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위대한 망명객,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난 생물지리학자였다. 그는 반체제운동으로 오랜 수감생활을 했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1876년 탈옥한 이후에는 영국으로 망명한 후,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아나키즘 운동을 하다가 프랑스에서 다시 수감생활을 한 이후인 1886년부터는 줄곧 영국에 머물렀다. 당시 영국에서 아나키즘은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크로포트킨은 귀족 출신이라는 그의 독특한 이력과 유명세 덕분에 영국사회에서 제법 알려진 명사가 될 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대중에게 과학의 성과와 의미를 알리는 많은 잡지가 간행된다. 주요 평론지 중, 과학계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의미를 사회적으로 해석해나간 잡지가 바로 <19세기>다. 크로포트킨은 영국에 머물면서 <19세기>지의 주요 집필진으로 활약했고, 바로 이 잡지를 통해 그의 수많은 저작들이 알려졌다.

당시 영국사회는 발전하는 근대과학의 영향력과 더불어, 세계의 대부분에 식민지를 지니고 있었던 영국의 위상을 과학의 발전에서 찾으려는 대중의 열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열역학 이론을 비롯한 다양한 물리학 분야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며 진화론과 종교의 갈등 양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던 크로포트킨이지만, 그는 지리학과 지질학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과학자였고, 러시아 사관학교 시절부터 다양한 분야에 걸친 전문가적 지식을 지닌 인재였으며, 망명 이후에도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그가 영국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지의 주요 필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그의 이력과 능력 덕분이다.

근대과학이 19세기 영국에서 꽃을 피우면서, 영국의 대중 역시 과학을 하나의 고급교양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 전까지 고급교양이란 시나 소설 같은 문학이나 조금 더 어려운 역사나 철학 그리고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 과학이 고급교양이 되면서, 과학을 설명해주는 다양한 비평가와 평론가들이 등장했고, 이와 더불어 다양한 잡지들이 출판된다. 이 잡지들이 주로 다루었던 주요 주제는 최첨단 과학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이 첫 7편의 평론에서 다룬 주제들은 “성운의 본질, 지구 자전축 변화, 전자기파, 세포의 생명활동, 눈의 진화, 이온결합, 빛과 색, 식물의 질소동화작용, 빛의 파동설과 입자설, 빙하, 개기일식, 절대온도, 식물의 생리, 물질의 상태, 가스 액화, 태양에너지 사용, 혜성” 등으로 현재 한국의 대중과학계가 다루는 주제들과 대동소이하다. 

과학지식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해설해주는 일은 중요하고, 그런 과학대중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나쳐서, 과학은 쉬운 설명을 통해서만 소비되고, 대중이 그런 쉬운 설명을 통하지 않고는 과학을 접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것만큼 과학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과학은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실과 현장을 통해 이해되어야만 완전해지며, 과학대중화도 점점 그런 현장과 실험실 중심의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클래식 음악이 공연장을 찾는 관객의 증가나 직접 악기를 다루어보려는 사람들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고, 책과 강연만으로 소비되는 현실이 우스꽝스럽듯이,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아무런 발전도 없이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 과학대중화 운동의 적체는 우려스럽다.

과학대중화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제거하거나 축소해서 대중에게 과학 지식의 내용만을 알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유행하는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강연 혹은 책을 보면, 그런 연구들을 쉽게 설명하려 할 뿐, 그 지식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또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에 대한 설명이 간과된 경우가 태반이다. 그 이유의 이면엔, 과학대중화 운동이 지나칠 정도로 유치하게 과학을 다룬다는 것 외에도,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으로 그 모든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의 부재가 존재한다. 전문화된 현대과학계에서, 자신의 연구 외에 다른 분야와 더불어 사회과학과 철학과 역사학에 대한 교양까지 지니고 있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특히 한국의 과학계와 교육수준은 그런 전문가의 등장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과학지식은 언제나 사회와 연결되어 설명되어야 하며, 그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독단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이면서 훌륭한 지식인이었다.

과학적 사회평론가로서의 크로포트킨

당시 영국의 과학대중화 수준은, 지금 한국의 과학대중화보다 높았다. 그 이유는 바로 과학지식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논쟁되고 토론되며 사회 속으로 스며 들어갔기 때문이고, 크로포트킨처럼 뛰어난 과학적 지식인이 그런 논쟁의 전면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열역학 이론이 발전하면서 ‘종말론’에 대한 공포가 대중 사이에 유행한 적이 있었고, 당시 영국사회는 바로 이 문제를 웃어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대하며 평론으로 남겨놓았다. 망원경이 발전하고 우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외계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기도 했고, 특히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고 나서 얼마 안 돼서부터는 과학과 종교의 충돌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성공회를 국교로 가진 영국사회에서, 과학을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앙에 비추어 과학지식을 새롭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과학과 신앙을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다시 성찰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러시아 귀족 출신이자, 아나키즘의 왕자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크로포트킨의 글은 언제나 평론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특히 그의 글은 대부분 과학 그 이면에 놓인 사회적 맥락을 지적함으로써, 대중이 과학지식을 그저 그 내용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대중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그가 <19세기>에 발표한 다양한 글 중에서 훗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연재는 <상호부조론>이다. 몇 편의 연재로 이루어져 나중에 책으로 출판된 이 글에서, 크로포트킨은 당시 영국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헉슬리의 비판을 목표로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연계의 진화 이외에 인류 사회의 진화 문제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피했지만, 헉슬리는 <인류의 자연계에서의 지위> 등의 책을 통해 다윈의 법칙을 인류 사회에 확대 적용하는데 거침없었다. 헉슬리가 1888년 작성한 논문 <생존경쟁과 그것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읽은 크로포트킨은 마치 생존경쟁만이 인간사회의 유일한 법칙이며, 진화의 유일한 원동력인 것처럼 <종의 기원>을 확대해석한 헉슬리의 의견을 비판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특히 사회학자이면서 다윈의 이론을 외삽해서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허버트 스펜서의 저작들은, 당시 영국사회에서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헉슬리의 논문은 생존경쟁의 논리를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자칫하면 제국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1890년부터 1896년까지 7년간 5차례에 걸쳐 발표된 논문들에서 그는 동물계에서 보이는 상호부조를 시작으로, 원시인의 상호부조, 고대인의 상호부조, 중세 도시에서의 상호부조, 근대 사회에서의 상호부조를 모두 개괄한다. 헉슬리와 크로포트킨의 대결은 당시 영국사회에서도 화제였고,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급진성으로 인해, 헉슬리는 자주 논쟁에 휩싸여야 했다. 크로포트킨과 헉슬리의 수준 높은 과학적 토론은 계속 이어졌는데, 헉슬리가 자신의 논문에서 주장했던 생각을 철회하고 <진화론과 윤리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해서 동물계의 생존투쟁과 인간의 윤리도덕을 구분해 설명했을 때에도, 크로포트킨은 <정의와 도덕>을 통해 상호부조라는 포괄적 원리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두 과학적 지식인은 서로의 사상을 존중했고, 진지하게 토론했으며, 동시에 과학적 지식이 사회적 맥락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크로포트킨과 헉슬리의 논쟁은 과학지식의 전달이라는 단순하고 수준 낮은 목표에만 매몰되어 있는 한국 과학대중화 운동에 많은 교훈을 준다. 특히 크로포트킨과 헉슬리 같은 과학지식인의 존재가 단순한 과학해설자들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며, 한국사회도 그런 과학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을 통해 동서양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나키즘 사상가다.

 

동아시아에 전파된 상호부조론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20세기초 아나코 코뮤니즘(무정부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한·중·일 세 나라에 고루 수용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국의 신채호, 이회영, 중국의 스푸, 바진, 일본의 고도쿠 슈스이, 오스키 사카에 등 대표적인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모두 크로포트킨주의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그의 발휘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의 저작은 동아시아에서 대량으로 번역 출판되었고, 일본은 특히 1930~40년대 그의 전집이 출판되면서 일본 노동계와 지식인 사회는 크로포트킨 열풍에 빠진다. 중국에서는 신문화운동 시기에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유행하면서 ‘노동勞動’과 ‘호조互助’라는 유행어가 만들어졌고, 과학적 아나키즘이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됐다. 크로포트킨의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된 그의 책 <상호부조론>에서 나왔다. 동아시아 아나키즘이 왜 크로포트킨의 사상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는지, 또한 그 수용과정에서 과학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중국과 일본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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