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3.발생학적 사회주의 - 과학자 니덤과 그 사상의 기원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3.발생학적 사회주의 - 과학자 니덤과 그 사상의 기원
  • 이로운넷=김우재
  • 승인 2019.04.23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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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널주의 - 1930년대 영국 공산당에 스며든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과 종교는 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다. 20세기는 이념의 전쟁터였다. 사회주의는 20세기 초반 유럽을 집어 삼킨 이념으로 자라나, 당시 유럽의 젊은 지식인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젊은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과학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존 데스먼드 버널을 필두로, 다양한 과학 분야의 우수한 엘리트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몸을 담았다.

종교가 자주 그렇듯, 이념 또한 쉽게 독단에 빠질 수 있다. 이념과 이념의 충돌이 20세기 세계사에 새긴 상처를 보면 독단에 빠진 이념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념이든, 현실세계에 대한 상식과 괴리되면 위험한 사상이 된다. 그 사상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빠르게 전파되어, 사람들의 두뇌를 잠식한다. 20세기의 세계는 이념의 전쟁을 경험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종교와 이념의 독단에서 자유롭지 않다.

게리 워스키는 흔히 버널주의(Bernalism)라고 불렸던, 1930년대 영국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을 분석해 책으로 출판했다. <과학과 사회주의>의 저자 후기에서, 그는 버널리즘이 보여준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기술한다. 먼저 이론으로서의 버널주의는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버널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과학적 사상, 즉 자신들이 과학연구자로 성장하면서 배웠던, 자연을 이해하는 엄밀한 방법으로 단련된 이념이 되기를 바랐다. 당시 영국 좌파의 우두머리들은 당시 영국이 보여주던 사회적/산업적 병폐를 과학적으로 치유할 수 있을만큼 똑똑하지 못했고, 버널주의는 바로 이런 영국 좌파에게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버널주의는 영국 좌파에 제공하는 이론의 측면 외에도, 실천으로 더 중요한 기능을 했다. 그건 바로 버널주의가 당시의 과학지식인들을 자유주의 조직을 넘어 사회주의 정치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당시 영국 공산당 지도부는, 과학자 당원들을 중요한 자산으로 여겼다. 버널주의가 보여주는 미래, 즉 과학이야말로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법이라는 이념이 당시 영국 공산당의 내부에 침투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영국 공산당은 ‘공산주의 과학자의 제1책무는 자신의 공산주의를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상황에 연관시키는 것’이라는 확고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었고, 공산당에 가입한 과학기술자들에게 더 훌륭한 과학기술자로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것을 권유했다. 과학은, 영국 공산당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체를 변화시킨 이념으로 작동했다.

발생학과 생화학의 경계에서 - 니덤의 과학철학

1930년대 니덤은 화학발생학(chemical embryology)이라 불린 학문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1931~1942년, 그는 교과서로 불릴 만한 세 권의 과학책을 저술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종설논문을 발표했다. 생화학자로 니덤의 관심사는, 효소의 화학작용처럼 단순한 반응을 분석하는 생화학의 연구영역을, 개체의 발생처럼 복잡한 생물학적 현상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던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대부분의 생화학자들은, 이런 니덤의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았다. 발생학자 그룹도 니덤과 같은 생화학자의 침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생화학이 발생학에 기여할 여지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1930년대의 발생학은 실험적 조작을 통해 현상을 단순화하는게 아니라, 단지 다양한 생물종의 발생과정을 기술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소장이었던 홉킨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니덤이 평생 추구하려 했던 생화학과 발생학의 만남은, 생물학 내에서도 가장 극과 극에 존재하는 두 학문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시도였다. 20세기 초반 빠르게 발전한 생화학은,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화학반응에 대한 연구들이었다. 둘 혹은 몇 개의 분자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분자를 만들거나, 없애거나 혹은 변형시키는 과정이 생화학이 다룰 수 있는 분야였고, 따라서 이들의 연구주제는 세포내의 분자 한 두 종류에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생화학 책을 펴본 사람은 알고 있지만, 적혈구를 구성하는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에 대한 내용이 교과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그 내용은 대부분 화학적 지식을 헤모글로빈 분자에 적용하는 방식의 연구다. 즉, 생화학은 생물학에서 가장 환원주의적 연구방법론을 사용하는 분야다.

발생학은 하나의 세포가 어떻게 개체로 발생해나가는지에 대한 연구다. 인간의 경우, 하나의 세포가 수조개의 세포로 분열과 분화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개체가 된다. 니덤의 동료였던 발생학자 콘라드 워딩턴(Conrad Waddington)은 운하화(canalization)를 통해 복잡해 보이지만, 어느 정도의 경로가 고정되어 있는 개체의 발생과정을 설명했다. 산맥을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통해 발생학적 과정을 설명한 비유는 탁월했다. 이 비유는 매우 복잡한 선택의 중첩을 통해 이루어지면서도, 환원주의적 연구방법론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단순성까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덤이 연구하던 당시의 발생학은 생물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환원주의로 풀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발생학에 접근하는 생물학자들의 연구방법론은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현상을 기술하는데 그쳤다.

 

영국의 이론생물학 그룹 - 물리학에서 과학철학까지, 분자생물학으로 가는 길

당시 영국 생화학계의 2인자 (1인자는 소장 홉킨스)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니덤이, 왜 굳이 생화학과 발생학을 융합시키려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생물학자로 그는 생명체를 일종의 기계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이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철학자로서의 니덤은 유기체주의라는 과학철학적 방법론이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던 사상가였다. 이런 종합가로서의 면모는 그가 교류하던 이론생물학자이자 생물철학자였던 조셉 헨리 우드거(Joseph Henri Woodger 1894-1981)와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 우드거는 19세기말 논리실증주의라는 과학철학의 학파를 만든 비엔나 학단의 영향을 받아, 생물학을 화학과 물리학으로 환원시켜 하나의 과학이라는 체계를 구성하고 싶어하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니덤은 우드거와 1920년대부터 교류하기 시작한다. 둘은 생물학자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경력을 쌓아온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우드거는 현상을 기술하는 발생학자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점차 이론생물학과 생물철학으로 관심사를 옮겼고, 니덤은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생물학인 생화학자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점차 그의 역사적/철학적 성향을 드러내며 역사가 혹은 철학자가 된 인물이다. 둘의 만남은 단지 학문적 교류에 그치지 않고 당시 이념의 전쟁터였던 사회에 관심을 가졌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하나로 모아, 격식이 없이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계에서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의 바로 이 그룹이 1940년대 분자생물학이 생물학의 중심 분야가 되는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우드거와 니덤 외에, 위에서 언급한 발생학자 워딩턴, 그리고 과학의 성자 버널, 그리고 철학자 칼 포퍼도 이 그룹에서 연구하고 발표하던 구성원이었다. 당시 이 그룹처럼 혁신적인 과학자/철학자 그룹은 드물었고, 이들은 비엔나 학단의 영향력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니덤의 급진성에 대한 평판, 보수적인 캠브리지의 분위기, 그리고 록펠러 재단과의 철학적 불화 등으로 인해 곧 종결을 맞는다.

최근 출판된 <생명, 그 유기체 - 이론생물학 그룹과 후성유전학의 기원>의 표지엔 담배를 문 니덤과 니덤의 부인 도로시, 그리고 우드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 즉 물리학과 생화학적 기반으로부터 복잡한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적/철학적 방법론을 구성하는 야망은, 몇 세대가 지나서야 다시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발생학이 생물학의 중심문제가 되려던 그 시기는, 유전자의 분자적 실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분자생물학이 생물학 모두를 집어삼키던 시기와 겹친다. 록펠러 재단은 분자생물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특히 박테리아를 이용한 환원주의적 연구방법론을 지원했다. 박테리아는 단세포생물이었고, 발생학의 연구주제도 아니었다. 박테리아엔 발생과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물리학과 화학의 언어로 생물학을 환원하려던 시도는 분자생물학을 통해 계속 이어지게 된다.

니덤은 과학자로의 경력을 이어가는 동안, 중국과학사를 저술하던 시기와 비슷한 정도의 밀도있는 연구를 했다. 그는 단지 생화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남으려 하지 않고, 물리학자, 화학자, 과학철학자, 발생학자, 이론생물학자 모두와 교류하며 과학에 대한 종합적 이해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런 열정적인 연구의 기저엔, 생물학을 통해 그가 이해하고 싶었던 철학적 사상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니덤이 역사와 철학에 대해 보인 관심을 그의 본성처럼 이해한다.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중국과학사가로의 경력을 시작하게 만들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왜 그는 중국사가 아니라 과학사를 연구했을지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니덤이 무려 20년이나 열정적으로 인생을 바쳐 연구했던 화학발생학에 대한 추적이 말해주는 바는, 역사학과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바로 과학을 통해 사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 중에 생긴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역사와 철학은 사상을 종합하려는 학자에겐 필수적인 여정이다. 하지만 니덤이라는 인간을 이루는 사상의 기저엔,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과학자’ 니덤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중국도, 역사학도, 철학도, 기독교도, 사회주의도, 모두 그의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종합가적 기질에 종속된 가지에 불과했다. “한 사상가를 이해하려면 그의 초기사상을 보라는 말”이 있다. 발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지들도 대부분 발생의 초기단계에 몰려 있다. 니덤은 생화학자로 그의 경력을 시작했고, 생화학의 틀로 세상을 종합하려 했던 사상가였다. 그는 과학자로 시작해 과학자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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