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과학’의 발전은 현대 세계에서 유럽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된 가장 지배적인 요인이다. 그것의 기여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이론만큼이나 중요하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한 수레의 양 두 바퀴와 같다. 과학은 중국의 농업, 상업, 산업, 의학의 발전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청년들은 과학을 반드시 배워야 했다. 오늘날 이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진독수 시대에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강조돼야만 했던 실정이었다. 진독수는 ‘민주선생’과 ‘과학선생’이 중국을 정치와 윤리와 학문과 사상에서의 어둠으로부터 탈출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극소수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중국에 과학을 소개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현대 중국의 정치사상가> 중에서

5.4 운동의 과학자들

프랑스에 유학 중인 근검공학 대표 18명.

1919년 3.1 운동으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5월 4일, 베이징 지역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밖으로는 국권을 찾아내고 안으로는 국적을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 시위는 급속도로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1911년 2천년 이상 중국을 다스린 천자의 군주제가 종말을 고하는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제2 혁명은 좌절되었고 중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바로 이 시기, 중국은 제도적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지만, 사상적으로도 큰 혁신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해혁명시기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됐고, 바로 그 사회주의 사상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중국의 기틀이 됐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시기에 중국에는 과학이 사상의 근본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중국이 혼란으로 물든 시기 이전에, 이미 유럽에 유학하고 있던 리스쩡은 중국을 구할 진리를 서구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명으로 1919년부터 근공검학운동을 다시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근공검학운동은 반은 일하고 반은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다른 말이었고, 중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근공검학운동에 뛰어든 젊은 청년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을 프랑스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당시 프랑스행 여객선 4등 선실에선 중국 학생들이 몰려 앉아 사서삼경은 물론 현대사상이 담긴 책들을 들고 토론에 여념이 없었고, 이들은 격렬하게 토론하고 싸우면서 친구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근공검학생들이 유럽으로 보내진지 겨우 1년 만에 3000여명이 넘는 중국 유학생들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자리잡게 되었고, 리스쩡은 이들을 돕고 조직하며 새로운 중국을 꿈꾸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 근공검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이 훗날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도자들로 성장한다. 근공검학생들은 다양한 사상을 전개하며 현대중국을 만든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원류를 보여주는데, 몽타르지(Montargis) 를 중심으로 모여살던 이들을 멍다얼파라고 부르며, 훗날 신중국 초대 통전부장이 되는 리웨이한은 ‘공학세계사’를 조직해 멍다얼파를 대표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자오스옌, 저우언라이, 쉐스룬 등이다.

이들은 1922년 파리 교외의 블로뉴 숲에서 소년공산당을 창당하기까지 한다. 훗날 중국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로 성장하게 되는 덩샤오핑도 근공검학을 통해 프랑스에 유학했으며, 현대 중국을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마오쩌둥은 근공검학으로 유학을 가지는 못했지만, 유학을 가는 친구에게 학비를 지원했고, 소년공산당의 중심이었던 쉐스룬을 “나의 영원한 회상”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레닌은 “베이징은 파리를 돌아”라는 말을 했다. 현대 중국을 이룬 사상의 틀은 프랑스에 유학했던 근공검학생들로부터 싹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근공검학운동을 이끈 생물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가 바로 리스쩡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해방으로서의 과학

중국의 현대 사상사에서 과학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청나라때부터 중국에는 끊임없이 서양의 과학책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당시 조선 역시 중국을 통해 번역된 서양의 과학서적들이 유통됐다. 서양의 잡기로만 생각되었던 과학은 중국이 서양제국주의에 의해 유린당하고, 서양을 그대로 배워 힘을 키운 일본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중국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신해혁명과 5.4운동은 모두 군주제를 끝내고 낡아빠진 중국 전통을 새로운 사상으로 갈아치우자는 사상운동으로 이어졌고, 과학은 바로 이런 대안에 딱 맞아떨어졌다. 당시 중국에서 ‘과학’은 이에 찬성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누구도 공공연히 경시하거나 홀대할 수 없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5.4 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번져나가면서 서양문화의 상징인 과학과 민주주의는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학문과 제도로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이때부터 중국의 시대정신은 과학과 민주로 대변되며, 특히 과학은 과학만능주의라 해도 될 만큼 중국인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과학주의자의 대표주자였던 호적은 당시 성행하던 과학주의에 대해 “최근 30년 이래로 하나의 명사가 국내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이해를 하는 사람이든 못하는 사람이든, 혹은 수구파든 유신파이든, 어느 누구도 감히 공개적으로 경시하거나 조롱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이다”라고 말했다. 신문화운동 시기를 통틀어 과학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절대적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

서양의 과학기술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특히 중국은 양무파 지식인들에 의해 근대 공업 건설을 주관했고, 이들은 청 왕조의 통치를 유지하고 중국의 전통적인 도덕사상을 유지할 목적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려 했다. 즉, 이들은 조선의 동도서기론처럼 서양의 과학기술을 국가의 물질적 부강을 이룩해줄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과학기술을 그렇게 빠르게 받아들이면서도, 이들은 과학기술 안에 담겨 있는 과학정신과 중국의 전통적 인생관 사이에 발생할 모순을 전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5.4 신문화운동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학문을 체로 삼고 서양학문을 용으로 삼는다”는 중체서용의 논리에 함몰되어 있었을 뿐이다.

“중국 학술은 심오하여 ‘강상명교’를 비롯하여 경전의 위대한 법도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 바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서양인의 조예를 취하여 우리의 미비점을 보충하면 족하다”

“중국학문은 근본이고 서양학문은 말단이니, 중국학문을 위주로 하고 서양학문을 보조로 삼는다.”

위와 같은 논리는 근공검학운동을 마치고 서양에서 중국으로 속속 귀국한 신세대 지식인들의 활동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리스쩡을 비롯한 근공검학파들에게 중체서용이나 동도서기는 한가하고 안이한 현실인식일 뿐이었다. 유럽과 서양의 제도와 과학으로 무장했던 그들은 중국을 근본적인 정신적 차원에서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 운동으로 표출됐다. 서양식 공장을 짓는 것만으로 새로운 중국이 될 수는 없다. 새로운 중국은 그런 공장을 가능하게 만든 서양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연구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해야 한다. 서양의 많은 학술 서적을 번역했던 지식인 엄복은 이렇게 말했다.

“수학과 논리학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모순된 이치를 가려내거나 필연의 법칙을 고찰할 수 없으며, 역학과 화학을 배우지 않으면 인과 법칙의 의미와 그 역할을 살필 수 없다”

5.4 운동 전부터 이미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합리적 과학정신을 배워 국민의 과학정신을 배양하며, 또한 낡은 학문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5.4 신문화 운동은 이미 이렇게 바닥에서부터 시작되던 해방으로서의 과학운동이 대중 속으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5.4 신문화운동은 과학과 민주를 기치로 한 반전통 운동이었고, 이미 전통문화에 대한 상당한 교양을 갖추었으면서도 서양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자의 상점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나타났고, 유교의 낡은 도덕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베이징 대학의 잡지 <신청년>에는 “청년은 초봄과 같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묘상에 있는 초목과 같으며 새로 간 칼날과 같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고, 이는 노인에 대한 절대 공경을 내세운 유교 전통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사상가 호적은 “진지하게 서양을 배워야 하며 모방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썼다. 중국의 진보적 사상가 루쉰은 유교는 사람 잡아먹는 가르침으로 규정하고, 중국 책은 읽지도 말고 될 수 있으면 적게 읽으라고 가르쳤다. 1920년대의 중국은 반전통 운동의 시기였고, 그 중심엔 과학이 있었다. 과학은 중국을 낡은 전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유일한 도구이자 사상이었다. 

5.4 운동이 신문화운동으로 번져나가면서 서양문화의 상징인 과학과 민주주의는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학문과 제도로 당연하게 여겨졌다.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 과현논쟁

과학만능주의 사상가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호적은 그의 책 <과학과 인생관>의 서문에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에서 ‘변법’과 ‘유신’을 강론한 이래 신인물이라 자부한 사람치고 감히 ‘과학’을 훼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양 근대 문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글에서, 호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만능임은 쉽게 믿지 못하여도, 과학적 방법이 만능임은 의심치 않는다. 서양 근대문명의 정신 방면의 첫째 특색이 과학이다. 과학의 근본정신은 진리를 찾는 데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환경에 핍박당하고 관습에 지배당하고 미신 및 편견에 구속당하거니와,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고 강한 힘을 갖게 하고 명철한 지혜를 주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싼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하늘을 정복하고 땅의 거리를 단축케 하고,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한 사람이 되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도서기론과 중체서용의 전통을 계승한 양계초, 양수명 등의 중국 전통사상가들은 서구 과학문명의 한계를 부각시키며, 중국 정신문명 혹은 동방문명의 우위를 주장해왔던 것이다. 이들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니체를 이용해 서양문명의 한계를 지적하고, 베이징에서 행한 버트런드 러셀의 연설을 근거로 중국 정신문명의 우월함을 주장했다. 양계초는 장군매와 정문강 등의 학자들을 대동하고 1918년 서양문명 시찰에 나서게 되고, 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목격한다. 양계초는 이 시찰 이후, 서구문명의 핵심인 과학정신은 서구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과학의 파산을 주장했다. 

“근대인은 과학의 발달로 공업혁명이 일어나 외부생활은 급격히 변했고 내부생활은 동요했다… 이 유물주의 철학자들은 과학의 처마 밑에 의지하여 순물질적 순기계적 인생관을 세워, 일체의 내부 외부 생활을 모두 물질 운동의 필연법칙에 귀결시켰다… 현대 사상계의 최대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와 옛 철학은 이미 과학에 의해 그 기운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리하여 물질만능주의와 강권주의가 점점 세력을 얻었다… 서구인들은 과학만능이라는 커다란 꿈을 꾸었지만 지금에 이르러 과학의 파산을 초래했을 뿐이다.”

양계초의 생각에 동조했던 양수명은 서양 문명은 1차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맞았으며, 진정한 문명의 척도는 과학에 의존한 물질문명이 아니라 공자의 인생철학과 같은 정신문명이라고 주장했다.

“서양인은 얼마나 불쌍한가! 그들은 물질적 피폐에 직면하여 정신의 회복을 시도하나, 그들이 말하는 정신이란 히브리의 몇몇 가지에 불과한지라 좌충우돌할 뿐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이른바 대도를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 우리가 응당 그들을 공자라는 이 한 길로 인도해 내야 하지 않겠는가?”

양계초와 함께 사찰을 떠났던 장군매는 1923년까지 독일에서 유학하며 서양 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성만능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합리주의적 의지철학과 생명철학에 빠져들었다. 그는 유럽에서 접한 이런 사조들을 통해 당시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고자 했다. 1923년 2월, 독일에서 귀국한 장군매는 <인생관>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든 인생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한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생관은 주관적이다... 과학은 논리적 방법에 의해 지배되지만, 인생관은 직각에 의해 생긴다....과학은 분석의 방법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인생관은 종합적이다....과학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만, 인생관은 자유의지적이다. ...과학은 대상의 동일한 현상에서 일어나지만, 인생관은 인격의 단일성에서 생긴다.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인생관의 특징은 주관적, 직각적, 종합적, 자유의지적, 단일성적인 것이다. 인생관은 이 같은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과학이 제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인생관 문제의 해결은 결코 과학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인간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주장이 출판되자 지질학자 정문강은 <현학과 과학>이라는 글로 장군매를 반박하며, 장군매의 몸에 “현학이라는 귀신이 붙었다”고 즉각 반격한다. 

과현논쟁은 “과학적 인생관은 잘못된 것인가?”, “과학이 인생관을 지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1년여간 이어지게 되며, 현대 중국의 모습이 탄생하는데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과학과 인생관> 표지./사진제공=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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