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금세기의 산업의 진보가 만인에 대한 각인의 싸움 덕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의 원인을 모르는 자가 진흙으로 만든 우상 앞에 바친 희생의 덕분으로 비가 내린다고 하는 것과 흡사하다. 자연에 대한 정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업의 진보의 경우도, 상호부조와 긴밀한 교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확실히 상호투쟁 이상으로 유익한 것이다.” 크로포트킨, <상호부조론> 중에서

약산 김원봉, 여전히 계속되는 아나키즘의 오해

우리는 여전히 약산 김원봉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하지 못한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다. 대통령의 입에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고, 결과적으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는 말이 나와도, 이념에 경도된 정치세력의 일부는, 여전히 약산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영화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을 그저 제국주의 시기의 테러리스트 집단처럼 묘사했지만, 아나키즘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념도, 단지 국가와 정부를 반대하는 운동도 아니었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 공산주의와 함께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3대 세력 중 하나였다.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약산 김원봉, 그리고 최근 영화로 개봉한 시인 박열까지, 일제시대 개화된 지식인의 상당수는 아나키즘을 조선 이후의 세상을 위한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아나키즘의 출발점은 신성시되고 있는 기존 제도에 대한 저항이다. 아나키즘은 정당한 이유 없는 모든 권위를 의심하는 사상이다. 아나키즘이 등장하던 20세기 초의 세계는, 민족국가의 개념이 부상하며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폭력적으로 짖밟던, 이미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체제로 자본가와 노동자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아나키즘이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로 번역된 이유도,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먼저 없애야할 권위의 상징으로 민중을 착취하는 정부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로 오해되는건, 20세기 초 불행했던 시대적 맥락 때문이다. 국가와 정부는, 아나키즘이 저항하는 권위의 하나일 뿐, 전부는 아니다. 특히 1902년 게무야마 센타로가 펴낸 <근세 무정부주의>라는 책이 널리 읽히면서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는 겉잡을 수 없이 널리 퍼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허무주의 테러주의자들도 아나키즘을 테러리즘으로 낙인찍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핵심은 상호주의와 협동이다. 이상적이라는 이유로 마르크스에게 비판받았지만,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도, 테러리즘도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 현충일 담화 / 영상캡쳐 = KBS

동아시아의 아나키즘 연대, 상호부조의 역사

동아시아 3국이 서양 제국주의와 조우하며 세계열강에 편입되어 가던 20세기 초반, 수천년을 이어온 전통의 대부분은 의심받았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열망은 지식인 모두를 사로잡았다.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서양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적 대안이었고, 서양사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 혹은 비판의 반응은 시대적 정신이었다. 특히 어떤 방식으로든 건설적 파괴가 필요하던 당시의 동아시아에서, 아나키즘은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한, 중, 일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던 신채호, 류스페이, 고도쿠 슈스이 모두가 아나키즘을 직접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동아시아의 전통과 서구적인 것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는 데엔 이유가 있다.

고도쿠 슈스이는 일본의 전설적인 아나키스트로 천왕제를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평민 대중의 직접 행동을 통해 천황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했고, 그가 그토록 부정했던 천왕 체제의 아나키스트 압살정책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제국주의의 심장 일본에서, 그나마 국제주의 연대를 통해 조선과 중국의 해방을 부르짖던 아나키스트는, 날조된 대역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사상은 한국과 중국의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20세기 초 일본은,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핵심축이었고, 고도쿠 슈스이는 그 중심에 있었다.

중국의 근대 아나키즘 운동은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일본 도쿄와 프랑스 파리의 중국 유학생들이 아나키즘을 표방하는 ‘사회주의 강습회’와 ‘세계사’라는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류스페이는 도쿄파 아나키스트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원래 깊은 유가적 전통의 학문적 배경을 지녔지만 다양한 독서를 통해 중국 전통과 서구화 사이에서 고민했던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서인이라 말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고, 서구의 아나키즘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중국적 아나키즘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론가로 중국식 아나키즘 혁명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국수주의자로 돌아서고 만다.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신채호도 역사학자라는 지적 배경을 지닌 인물이었고, 민족주의자라는 한계 속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약소국의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신채호는 전통에 대해 무조건 부정하지 못했다. 그는 민족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의 성숙이라는 의미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아나키즘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아나키즘’을 추구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거의 유일한 아나키스트 학자였던 신채호가 처한 시대적 맥락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나키즘은 그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식민지의 주류는 국가주의적 저항이었지만, 동아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던 이들 셋은 모두 그 주류인 국가주의와 싸우는 동시에 제국주의에 저항해야 하는 비주류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고도쿠 슈스이는 천황제에, 류스페이는 배만흥한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서에, 그리고 신채호는 반일독립이라는 시대정신에 거스르며 국가주의와 싸워야 했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 사진=YES24

리쓰정, 크로포트킨의 생물학으로 새로운 중국을 꿈꾸다

동아시아 3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나키즘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었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로 훈련 받은 흔치 않은 아나키스트로, 운동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 토대를 만들어준 사상가였다. 20세기 초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당시 세계를 들끓게 하던 이념의 전장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는 마르크스식 계급투쟁론이었고, 전세계 노동자조합운동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를 배경으로 연대했다. 그 반대편에서 제국주의에 정당성을 제공하던 이론은 다윈의 자연선택을 사회적으로 외삽했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었다. 사회진화론은 국가 간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적자생존의 확장으로 설명했고, 생물학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다윈주의에 힘입어 동아시아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포용하면서도,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를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만 설명하는건 부적절하며, 과학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생물을 연구했던 과학자였고, 생태계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협동의 흔적을 자세히 기술하며 헉슬리와 스펜서류의 적자생존의 과학적 결론을 비판했다. 특히 그는 헉슬리과 스펜서의 이론이 제국주의 정당화의 논리로 사용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걸 경고했고, 이미 20세기 초에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논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주장한 상호부조론은 진화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진화의 한 요인으로 꼽은 것으로, 적자생존과 같은 도그마가 아니었다. 

크로포트킨의 영향력은, 그의 저작 대부분이 동아시아에 이미 20세기 초에 번역되어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상호부조론에서 유래한 ‘互助 호조’ 라는 말은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어 있었다. 19세기말 프랑스에서는 크로포트킨의 동료인 엘리제 르클뤼와 장 그라브가 무정부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고, 그들이 재해석한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중국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프랑스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인 잡지는 레 떰 누보 Les Tempa Nouveaux, 즉 ‘신세기’라는 의미였고, 프랑스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중국 유학생들의 조직도 ‘신세기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신세기’라는 잡지를 통해 아나키즘을 중국에 소개하고, ‘진화는 혁명’이라는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을 접하며, 중국의 혁명을 꿈꿨다. 도쿄파의 리더가 중국 고전에 밝은 독서가였던 반면, 프랑스 파리그룹의 리더는 생물학을 전공한 리쓰정이라는 생물학자였다.

두부 공장에서 강연 중인 리스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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