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5ㆍ4 신문화운동 중 ‘과학’ 개념이 여전히 ‘격치(格致)’의 문화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1902년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이 잇달아 ‘格致’ 개념을 버리고 science의 번역어로서 ‘과학’을 택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과학’이 ‘格致’를 대체한 것은 중국의 새로운 지식 시스템의 현대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유가 이데올로기 속 ‘格致’ 개념과 명확한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국의 새로운 지식 시스템은 또한 유가의 논증 방식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사유 방식은 곧 마르크스-레닌주의
“나의 지식론은 피어슨과 마흐로부터 온 것이다.” 정문강“과학의 만능, 과학의 보편, 과학의 관통은 그것의 재료에 있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에 있다.” 정문강과학주의자라는 오해과현논쟁에서 장군매와 치열한 토론을 통해 5.4 신문화운동에 나선 청년들에게 과학파의 강렬한 세계인식을 심어준 정문강은 자신의 전공분야인 지질학만을 공부한 상아탑의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가 쓴 ‘현학과 과학 토론의 여흥’이라는 글에는 그가 평소 애독하고 자주 참고하는 책들이 열거돼 있는데, 그 목록을 통해 그의 사상적 원천과 취향을 살펴볼 수 있다.우선
"정문강을 어떤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전공으로 말하면 그는 소수 서방 교육을 받은 과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구자다. 그러나 그는 또 정부관리이면서 신문기자, 기업가, 정론가, 교육자이다. 즉 그는 20세기 20~30년대 북경 학술계의 영수다." - 샬롯 퍼스“만약 이처럼 책도 읽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다면, 경험지식은 모두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오직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주장을 하게 된다면 인생관은 모두 양심의 자발성에 기인하게 되며, 결코 아무런 지식도 쌓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독서, 학문, 지식, 경험
“실험적 방법은 바로 과학가가 실험실 안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학파의 시조인 피어스(C. Peirce)는 항상 그의 새로운 철학이 바로 “과학실험실의 태도”(The laboratory attitude of mind)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이 철학의 각 학파가 공인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실험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중국 사상가 후스의 중에서 인문학적 제어론에서 유물론적 역사관까지정문강의 공격에 장군매는 다시 베르그송의 논리를 빌어 상대한다. 즉, 정문강이 엄밀과학과 정신과학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데[Democracy]선생과 싸이[Science] 선생을 옹호해서 많은 일들을 치렀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비로소 이 두 선생이 암흑 속에서 차츰차츰 그들을 구출해 광명한 세계로 이끌어 냈다. 지금 우리는 오직 이 두 선생만 있으면, 정치적·도덕적·학술적·사상적인 모든 암흑에서 중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천두슈가 에 쓴 글 중에서 5.4 신문화운동은 낡은 전통의 타파를 외치면서 과학과 민주를 기치로 내걸었고, 전국적인 지지를 타고 전통주의자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5.4 운동 이전부
크로포트킨, 동아시아에 진출하다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20세기 초, 격변하던 그곳은 각종 이념의 전쟁터였다.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동아시아 3국은 각종 최첨단 무기와 신기술로 무장한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물리적으로 패배했고, 거대했던 중국의 몰락은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성공의 배후에 과학기술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후로 과학기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과학기술에서 가장 앞서나갔다. 중국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과학기술 서적이 번
“학생들은 국대안의 본질을 간파하고 반대 운동에 나섰다. 양심적인 교원과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고 파쇼적 제도를 강제하여 학문을 질식시키려고 하는 것이 이 안의 목적이 아닌가! 학생들은 노도와 같이 궐기했다. 학원 내에서는 총검이 횡행하게 되었다. 교원과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자가 만든 형무소에 재차 투옥되었다. 이것이 해방의 실상인가. 도대체 어디다가 과학의 꽃을 피울 것인가!.”-월북한 과학자 리승기 중에서“과학은 결코 일시라도 현상에 만족하여 정지하지 않습니다. 현상 만족은 퇴보를 의미하며, 연구실과
“국대안반대는 통일지향적 교육운동이자 민족자주 교육운동이었으며 학원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국대안이 강행되며 생겨난 서울대학교는 한동안 보수적 교수들의 아성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이희수 중에서“국대안 반대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룬 유능한 제대 출신 서울대 교수들은 북으로 가 김대에서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고 또 학생들로부터 “수재”로 알려진 교수들이다.” 김기석 중에서식민지의 단절, 새로운
사상가 니덤의 정체성은 과학자 시절에 형성됐다. 그는 전쟁과 분열로 점철된 20세기를 살았다. 그 덕에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서구사회에서 모멸을 당해야 했지만, 적어도 그가 보여준 사상적 궤적의 중심엔, 과학이 있다. 그에게 과학이란 생화학과 발생학의 통합 문제였고, 가장 환원주의적인 생물학과 전일론적인 생물학의 통합 문제는, 그의 사상적 궤적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이후 과학사가로 입지를 굳히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의 정체성이 과학자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는 중국사 일반이나 철학적 사유를 향해 나가지 않고, 과학의 경계
버널주의 - 1930년대 영국 공산당에 스며든 과학적 사회주의이념과 종교는 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다. 20세기는 이념의 전쟁터였다. 사회주의는 20세기 초반 유럽을 집어 삼킨 이념으로 자라나, 당시 유럽의 젊은 지식인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젊은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과학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존 데스먼드 버널을 필두로, 다양한 과학 분야의 우수한 엘리트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몸을 담았다.종교가 자주 그렇듯, 이념 또한 쉽게 독단에 빠질 수 있다. 이념과 이념의 충돌이 20세기 세계사에 새긴
“중국 사회는 상인정신이 결코 우위에 설 수 없는 문명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고급 장인의 기술과 학자들이 연구하는 수학적/논리적 방법이 결합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단계에서 갈릴레이의 단계로의 도약이 서양의 근대과학을 일으켜 준 데 비해 중국에서는 그러한 도약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마 그런 도약적 발전은 중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중세의 중국은 그리스나 유럽사람에 비하면 더 많은 체계적 실험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관료적 봉건제’가 변함없이 군림하고 있는 한 중국에서는 구학이
“전쟁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 속이다." - 유네스코 헌장 中?(주 1)“지식은 단지 자연을 지배하고 극복하려는 목적으로만 발전돼서는 안된다. 지식은 반드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의미의 맥락 속에서 발전돼야 한다. 지식과 권력은 의미와 도덕성에서 너무 멀어져 왔다.(중략) 지혜와 권력을 어떻게 하나로 만드는가하는 문제야말로 인문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 조지프 니덤, 中(주 2)국제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과학자 혹은 역사가, 조지프 니덤유네스코(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