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5.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15.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
  • 이로운넷=김우재 박사
  • 승인 2020.05.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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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 방법은 바로 과학가가 실험실 안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학파의 시조인 피어스(C. Peirce)는 항상 그의 새로운 철학이 바로 “과학실험실의 태도”(The laboratory attitude of mind)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이 철학의 각 학파가 공인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실험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중국 사상가 후스의 <실험주의> 중에서 

인문학적 제어론에서 유물론적 역사관까지

정문강의 공격에 장군매는 다시 베르그송의 논리를 빌어 상대한다. 즉, 정문강이 엄밀과학과 정신과학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칸트를 끌어들여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는 부정했던 자유의지를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정했다는 것을 근거로, 과학의 인과율이 정신과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거듭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장군매는 선한 것은 정신이고, 악한 것은 물질이라는 이분법의 구도를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를 계도하려면 현학이 과학을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불리는 이 논리는 과학은 반드시 인문학에 의해 제어되어야만 타락하지 않는다는 인문학자들의 근거 없는 윤리학적 우월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근대과학의 탄생 이후 서양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되어온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인문학적 제어론의 근거는 인문학이 윤리학이라는 학문을 포함한다는 단순한 전제에 기대고 있다. 즉, 윤리학은 인문학 고유의 연구주제인 윤리를 다루며, 따라서 과학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고민도 윤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적 제어론은 인문학은 누가 제어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며, 종교가 과학을 간섭해도 아무런 제지조차 할 수 없다. 윤리학은 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인문학을 위계적으로 통섭하려던 에드워드 윌슨의 기획에 인문학자들이 분노했던 바로 그 이유와, 인문학적 제어론을 통해 과학이 마치 비윤리적인 활동인 것처럼 표현하는 장군매의 주장에 정문강이 분노했던 이유는 동일하다. 과학과 인문학을 위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모든 주장은 공허하다.

현학으로 과학을 통솔하자는 논리에서 그치지 않고, 장군매는 송나라 학문을 부활하자는 황당한 주장으로 치닫는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인식은 감각과 개념이 합쳐서 이루어진다.
2. 경험계의 인식은 인과율에 따르나, 인생의 변화는 자유의지적이다.
3. 과학을 초월한 형이상학을 가지고 과학의 성과를 제어해야 한다.
4. 심성의 발전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계시해 주기 때문에 신송학을 제창해야 한다.

‘과학과 인생관’ 논쟁이 펼쳐진 무대와 형식은 자연과학의 학술지가 아닌 대중매체를 통한 산문이었고, 따라서 논쟁은 자연스럽게 과학자가 아닌 과학파와 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입을 통해 발화되기 시작한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한 논증은 철학이 가장 잘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훗날 이 논쟁은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책으로 정리되는데, 이 책의 서문은 진독수와 호적이라는 두 철학자에 의해 작성된다. 

호적 혹은 후스는 중국의 대격변기에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와 고투했던 계몽주의 사상사였고,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중국을 이성적으로 개조화하려 했다. 그는 존 듀이와 함께 중국을 여행하며 실용주의를 체화했고, 방법론적 실험주의라는 그의 독특한 사상을 창안했다. 그의 실험주의는 비판적 태도와 과학적 방법으로 문제를 연구하고, 중국의 오래된 것들을 정리해 새로운 문명을 열자는 사상이었다. 후스는 과학과 인생관의 논쟁을 정리하며, 인생관을 핑계로 과학을 배격하는 장군매의 논리엔 근거가 부족하다고 일갈하고, 과학파 또한 구체적 인생관을 제시하지 못해서 이런 논쟁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을 인생관의 기초로 삼는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 두 손을 충분히 훈련하고, 이 두뇌를 충분히 운용하고 능력을 증가시키고 지혜를 향상시키고 공구를 제작하여 물품이 더욱 구비되고 사람의 능력이 더욱 증대된 연후에 인공으로서 천행을 보충하여 정신상의 일체의 이상적 도덕이 그에 근거하여 도달되지 못할 것이 없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노력해 나가서 ‘어느 경우든 어느 때든 노력하고 개량하여야’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다.”

진독수는 현학은 과거의 미몽에 불과하니 과학적 사고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문강은 장군매를 이기지 못했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현학파를 확실히 논파할 수 있는 무기는 단지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객관적인 물질적 원인이 사회를 변동할 수 있고, 역사를 해석할 수 있고, 인생관을 지배할 수 있음을 믿는데, 그것이 곧 ‘유물론적 역사관’이다.”

진독수 혹은 천두슈는 근대 중국의 언론인이자 철학자이며 혁명가로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초대 지도자였다. 그의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의 심취는 과현논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진독수가 과현논쟁에 참가했고, 훗날 중국 공산당의 창립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현대 중국을 만든 사상의 기반에 과학이 깊이 관여했음을 알려준다. 즉, 과현논쟁은 단지 근대 중국의 지식인들이 중국 전통문화와 서양에서 유래한 과학을 두고 벌인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중국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두고 벌인 치열한 세계관 논쟁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신유학을 종합했다고 알려진 풍유란은 사실상 과현논쟁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집대성한 셈이다./사진제공=웅진 지식하우스
중국의 신유학을 종합했다고 알려진 풍유란은 사실상 과현논쟁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집대성한 셈이다./사진제공=웅진 지식하우스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

현대 중국에서 신유학을 창시했다고 일컬어지는 철학자 풍유란 혹은 펑유란은, 과현논쟁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각종 학설의 목적은 경험을 서술하는 데 있지 않고 이론을 수립하는데 있으므로 그 방법은 반드시 논리적이며 과학적이어야 한다. 근래에 이런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적 방법에 대한 일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사실 과학적 방법은 실제 우리가 통상 사고하는 바 가운데 비교적 진지하고 비교적 정확한 것일 뿐, 어떤 기묘한 점은 없다. 오직 그러한지라, 논리와 과학적 방법을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논변은 여전히 논리와 과학적 방법에 의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직각’ 등의 가치를 인정하긴 하나, 그것을 철학의 방법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방법이 바로 철학의 방법이며, 우리가 통상 사고하는 방법과 다만 정도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종류상의 차이는 없다.”

중국 근대 이래의 과학주의와 인문주의 사조의 노력을 융합했다는 풍우란의 철학에는 과현논쟁의 뚜렷한 각인이 새겨져 있으며, 그는 바로 과현논쟁의 경험을 기반으로 현대 중국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현논쟁은 중국의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력은 현대 중국을 주조하는데 기여했다. 과현논쟁이 지식인들의 현학적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현대 중국의 건설에 기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논쟁에 참전한 사상가 모두가 새로운 청년 중국인 세대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새로운 중국을 만들 희망은 청년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며, 바로 그 의지로 인해 과현논쟁은 소모적인 정쟁이 아니라 생산적인 신문화 건설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지식 청년들이 과학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논쟁은 1년 만에 정리되었다. 당시의 청년들은 과학파의 인생관이 당대 중국의 사회변혁에 더욱 부합한다고 생각했고, 미래를 향한 진보적인 세계관을 제공한다고 여겼다. 과현논쟁은 바로 그 치열한 중국건설의 현장에 주체적인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근대 중국의 언론인이자 철학자이며 혁명가로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초대 지도자 천두슈
근대 중국의 언론인이자 철학자이며 혁명가로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초대 지도자 천두슈

과현논쟁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측면은 이 논쟁이 인생관 문제라는 다소 형이상학적 주제로 촉발되었지만,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현실적 실천 논리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다룬 과현논쟁에서 과학의 지위를 둘러싼 주제 외에도 다양한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 논쟁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폭의 담론들을 다룬다.

- 과학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해 과학은 제1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있는가?
-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각기 어떻게 정의하며, 서로는 어떤 관계인가?
- 과학과 가치는 서로 무관한가 혹은 어떤 관계인가
- 과학과 철학을 어떻게 규정하며, 둘은 근원, 차이, 범위에서 어떻게 다른가
- 전통과 현대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특히 진독수와 호적 등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론자와 자유주의자가 이 논쟁에 개입하면서 논쟁은 사회적 인과율과 구망의식, 즉 과학과 현학을 통해 어떻게 사회를 구할 것인가로 확대되었다. 특히 진독수는 호적 등의 자유주의를 관념론으로 공격했고 이어 정문강 또한 현학파를 완파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객관적인 물질적 원인이 사회를 변동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과학적 역사해석이 인생관을 지배해야”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독수는 사회변혁을 위한 자신의 인생관인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을 통해 과현논쟁을 해석했고, 이는 호적처럼 자유주의자의 반론을 통해 유물주의와 유심주의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진독수와 같은 유물사관파가 과학파, 현학파의 대립에 끼어들면서, 과현논쟁은 사회사상논쟁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특히 아편 전쟁 이후 중국 근대사에서 서양과학의 수용은 중요한 문제였고, 과학은 새로운 중국을 구망하기 위해 필요한 유력한 무기로 대두되었다. 20세기 초반, 과학이 중국에서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되면서 새로운 중국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지니고 있던 지식인들은 과학의 지위를 둘러싼 과현논쟁으로 부딪히게 된다. 그 충돌은 필연적이었고, 5.4 신문화운동과 더불어 중국사회의 축은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 이동시킨다. 옮겨진 축은 시대가 요구하는 실천논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중국의 미래를 위한 준비로 기능했다. 이후 1930년대 벌어진 ‘중국사회성격논쟁’과 1980년대 마오쩌둥 이후의 중국을 기획했던 ‘문화열 논쟁’은 모두 과현논쟁의 구획 속에서 작동했던 것이다. 근대 중국을 기획했던 사상적 기반의 틀 속에는 과학이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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