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국대안의 본질을 간파하고 반대 운동에 나섰다. 양심적인 교원과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고 파쇼적 제도를 강제하여 학문을 질식시키려고 하는 것이 이 안의 목적이 아닌가! 학생들은 노도와 같이 궐기했다. 학원 내에서는 총검이 횡행하게 되었다. 교원과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자가 만든 형무소에 재차 투옥되었다. 이것이 해방의 실상인가. 도대체 어디다가 과학의 꽃을 피울 것인가!.”
-월북한 과학자 리승기 <겨레의 꿈 과학에 실어> 중에서

“과학은 결코 일시라도 현상에 만족하여 정지하지 않습니다. 현상 만족은 퇴보를 의미하며, 연구실과 국가가 일시라도 현상에 만족한다면 그 연구실과 그 국가는 그 순간부터 퇴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러할 것은 물론이나 연구를 생활의 중심으로 한 나에게는 더 한 층 그 감이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리승기

박상준의 말처럼, “해방 이후 국대안 파동이 나기 전까지의 1년 남짓, 특히 1946년 전반기는 우리 과학기술사에서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기”였다. 첫째, 과학기술은 새로운 조선의 중심축으로 생각됐다. 그건 단지 과학기술인들에 의해 고안된 사상이 아니라, 민중 대부분과 정치세력이 공감하던 상식이었다. 둘째, 과학기술인들은 다양한 사회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고, 사회에 의견을 내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해방공간의 다양한 기록들은 당시 과학지식인들이 얼마나 진보적이고 진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셋째, 좌우의 이념 갈등은 과학기술계에 큰 상흔을 남겼다. 특히 남한을 장악한 미군정과 이들에 결탁한 미국 유학파 우익 지식인들은 과학기술인들이 꾸었던 ‘과학 조선’의 꿈을 국대안 파동으로 좌절시켰다. 월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국대안 파동이 과학기술에 남긴 상흔

국대안 파동으로 교수 약 300명이 학교를 떠났고, 그들 중 상당수가 과학기술자였다. 과학기술자는 해방공간에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 시대의 주인공이었고, 당시 유학파가 다수였던 엘리트 과학기술자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과학자들은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이 취약한 상황에서 국대안은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스스로 민족학교를 만들어 과학기술 고등교육을 실현하겠다는 과학기술인들의 소망을 좌절시킨다. 게다가 미군정과 우익은 이들을 좌익 빨갱이로 낙인찍고 대학에서 몰아내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한다.

당시 이공학부 직원들의 퇴직성명을 보면, 이들이 단지 서울대로 통폐합되는 것을 반대했거나, 좌익 이념에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대안을 반대한 것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과학기술계는 이미 자주적으로 재건의 움직임을 실현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이 이 모든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군정은 만주에서 귀국해 경성대학 물리학과 교수진을 구성 중이던 도상록을 공금 불법 사용으로 파면한다. 하지만 도상록은 국대안에 가장 진보적으로 반대하던 과학기술계의 주도적 인물이었고, 그를 배제하기 위해서 무리한 파면을 감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동광의 말처럼, 당시 “진보적 과학기술자들은 국대안을 해방 후 모든 분야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과학기술자 양성을 저해하고, 교육 민주화를 가로막는 처사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당시 “국대안 반대 운동은 진보적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자 양성과 학원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적극적 개입으로 해석”돼야 한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과학기술자 사회는 주체적이었고, 준비되어 있었으며, 시대의 주인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꿈을 꾸고 있었던 것.

해방공간에서, 과학기술인들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이자,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신음했던 조선의 민중에게, 게다가 일본과 서구의 우월한 과학지식 앞에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그들 앞에, 첨단 과학지식을 지닌 유학파 과학기술인은 새로운 시대의 중심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세력이었다. 해방 이후 교토 3인방으로 불린 이태규(화학, 1902~1992), 리승기(화학공학, 1905~1996), 박철재(물리학, 1905~1970)은 당시 남북한의 모든 학문을 통틀어 최고 수준의 학자였다. 이들 모두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교수직에 올랐으며, 학문적 성과 이외에도 세계적인 평판에서 이들을 넘어서는 조선인은 없었다. 이들의 이름은 당시 해방공간에서 정치인과 대중 모두에게 자주 오르내렸으며,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해방공간의 과학기술인과 정치 권력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방공간에서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인은 시대의 주인공이 될 자격과 능력 그리고 인물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국대안 운동은 그런 과학기술인의 꿈을 모두 좌절시킨 미군정의 횡포였다. 대부분의 진보적 과학기술인들은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횡포에 저항했지만 결국 교직을 떠나거나 남한을 떠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미군정은 1947년에만 서울대에 전체 고등교육기관 지원액의 90.6%를 지원할 정도로 노력했지만, 설비와 교수진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구는 물론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리고 국대안 파동은 좌우익의 극심한 정치대결로 과학자사회에 균열을 만들었다. 국대안 반대 운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교수 380여 명이 해직 또는 퇴직하고, 학생 4,956명이 퇴학당한다. 이렇게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은 교수 중 월북하는 사례가 드문드문 발생했고, 1946년 10월 1일 김일성 대학이 설립되고 국대안 반대 운동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대거 월북한다.

무너진 과학 조선의 꿈, 그리고 월북

국대안 반대 운동에 연루된 과학기술인들은 단지 교수직을 사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단체에 참가한 일을 빌미로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당시 남한에서 좌익은 정치적으로 탄압당했고, 국대안에 반대했던 진보적 과학기술인의 대부분은 좌익 혹은 좌익에 동조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당시 남한에 과학기술인이 대부분 몰려 있었던 이유는, 서울에 대부분 대학과 연구기관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최고급 과학기술자에 속했던 대학 출신만 80여 명이 월북했고, 이는 해방 직후 남한 대학 졸업자 과학기술인력의 40%에 달한다. 물리학의 경우 고급인력이라 할 수 있는 16명 중 9명이 월북을 택한다. 이들 중 도상록, 임극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물리학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첨단분야에서 연구하던 최고급 인재들이었던 리승기·려경구·오동욱·정준택·강영창·유기연·박성욱·김양하·김지정·정순택·한인석 등이 국대안 반대 운동을 전후해 분단이 고착화한 1948년 시기에 모두 월북한다.

과학기술인의 월북은 1950년 이후 훨씬 큰 규모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월북한 이유는 단지 이념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북한이 실행 중이던 과학기술 진흥조치와 함께, 대대적인 월북공작사업 때문이었다. 북한은 국가적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기술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과학기술인 대부분은 경성 즉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고, 이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남한의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당시 북한은 이들에게 최고급 대우를 약속했다. 특히 북한은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자로 유명했고, 진보적 과학기술인의 대표주자였던 리승기를 북한에 유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바로 이 시기에, 리승기를 위시한 남한의 대표적 과학기술인 대부분이 국대안 파동으로 좌절된 과학기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월북한다. 그들의 월북은 단지 이념적인 이유도 아니었고, 단지 북한의 대규모 유치공작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시대의 주인으로 ‘과학 조선’을 꾸다 좌절된 과학기술인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적극적 이동이었다.

북한 과학기술의 기원

분단은 여러가지로 새로운 조선의 꿈을 짓밟아 버렸다. 그중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한 과학 조선의 꿈을 꾸던 과학기술인들은 국대안 반대 운동과 전쟁으로 소중히 품고 실천해왔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남한에 남아야만 했던 과학자들도 극심한 이념 갈등으로 신음해야 했다. 예를 들어 당시 한국 화학계의 최고과학자였던 이태규는 좌익 학생과의 이념 갈등으로 고통을 받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한다. 남한에서 과학 조선의 꿈은 철저히 좌절된다.

북한은 심각한 과학기술자 부족을 겪고 있었다. 당시 북한은 학교는 물론 공장도 유지하기 힘들었고, 이를 과학기술 인력양성을 통해 해결하려고 계획 중이었다. 당연히 서울에 몰려 있던 과학기술 교육기관과 비슷한 기관들의 설립이 절실했으며, 이를 위해 수백 명의 학생을 소련에 유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 북한은 대규모로 남한 과학기술자에 대한 월북공작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월북과학자들에 의해 아주 빠른 속도로 세워진 대학이 바로 흥남공업대학이다.

당시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기관과 연구기관 설립은 김일성이 직접 챙긴 정책이었다. 특히 월북과학자들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수렴해서 북한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공업대학, 사리원농업대학, 평양의학대학 등을 일찍부터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이 중 1947년 설립된 흥남공업대학은 설립 교수진의 대부분이 월북 과학기술자였다. 김일성의 위임장을 지닌 북한의 지도부는 월북 과학기술자들에게 풍족한 생활환경을 보장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이 일어났지만, 북한의 과학기술 연구는 계속됐다. 1962년에는 북한 최고과학기술 관련 조직인 ‘과학원’이 설립된다. 북한 과학기술계의 초석은 월북한 과학기술인에 의해 세워진 금자탑이었다. 이때 북한이 과학기술에 기울인 노력은, 1950년대 말이 되면 북한의 과학기술이 다양한 기술혁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1950년대 말, 북한은 비날론·염화비닐·갈섬유·무연탄 가스화·함철콕스·합성고무 등의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남한 최고의 화학공학자이자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받던 리승기는 북한의 권유를 계속 거부하다 전쟁이 터지자 월북을 결심한다. 그는 혼자 월북하지 않고 연구팀 전부를 데리고 월북했다. 당시 리승기의 연구팀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인재들로 구성돼 있었고, 그들의 연구력도 일본에 필적했다. 바로 그런 최고급 과학자의 월북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남한에서 가장 앞서나가던 과학기술자의 월북이 지금 우리에게 와닿는 이유는, 여전히 남한의 과학기술인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리승기의 월북은, 남한의 과학기술계에, 아니 남한 전체에 그 어느 사건보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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