다.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동아시아 3국은 각종 최첨단 무기와 신기술로 무장한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물리적으로 패배했고, 거대했던 중국의 몰락은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성공의 배후에 과학기술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후로 과학기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과학기술에서 가장 앞서나갔다. 중국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과학기술 서적이 번역돼왔지만, 과학이 중국 사회에 자리 잡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식민지 조선의 사정은 훨씬 나빴다. 독립운동가들이 과학을 신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긴 했지만, 과학조선을 꿈꾸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해방 이후까지 밀려야 했다.

왕조를 중심으로 한 유교 역시 사회를 유지하는 중심적 이념의 지위를 놓을 수밖에 없었고, 서양에서 기원한 각종 이념들은 유교의 지위를 놓고 지식인들을 매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가장 강력한 이념은 사회주의였고, 아나키즘은 그 사회주의의 하나로 동아시아에 수입되었다. 특히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입각한 아나키즘은 아나코 코뮤니즘 혹은 무정부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한중일 세 나라에 골고루 수용되었을 뿐 아니라, 지식인 사회는 물론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크로포트킨의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상호부조론>에서 나왔다.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윈의 <종의 기원>이 지닌 영향력과 이를 해석한 헉슬리와 스펜서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외삽해 멋대로 해석한 허버트 스펜서식의 사회진화론과 20세기를 뒤흔들었던 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 사이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세 가지 이념은 동아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공통점 외에도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화론을 해석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영국에서 진화를 적자생존으로만 해석하는 헉슬리에 맞서 논쟁하던 크로포트킨은 <19세기>라는 잡지를 통해 과학을 고급교양이자 사회혁신의 사상으로 알렸고, 그의 사상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된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이자 크로포트킨의 친구인 엘리제 르클뤼와 장 그라브가 만든 잡지 <신세기>는 당시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프랑스에 알리는 주요 창구였고,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수많은 중국 유학생들은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해석된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열렬히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이 당시 파리에 머물며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을 파리그룹 혹은 신세기파라고 부르며, 이들의 중심에는 생물학을 공부하던 중국 유학생 리스쩡이 있었다.

상호부조론은 서양에서보다 동아시아 3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사진제공=알라딘

신세기파의 과학적 아나키즘

신세기파는 모든 아나키즘을 골고루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중심 사상으로 프랑스의 르끌뤼가 재해석한 크로포트킨주의를 그들 아나키즘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들은 르끌뤼의 ‘진화혁명론’을 받아들였는데, 이에 따르면 “진화는 사물의 점진적 변화과정을 뜻하고, 혁명이란 그런 점진적 변화과정의 중단이자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는 과정”이었다. 신세기파는 진화와 혁명이라는 두 가지 현상이 모두 동일한 과정 속에 나타나는 두 단계라고 생각했고, 혁명은 급격한 진화의 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신세기파에게 혁명은 진화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불가피한 수단이었고, 그 장애물에는 정부, 법률, 종교, 군대 심지어 가정까지 포함되었다. 신세기파는 상호부조의 원리 속에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사회를 가정했지만, 일체의 강권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혁명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며, 그래야만 모든 형태의 억압이나 강권이 부재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기파는 19세기와 20세기를 과학이 발견한 원리들과 혁명이라는 사회활동이 증가하는 시대로 규정했다. 그들이 과학공리 혹은 진리공도라 부른 19세기의 특징은 자연과학이 해명한 진리를 뜻한다. 신세기파의 혁명론에서 그들은 과학으로 확인된 것 이외에는 어떤 기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강한 과학주의를 견지했는데, 이들이 최신과학이라고 언급한 것들은 뉴턴역학,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론,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그리고 콩트의 사회학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현대에서는 과학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다지 환영받는 과학에 대한 관점이 아닌 과학주의를 자신들 이념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과학적 진리는 절대적이며, 과학적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그 어떤 지식체계도 무의미하다는 신념은 신세기파의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사상이었다.

신세기파는 왜 과학주의에 경도되었을까? 그 원인을 알아보려면 당시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민족주의적 맥락을 살펴봐야만 한다. 처음에 말했듯이, 20세기 초 중국과 한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패퇴했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그 패배의 원인이 중국이 서구보다 물질문명에서 뒤처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서구 물질문명의 기원을 알아내는 것은 지식인들의 중요한 책무였으며, 서구 물질문명의 기초가 된 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결론이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바로 이 과학에 대한 콤플렉스는 과학을 수용해야만 중국이 물질문명으로 서구를 이길 수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했고, 그것이 중국 신세기파에서는 과학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세기파의 아나키즘은 중국 민족주의의 자장 아래에서 흡수된 과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진화론을 바탕으로 펼쳐진 독특한 혁명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리스쩡의 두부 공장, 중국 혁명을 이끌다

바로 그 신세기파에서 유일하게 “크로포트킨은 전통 학문에 지나치게 빠져, 그런 관념들이 책의 곳곳에 나타나는데, 실로 그의 약점이다.”라며 그를 비판적으로 독해했던 유일한 인물이 바로 리스쩡(1881-1973)이다. 리스쩡은 중국 아나키즘의 혁명파 지식인 그룹이었던 ‘신세기그룹 혹은 신세기파’의 대표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청말 병부상서와 군기대신을 역임한 이홍조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9세인 1900년에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유린하고 황실 정원을 폐허로 만드는 사건 이후 유학을 결심한다. 1902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농생물학과 화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파스퇴르연구소에서 대두에 관한 연구로 논문을 준비했다. 바로 이 시기 리스쩡은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프랑스 혁명 철학을 접했고, 이 사상을 통해 어떻게 중국의 혁명을 도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스쩡은 프랑스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두부공장을 운영해 혁명 자금을 조달했다
리스쩡은 프랑스에서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두부공장을 운영해 혁명 자금을 조달했다

프랑스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던 리스쩡은 처음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큰 관심을 두었지만, 스펜서의 이론에 녹아있는 적자생존의 논리에 거부감을 느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탐구하게 된다. 리스쩡이 신세기파에서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청나라 체제의 부조리를 깨닫게 되었고, 이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한다. 1907년 그는 <신세기 그룹>을 조직해서 무정부주의를 선전하고 특히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중국에 널리 알려, 호조론의 유행을 가져왔으며 이후 1911년 신해혁명이 벌어지자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귀국, 중국 내에서 다양한 정치활동을 진행한다.

리스쩡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당시, 서양인들이 매일 마시는 우유보다 고향에서 마시던 두유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아나키즘 윤리를 따라 검소한 생활을 했고, 소식을 즐겼으며 채식주의자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즐기던 치즈를 볼 때마다 두부가 떠올리던 그는 고향 후배에게 편지를 보내 두부 기술자들을 프랑스로 인솔해 오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프랑스에 도착한 중국 농민들과 함께 그는 두부를 생산해서 팔기 시작했고, 프랑스인들의 구미에 맞는 두부 코코아와 두부 커피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렇게 사업에 성공한 그는 비록 그의 부친이 청 왕조의 고관으로 재직 중이었지만, 아나키즘의 사상을 따라 청 왕조를 전복하려던 쑨원에게 거액의 혁명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두부 사업으로 마련한 자금과, 생물학 연구와 독서를 통해 습득한 그의 아나키즘적 실천은 프랑스에 온 농민과 유학생들에게 야학을 통해 프랑스어와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근공검학 운동으로 이어진다. 당시 1910년부터 20년까지 10년간 무려 17차에 걸쳐 2000여명의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에 건너와 일하며 공부를 했고, 이들 중 전설적인 혁명가들이 배출된다. 과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의 두부 공장이 중국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리스쩡은 쑨원을 비롯한 신해혁명의 주역들과 교류했던 과학적 아나키스트였다
리스쩡은 쑨원을 비롯한 신해혁명의 주역들과 교류했던 과학적 아나키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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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0-03-03 14:26:27
기독교(개신교,천주교), 일본 불교, 원불교등은 일제 강점기 포교종교로 한국에 종교주권이 없음. 불교는 산속에 은거하는 조계종 천민승려가 한국 전통종교. 한국은 유교나라일뿐임.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세계종교 유교는 세계사로 학술적 접근을 해야 적절합니다. 중국 한(漢)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서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 그리고 한국유교.

http://blog.daum.net/macmaca/2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