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0. 과학은 어떻게 아나키즘을 되살리는가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0. 과학은 어떻게 아나키즘을 되살리는가
  • 이로운넷=김우재 박사
  • 승인 2020.01.14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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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우리 뇌에 쓰여진 유전적 지침서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의 사회적 운동이다. 아나키즘이 근대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아나키즘이 폭동, 암살, 테러 등의 폭력적 운동들로 연상되지만, 아나키즘이란 그저 지배(권위)가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사회적 운동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나키란 지배자가 없는 혹은 권위를 거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나키즘이 거부하는 권위는 정부만을 특정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강압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이다. 만약 누군가 거대한 폭압적 권력에 맞서고 있을때, 그는 곧 아나키스트이며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동료가 된다.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기 권력을 추종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폭압적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아나키스트들의 일부가 보여준 암살 및 테러가 과도하게 일반화되어, 아나키즘에 나쁜 이미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국가의 폭력이 존재하던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자본에 대항하고,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했으며,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발적인 시민단체 NGO를 조직해온 모든 이들은 아나키즘에 빚지고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처럼 근대에 새롭게 발견된 이념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와 함께 우리의 본성에 녹아 있는 행동양식에 가깝다. 아나키즘은 아프리카의 우리 조상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그들을 생존하게 도와준, 우리 뇌의 신경회로에 쓰여 있는 유전적 지침서다.

아나키즘에는 수많은 오해가 덧씌워져 있다.
아나키즘에는 수많은 오해가 덧씌워져 있다./사진제공=청년정치크루

질서와 무질서 - 아나키즘의 새로운 의미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사람들은 종종 아나키 혹은 무정부상태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사상의 일종으로 역사에 등장했을때에도, 아나키즘이라는 단어에는 무질서 혹은 혼돈이라는 의미가 스며들어 있었다. 정치적 리더십이 이끄는 민족국가 체제에 안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부재는 곧 혼돈을 의미한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정치적 지도자의 존재 또한,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했다. 권력을 지닌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곧 무정부 상태 혹은 무질서 상태를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해온 지난 인류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절대권력을 통한 질서의 유지라는 환상은, 지난 세기 인류가 거대화된 집단을 구성하면서 스스로에게 세뇌시킨 환상일 뿐이다. 국가와 같은 거대집단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상상해보면, 절대권력의 부재는 결코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소규모 공동체에 나타난 절대권력이 무질서를 불러온다.

아나키즘이 아니라, 질서를 부르짖는 권력이야말로 무질서의 근원이라는 통찰은 19세기의 아나키스트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에게서 왔다. 그의 책 <질서에 관하여>는 노동자들의 연대와 쟁의를 무질서로 왜곡하던 당시의 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오늘날 그 자들이 뜻하는 질서란, 열에 아홉 명이 노동하여 한줌의 게으른 자들에게 사치와 쾌락을 제공하고, 극히 역겨운 열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질서란, 열에 아홉이 번듯한 생활과 지적 재능의 정당한 발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나 예술적 창조에 의해 인간에게 제공되는 쾌락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 돼지 상태로 열에 아홉 명이 전락하는 것이다. 질서란 이런 것이다!

질서란, 가난과 기근이 사회의 일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질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일랜드 농민이며, 디프테리아와 열병 그리고 식량 부족에 뒤이은 기근으로 죽어가는 러시아 제3제정의 농민이다” 크로포트킨, <질서에 관하여>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노동자와 시민의 정당한 요구들은 무질서로 포장된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권력자들이 말하는 질서의 추악한 모습들을 모두 보여준 뒤, 그들이 말하는 무질서의 역사적 사례들을 하나씩 나열한다. 권력자들에게 무질서란 “치욕스러운 질서를 거부하고자 속박을 끊고, 족쇄를 부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민들의 봉기”다. 그것은 “임박한 혁명 전야에 닥친 사상의 반역”이고, “고대 노예제의 폐지”이며, “왕을 전율케 하고, 일할 권리를 선포했던 1848년의 혁명”이다. 권력자들이 말하는 무질서란,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들이다.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표트르 크로포트킨, 1842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아나키즘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드물게,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자였다. 신채호, 박열, 이회영, 김원봉 등 우리에게 익숙한 아나키스트 대부분이 인문학에 기반을 둔 낭만적인 실천가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역사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존재다. 하승우 교수는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을 통해 바쿠닌이 아나키즘을 사회혁명 차원에서 실천했다면, 크로포트킨은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여러 이념과 경쟁하던 아나키즘에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주었고, 당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및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에 이론적 생명력을 제공해준 인물이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왕자’로 불리는 인물이며, 아나키즘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해준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왕자’로 불리는 인물이며, 아나키즘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해준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고,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아나키즘을 알린 책은 <상호부조론>이다. 이 책에서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였던 크로포트킨은 툰드라와 아시아의 자연을 통해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사상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아주 작은 동식물부터 인간사회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와 문명에서 나타나는 상호부조의 원리를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적자생존으로 설명하려던 시도를 비판했고,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서구사회는 물론, 식민지였던 동아시아까지 잠식했던 사회진화론을 과학적인 근거들과 역사적인 논증으로 통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비슷한 시기에 쓴 책인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아나키즘 운동에서 과학의 중요성과, 근대과학에 대한 앎이 어떻게 아나키즘을 사회에 확산시키는데 더욱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크로포트킨 식의 논증이다. 크로포트킨은 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나키’라는 관념은 어떤 과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에서 나온 것도 또한 아니다.”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제 1장

즉, 아나키즘은 과학적 연구의 산물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로부터 기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반의 사회과학이 처해 있는 현실을 당시의 자연과학의 성과와 비교해 정확히 지적한다.

”사회과학은 지금도 아직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정확성을 가지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풍토나 기후의 연구에 있어서 조차 1개월 또는 1주일 뒤에 어떤 날씨가 될지 미리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물며 사회학과 같은 미숙한 학문을 가지고 바람이나 비 따위 보다 무한히 복잡한 사물을 다루어 장래에 일어날 사태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과학자 역시 보통인간에 불과하며, 그들 대부분이 상류계급에 속해 있고, 그 계급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한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나키즘은 민중 속에 기원을 갖고 있다.” 즉, 아나키즘은 “민중의 운동으로 전개되는 한에서만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상이다. 아나키즘을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여러 지적 운동들과의 맥락 속에서 설명하고 난 후, 8장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지위’라는 장에 이르러, 그는 아나키즘이 근대과학을 통해 구현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그건 바로 “아나키즘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포함시켜 전 자연을 포괄하는 현상의 역학적 해명에 바탕을 둔 우주관”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사회만을 대상으로 하는 다른 이념들과는 다르다. 크로포트킨에게 아나키즘은 자연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며, 따라서 그 설명에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자연과학은 형이상학과 어떻게 다른가. 크로포트킨은 이를 헤겔의 이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형이상학자는 인간의 지적 생활과 감정생활이 <정신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자연과학자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는 이와 같은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명․지식․감정의 여러 현상에 대한 자기네의 연구를 참을성있게 추진하여 이것들이 모두 물리적․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들의 자연법칙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 크로포트킨,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제 5장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형이상학자의 말들은 아나키스트에겐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듣기 좋은 말>에 승복하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언제나 반드시 무지를―즉 불완전한 연구를―감추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욱 나쁘지만 미신을 감추는 데에 유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사회관념 및 제도의 연구를 계속”하고, 인간의 사회발전에 대한 판단이 형이상학자들의 단순한 공식으로 판단하기엔 “훨씬 무한히 복잡하면서도 실천적 목적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것임을 인정한다. 

바로 이런 관점을 확장해서, 크로포트킨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위해 변증법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의 황망함을 지적한다. 그는 변증법적 방법은 당대의 어느 자연과학자도 승인하지 않는 비과학적 방법임을 말하고 나서, 19세기의 역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의 그 어느 발견도 변증법에 의해 발견된바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형이상학자들이 혐오하는 귀납적 방법이야말로 19세기 자연과학의 승리였음을 선언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념들 또한, 귀납적 방법론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부르주아들의 형이상학적 이념으로부터 민중의 삶을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적자생존을 마치 자연과학의 결과를 사회에 적용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회진화론자들의 비과학성을 지적한다. 부르주아들의 상태를 고착화시키는 사회진화론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기대고 있는 사상이 아니라, 다윈의 이론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시험되지 않은 비과학적 형이상학일 뿐이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역사에서 매우 드물게 과학자로 훈련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책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던 크로포트킨이 아나키즘을 과학적으로 정초하려던 노력의 산물이다./사진제공=인터넷 아카이브 사이트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역사에서 매우 드물게 과학자로 훈련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책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녔던 크로포트킨이 아나키즘을 과학적으로 정초하려던 노력의 산물이다./사진제공=인터넷 아카이브 사이트

크로포트킨에게 아나키즘과 근대과학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이었고, 그건 바로 과학적 방법론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폭력으로부터 민중을 지켜내는 유일하고 확실한 무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나키즘은 다른 형이상학적 이념과는 달리, 유일하게 과학적 방법론을 유연하게 사용해서 실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사상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에게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된 아나키즘은 아나키즘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아나키즘은 다른 형이상학들의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측면과 다를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과학은, 과학이 발견한 이론과 결과들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법론의 힘으로 아나키즘을 지키고 수호한다. 그것이 바로 크로포트킨이 과학적 아나키즘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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