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모 너머의 생존투쟁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에 흑인 영웅이 탄생한게 겨우 몇 년 전의 일이다. 대부분의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와칸다의 왕은 '블랙팬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블랙팬더는 비브라늄이라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수트와 하트 허브를 섭취해 얻은 강력한 신체적 능력으로 전사로 활동한다. 미국 역사 속엔 실제로 블랙팬더라는 이름을 사용한 정당이 있다.

오승은은 블랙팬더당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국에서 가장 대담하고 파급력 있는 조직이자, 흑인 운동을 넘어 전체 급진 운동을 이끈 전위대”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흑인운동에 머물지 않고 백인 중심의 신좌파의 급진화를 유도했고, 미국의 선주민과 푸에르토리코계의 해방 운동 및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비롯한 전세계의 식민지 투쟁과 연대하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운동은 단순한 흑인인권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국가의 폭력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대의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 흑인 운동의 역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로 기억되지만,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으로 얻어낸 흑인의 시민권과 참정권의 법적 보장은, 1966년 미시시피의 흑인 대학생 제임스 메리디스의 도보 행진에 대한 백인의 저격으로 혼돈에 빠지게 된다. 흑인 민권 운동이 승리를 구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범죄는 더욱 증가했고, 테러를 자행한 백인에 대한 처벌은 전무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에 의해 시작된 ‘블랙파워’라는 구호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은 거대한 승리가 아닌 잠정적 휴전이었을 뿐이다. 1965년, 흑인폭동이 미국 전 도시로 퍼져나갔고, 오클랜드의 흑인청년들은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블랙팬더당은 오클랜드의 빈민가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1965년 암살된 말콤엑스의 후계를 자처했고, 더 이상 킹 목사의 민권 운동에 흑인의 미래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오클랜드 메리트 대학 출신의 휴이 뉴턴(Huey Newton)과 바비 실(Babby Seal) 그리고 데이비드 힐리어드(David Hilliard)는 지역 주민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구축했다. 그들이 상징으로 삼은 블랙팬더는 결코 먼저 공격하는 법이 없지만, 막다른 곳에 몰리면 끝까지 반격하는 힘과 인내의 동물로 선택되었다. 이들이 내세운 10대 강령은 자유, 흑인의 자기결졍권, 흑인의 완전고용, 경제적 착취 종식, 좋은 주거와 교육환경, 무상의료, 경찰의 폭력 금지, 모든 공격전쟁 종식, 모든 흑인 수감자들의 석방, 그리고 다양한 권리와 테크놀로지의 인민통제로 이루어져 있다. 블랙팬더당은 1966년에서 1982년까지 존속했으며, 워싱턴을 넘어 알제리 국제지부까지 5천여 명의 당원으로 성장했었다. 오클랜드에서 풀뿌리 활동을 하던 초기에, 이들은 경찰 순찰 활동을 시작했고, 거리에서 경찰이 흑인을 잡아 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경찰이 총을 들면 그들도 총을 들었고, 검은 가죽 자켓과 베레모를 쓰고 주먹을 드는 의례로 단결을 다졌다. 블랙팬더당에 대한 편견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생존을 위한 공동체서비스 프로그램

블랙팬더당은 지역주민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발족시켰고, 이를 생존프로그램 혹은 공동체 서비스 프로그램(Community Outreach Program)이라 불렀다. 오클랜드의 흑인 어린이들은 신호등이 없어 교차로에서 차에 치여 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블랙팬더당은 이를 위해 총을 들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거리를 건널 수 있게 했다. 이들의 개입으로 오클랜드시는 빈민가에도 신호등을 세웠다. 어린이들에게 아침을 먹이는 음식 프로그램은 블랙팬더당의 폭력적 이미지를 순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다. 블랙팬더당의 무료아침급식 프로그램은, 결국 미국 전역의 공립학교로 퍼져나갔고, 아침급식을 받으려고 떨며 서 있는 아이들을 위한 무료옷나눔 프로그램도 실시됐다. 당시 FBI 국장인 후버는 블랙팬더당의 무료아침급식 프로그램이 그들을 제거하는데 큰 장애물이라 여기고, 그 자금줄을 잘라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블랙팬더당의 생존프로그램은 이후 해방교육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확대된다. 그들은 대안학교를 짓고, 흑인 어린이들이 문맹이 되지 않고, 흑인의 권리에 대해 이해하며 자랄 수 있도록 했다.

블랙팬더당은 의식주와 교육을 넘어 건강프로그램에도 적극적이었다. 미국 공공건강제도들의 서비스 문제를 인식한 그들은 스스로 건강진료센터를 만들고 응급조치와 산부인과 검사 및 검진을 할 준비를 했다. 그들이 세운 건강진료소는 수 많은 흑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장소가 됐고,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진료소가 있다. 블랙팬더당은 베레모를 쓴 폭력적인 정당이 아니라, 정치권을 상대로 한 로비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법의 개정에만 몰두했던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대안 운동이었다. 그들은 지역주민을 기반으로 했고, 법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의 자립과 생존을 모색하려 했다. 그리고 블랙팬더당의 철학과 방향은, 대부분의 선진국의 시민운동이 걸어간 길과 정확히 일치한다. 단지, 그 선진국의 시민운동은, 미국의 흑인들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본 역사를 공유하지 못할 뿐이다.

겸상적혈구증후군 검사, 흑인운동의 과학이 되다

겸상적혈구빈혈증은 적혈구의 일부가 낫처럼 쪼그라드는 유전병으로, 헤모글로빈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 유발된다. 중고등학교 유전학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유전병은, 정확한 멘델의 법칙을 따르며, 아프리카에 흔한 말라리아에 대한 저항성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져 유명하다. 돌연변이된 유전자를 모계와 부계 모두에게 받은 환자는 죽지만, 한 쪽으로부터만 돌연변이를 물려받은 경우엔말라리아 저항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산소가 부족할 경우 심각한 통증이 수반된다.

시카고 지구당의 정치인 바비 러시(Bobby Rush)는 아프리카계 흑인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유전병인 겸상적혈구증후군에 주목하고, 이 유전병에 대한 검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이전까지 이 질병에 대한 검사는, 예후증세를 나타내는 사람에게만 실시됐지만, 블랙팬더당은 이 간단한 검사를 모든 흑인에게 확대하고, 검사방법과 결과를 판독할 수 있도록 지역 주민을 교육시켰다. 그들은 당의 프로그램을 공동체에 돌려주기 위해 항상 애썼고, 지역공동체가 스스로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겸상적혈구증후군 검사는 블랙팬더당의 가장 혁신적인 프로그램으로 떠올랐고, 곧 민중을 위한 겸상적혈구증후군 재단(People’s Sickle Cell Anemia Foundation)이 창립된다. 당시 연방정부는 이 질병을 다루지 않고 있었고, 팬더당의 노력으로 수 만명이 이 검사를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이 질병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고, 팬더당의 노력은 결국 정부가 새로 태어나는 모든 흑인에게 이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라이너스 폴링, 블랙팬더당을 지원하다

노벨화학상을 받고 나서, 반핵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은 1949년 겸상적혈구증후군의 분자적 기제에 대한 기념비 적인 논문을 사이언스지에 출판한다. 그는 전기영동법을 통해 생화학적 기법으로 이 질병을 쉽게 진단할 수 있다는걸 발견했고, 이를 통해 돌연변이에 의한 아미노산 치환이 이 질병의 기원임을 찾아냈다. 과학자였으나 사회의 부조리에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던 라이너스 폴링의 기질은 정치적으로 위험단체로 낙인 찍힌 블랙팬더당과 함께 정의로운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민중을 위한 겸상적혈구증후군 재단의 자문위원 자리를 수락했고, 이 재단이 미국 전역의 흑인들의 검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1969년 오소 다이아그노틱스 Ortho Diagnostics가 상품화했던 식클레덱스 키트 Sickledex kit의 저렴한 가격 덕분에, 팬더당의 생존프로그램에서 겸상적혈구빈혈증 검진 프로그램은 기적과 같은 혁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전히 흑인운동은 마틴 루터 킹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비폭력운동과 연설이 흑인 민권운동으로 미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만으로 당장 고통받는 빈민의 삶이 나아질 수 없다. 법과 제도는 느리며, 따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팬더당은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교육과 생존프로그램이라는 운동방법을 도입했고, 그들에게 덧씌워진 폭력적인 이미지를 걷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급진적인 운동에 건강한 합리성의 이미지를 선물해준 건, 유전병의 분자적 기제에 관한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의 열정적인 연구 덕분이었다.

헤모글로빈은 생화학 교과서의 처음을 장식하는 상징적인 분자다. 혈액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헤모글로빈은 생화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성장하는 동력을 제공했다. 헤모글로빈처럼 생화학자들에 의해 세밀하게 분석된 단백질도 드물다. 우리 피를 붉게 만드는 단백질이 바로 헤모글로빈이다. 붉은 피의 단백질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미국 흑인운동의 위대한 역사를 만나는 장면은, 실험실의 과학자들이 어떻게 사회와 조우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된다. 정치인들처럼 연설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과학자의 정치란, 자신의 연구와 사회가 맞닿아 있는 접촉면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그 접촉면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면 충분하다. 라이너스 폴링은 바로 그런 의미로 블랙팬더당이 만든 재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과학에 대한 진실함과 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 과학자는 그 두 날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덧붙히는 글: 이 글을 쓸 수 있게 아이디어를 준, 페이스북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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