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2.과학의 체로 받아들인 기독교 사회주의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2.과학의 체로 받아들인 기독교 사회주의
  • 김우재
  • 승인 2019.04.02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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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예수, 칼 마르크스, 노자

 

“중국 사회는 상인정신이 결코 우위에 설 수 없는 문명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고급 장인의 기술과 학자들이 연구하는 수학적/논리적 방법이 결합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단계에서 갈릴레이의 단계로의 도약이 서양의 근대과학을 일으켜 준 데 비해 중국에서는 그러한 도약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마 그런 도약적 발전은 중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중세의 중국은 그리스나 유럽사람에 비하면 더 많은 체계적 실험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관료적 봉건제’가 변함없이 군림하고 있는 한 중국에서는 구학이 경험적 자연관찰이나 실험과 결합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요컨대 실험이란 보다 적극적인 간섭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실험이 중국에서는 공업과 상업의 장인의 전통 속에 계승돼 왔고 그 정신은 어쩌면 유럽에서보다 더했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그 정신이 철학적으로 존중받게 되는데 있어 중국은 서양보다 못했다.” -조지프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중에서

역사가로 대중에 알려진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은 20세기가 시작되던 1900년에 태어나, 20세기가 거의 끝나가던 1995년에 눈을 감았다. 그가 죽고 얼마후, 한국과학사학회는 그의 추모강연회를 열어, 한국 과학사학계와 그의 인연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영식, 전상운, 송상용, 박성래 등의 한국 과학사 1세대 모두가 이 강연회에서 발제를 했을 정도로, 니덤이 한국 과학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니덤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한국 인터넷 정보의 대부분이 그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일 정도로, 니덤은 서양인으로 드물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과학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던 과학사가 정도로 기억된다. 

근대과학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을 지닌 동아시아에서, 특히 ‘니덤 문제 Needham Problem or Needham Question’라 이름지어진 질문은 다양한 학자들의 논쟁과 토론을 유발했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만 두 가지 주제를 포함하는데, 첫 번째 질문은 “왜 근대과학은 유럽에서만 탄생했는가”이며, 두 번째 질문은 “근대과학이 탄생하기 이전인 15세기까지 도대체 왜 중국문명은 항상 유럽을 앞서 있었는가”이다. 한 때 서양의 학자들도 니덤이 제기한 이 문제에 천착해 다양한 종류의 답을 도출하려 노력한 적이 있다. 니덤은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과학의 특징을 “엄밀한 실험을 수반하는 자연에 관한 가설의 수학화”로 생각했고, 중국의 역사에서 순수한 수학의 발전이 느렸다는 점을 하나의 이유로 꼽는다. 하지만 니덤이 생각한 더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사회가 가진 사회경제적 요인이었다. 니덤은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중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꼽는다. 니덤은 유럽에서 근대과학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했던 사회경제적 조건들로 자본주의의 탄생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신념대로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자본주의의 탄생으로 가는 선형적 역사로 해석했다. 그에게 중국의 관료제는 자본주의의 탄생을 억제하는 사회구조였고, 자본주의가 탄생하지 못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탄생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니덤의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밤새 어느 집에 불이 났다고 해서, 다른 집에 불이 나지 않은 이유를 물어봐야, 그건 제대로된 질문이 아니다. 즉, 과학이 유럽이라는 동네에서 탄생했다고 해서, 다른 동네에도 과학이 탄생했어야 한다고 묻는것 자체가 오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앵거스 그레이엄 같은 동양학자는 니덤의 질문 자체가 잘못된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니덤의 질문은 여러 학자를 매료시킬 정도로 매력적이긴 하다. 특히 중국이나 한국의 지식인들처럼, 근대과학은 물론 대부분의 학문을 서양에서 수입해야 했던 비굴함을 바닥에 깔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위대했던 중국문명이 근대과학을 만들지 못해 서양에 무너져야 했는지는 실용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과학자가 중국의 과학문명사를 재발견해 서양에 알린 일은, 당시 세계 지식인 사회에서 놀라운 사건이었고, 니덤이 특히 동아시아 과학사학계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문규에 따르면 그 결과, “니덤의 영향은 과학사학계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고, 니덤의 영향력은 “유럽 중심이었던 과학사 연구가 서양 이외의 다른 문화권의 과학사 연구로 확장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니덤은 그의 경력을 과학자로 시작했고, 영국 캠브리지에서 이미 과학자로 명성을 확고히 하고 나서야 과학사 연구로 진입한 기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특히 그는 당시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않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생 배신자, 스파이, ‘공산주의 선전에 잘 속는 얼간이’ 등의 낙인을 달고 살아야 했다. 

사진. 조지프 니덤 (Joseph Needham)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다

송상용은 니덤 추모강연회 논문의 제목을 “예수, 마륵스 (마르크스), 노자 사이에서 - 니덤의 생애와 사상”으로 짓고, 그의 개인사를 통해 사상의 궤적을 추적했다. 니덤은 의사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려다 생화학을 전공했는데, 이는 당시 단 (Dunn) 생화학연구소의 소장이었던 프레드릭 홉킨스(Frederick Hopkins)의 영향 때문이었다. 니덤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훗날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루궤이전 등의 중국인 학생들이 연구소를 방문해, 그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일과 연관이 있다. 니덤이 사회주의자가 된 과정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영국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홉킨스를 존경했고, 홉킨스는 과학연구협회장을 맡으며 생화학연구소를 매우 진보적으로 이끌던 리더였고, 당시 영국의 많은 과학자들은 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의 선두에 서서 과학과 사회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니덤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통해 버나드 쇼나 웰즈 등을 접했고,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활동가로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은 없지만,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게리 위스키의 책, <과학과 사회주의>는 니덤, 그리고 니덤의 친구이자 훗날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이자 과학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버날 (John Desmond Bernal)이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과, 그가 보여준 사회주의의 독특함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우선, 니덤의 사회주의는 과학의 발전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학생으로서 니덤의 사회주의와 버널의 민족주의는 모두 그들의 과학적 포부와 종교적 신념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젊은 웰스주의자였던 니덤은 자연스럽게 과학의 발전과 사회주의를 동일한 과정을 나타내는, 거의 같은 의미로 보았다.” <과학과 사회주의> 116~117쪽

버널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니덤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영향 받은 기독교 모더니즘의 바탕에서 사회주의를 인식했다. 버널과 니덤이 대학에 다니던 당시의 영국은 이제 막 1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고, 이들은 대학에서 수없이 많은, 정치적으로 활발한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군부독재 시절의 한국대학처럼, 니덤과 버널은 과학자로 성장했지만,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맥락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활동가로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셈이다. 한국적 표현으로, 그들은 ‘운동권 학생’이었다. 하지만 한국 운동권에 과학자가 별로 없었던 것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운동권엔 과학자이자 활동가인 학생이 상당히 많았다. 

니덤을 비롯해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과학자였던 레비, 홀데인, 호그벤, 버널 (1편 참조)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과학과 사회주의를 결합해 나갔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념을 과학과 일치시켜나간 버널과 달리, 니덤에게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니덤은 자신이 연구했던 생화학에서 일가를 이루는 도중에도, 존 루이스라는 학자와 <기독교와 사회혁명>이라는 책을 편집할 정도로, 기독교를 버리지 못했다. 

중국을 사랑한 과학자 니덤

니덤은 죽을때까지 기독교 신자로의 정체성과 과학자의 정체성 모두를 붙잡고, 둘을 융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니덤이 성장하던 당시 영국의 성공회에서는 개인의 영혼의 구원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보수신학에 맞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진보적 신학으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등장했으며, 니덤은 바로 그런 영국에서 진보적 신학에 편승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인물이었다. 니덤은 기독교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첫째, 지구상의 정의와 평화는 영적인 힘에 의한 미래에 천국으로 오는게 아니라, 몇 세기에 걸친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두번째 확신은, 우주적이고, 유기적이며, 사회적인 진화의 진정한 합일은 인간의 진보에 따라 그 길을 찾으리라는 철학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독교가 사회주의가 말하는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믿었는데, 이는 니덤이 바로 그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통해 신이 세상에 관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덤은 전투적인 유물론자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자연과학과 결부시켜 이해한 최초의 세대였으며, 그 모든 것의 뒤에는 기독교에 대한 그의 진실함이 담겨 있었다. 티모시 브룩(Timothy Brook)은 니덤의 중국학을 다룬 글에서, 니덤의 사회주의를 이렇게 요약한다.

“조셉의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이론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동지의식과 민주적 실천에서 오는 생활사회주의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니덤의 사회주의는 남미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적 이해에 가까웠다. 하지만 니덤이 그런 진보적 신학운동과 한 가지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주의의 모든 측면에 과학을 포함시키려 했던 그의 노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덤의 생애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서 왜 그가 생화학연구소를 방문했던 세 명의 중국학생에게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이라는 문명에 흠뻑 빠져들어 중국문명의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니덤의 중국에 대한 사랑은, 기독교, 사회주의, 그리고 과학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했을 때 나타난 학자적 열정이었다.

그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제 4권의 서문에서 그가 중국의 역사를 다시 쓰는 원칙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1. 인간의 사회적 진화는 인류가 자연과 외부세상을 통제하는 법에 대한 이해를 서서히 증가시켰다.

2. 이런 활동이 과학이며, 따라서 과학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과학의 응용과 그 기여로 인해, 모든 문명은 마치 강이 바다를 향해 가듯, 비슷한 경로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3. 이런 진보적인 과정과 더불어, 인간 사회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화합과 복잡성, 그리고 조직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간다.”

즉, 니덤의 세계이해에서 과학은 모든 것의 중심에 놓여 있다. 니덤의 기독교 사상도, 사회주의도, 그가 젊은시절 생화학자로 보내며 형성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녹아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니덤을 중국의 과학을 연구한 역사가 혹은 사회주의에 빠진 과학자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과학을 이해해야만 니덤이 추구해간 실천의 과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니덤을 한국에 수입하면서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간과하고 일부러 무시한 그것, 바로 생화학자이면서 동시에 발생학을 생화학과 융합하려 했던 과학자 니덤의 생각 속에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의 참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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