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강을 어떤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전공으로 말하면 그는 소수 서방 교육을 받은 과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구자다. 그러나 그는 또 정부관리이면서 신문기자, 기업가, 정론가, 교육자이다. 즉 그는 20세기 20~30년대 북경 학술계의 영수다." - 샬롯 퍼스

“만약 이처럼 책도 읽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다면, 경험지식은 모두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오직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주장을 하게 된다면 인생관은 모두 양심의 자발성에 기인하게 되며, 결코 아무런 지식도 쌓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독서, 학문, 지식, 경험. 이 모든 것을 어찌 시간 낭비라고만 할 것인가? 모든문제는 토론의 여지가 있으며, 토론은 모두 논리적인 규칙을 필요로 하며, 정의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정문강-

1933년 1월 15일, 철학자 후스가 주관한 잡지 <독립평론>에 ‘내가 만일 장제스라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린다. 글은 일본에 대한 장제스의 무저항정책을 가열차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글의 저자는 장제스의 “가장 비열한” 무저항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큰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은 고깃덩어리를 “한 칼씩 베어낸다”고 적었다. 저자는 무저항정책으로 인해 일본의 전아시아주의 더 빨리 실현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장제스에게 “즉시 공산당과 휴전을 상의해야 하며, 휴전의 유일한 조건은 항일기간 내에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경고로 글을 마무리한다 

당시 장제스는 국민당을 이끌며 군벌들을 굴복시켜 중국을 통일하고, 심지어 1928년부터 중화민국의 지도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세했다. 그런 파시스트 장제스에게 비열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저자의 이름은 정문강(정문강 丁文江)으로, 그는 철학자나 정치인이 아닌 중국의 지질학자였다 정문강은 1887년 장쑤성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자라면서 전통적인 교육에 불만을 느껴 190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정문강은 그곳에서 자연과학과 조우하게 된다. 이후 그는 1904년 영국 글래스고로 유학을 떠나 동물학과 지질학을 공부하고, 7년간 캠브리지, 런던 대학 등을 거치며 의학, 동물학, 지질학, 천문학, 문학 등을 공부하며 서구의 최첨단 학문들을 섭렵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전의 일이다.

20세기초, 중국근대사에서는 민주주의와 함께 과학이 새로운 중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흐름이 나타났고, 이후 중국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과학구국사상을 이끈 대표적 과학자가 바로 정문강이다. 이 포스터는 1980년대에 중국정부가 과학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사용하라는 취지로 만들었다.

구망과 계몽, 그리고 지질학자의 정치

1911년 귀국한 정문강은 베이징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에 참가했으나, 관료가 되지 않고 이후 북경 지질연구소를 만들고 북경대학에 지질학과를 설립하는 등의 일을 통해 중국사회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당시 과학이 가장 진보했던 영국에서 지질학자로 훈련받아 중국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던 정문강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처럼 삶의 목표를 단지 학자로 성공하는 일에 두지 않았다. 20세기 초 신중국을 꿈꾸었던 중국의 계몽적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정문강 또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적인 발언과 실천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우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작업, 즉 지질학자로서의 정체성을 통해 중국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중국 근대지질학 발전을 위해 북경대학 지질학과와 중국 최초의 지질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다수의 과학 관련 연구소와 학회 그리고 학술지 및 잡지를 창간했을 뿐 아니라, 이런 실천들을 통해 국제학술교류를 증진시켜 중국의 과학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자연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연구에서 확장시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실천에도 적용했다. 연구를 상아탑에 가두지 않는 그의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과현논쟁에서 장군매의 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민주와 과학이라는 신문화운동의 기치를 통해 중국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과학의 계몽과 전파에 힘을 쏟았다.

정문강의 학문적 성과는 모두 새로운 중국의 건설이라는 목표로 집중되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구망’, 즉 중국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면서 ‘계몽’, 즉 중국의 전통문화를 뒤엎어 새로운 문화재건을 추구했다. 지질학자 정문강 또한 20세기 초 중국의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시대정신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그의 학문도 자연스럽게 구망과 계몽이라는 두 가지 화두로 점철되었다. 정문강은 자신이 배운 지질학이라는 과학지식을 구망의식에 투영했던 투철한 근대중국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북경대에서의 연구와 동시에 그는 지질연구소 설립에 나선다. 그가 지질연구소를 설립한 이유는 중국의 기술 산업 부흥을 위해서 광물자원 확보가 시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지질학연구기반을 확립했고, 인력확충을 통해 전국적인 지질탐사작업을 실시했다. 그가 1931년 발표한 <중국 지질학자의 책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지질학자 정문강이 학문을 통해 어떻게 정치라는 실천적 행위에 나섰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나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면 반드시 공업화를 이루어야 한다. 공업화에 필요한 원료는 그 종류가 매우 많다. 특히 석탄, 석유, 철, 동, 아연 등의 원료가 매우 중요하다. 중국지질학자들이 이런 것들을 하나씩 발굴해 이것들을 각기 자급자족하도록 만드는 것이 새로운 중국건설을 위한 진정한 공헌이다.”

영국 글래스고 대학 유학 당시의 정문강. 그는 중국 지질학의 선구자였다.

과학자, 행정가, 그리고 과학구국의 길

정문강은 자신의 학문을 통해 중국을 변화시킬 전략을 세웠고, 평생을 그 일념으로 움직였다. 그는 영국유학과 북경대학에서 경험한 연구자의 현장성을 단지 학문적 발전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의 변화라는 좀 더 큰 목표 속에 확장시켰다. 그 실천의 첫걸음은 스스로 과학기술 행정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정문강의 행정가로서의 면모가 가장 빛난 장소는 ‘국립중앙연구원’이었다. 지질조사소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활약과 북경원인의 발견, 그리고 과현논쟁에서의 주장들은, 중국 과학기술인은 물론 정치인들에게도 정문강이 구체적인 성과를 가진 과학자일 뿐 아니라, 과학을 통해 중국을 혁신하려는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그는 중국과학연구의 최고 연구기관이었던 국립중앙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제도적 혁신을 만들어낸다. 특히 그는 연구원이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철학을 실현시켰는데,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과학연구가 왜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의지가 잘 드러난다.

“중앙연구원이 국가의 ‘최고’ 연구기관이라고 해서, 모든 과학연구를 통제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국가는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있지만, 과학연구는 결코 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권위의 지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국가도 과학연구를 통제할 기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소련도 이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는 불과 1년 반(1934~1936)이라는 기간 동안 연구원이 수행하는 연구들이 당시 새로운 중국을 위한 목표에 부합하도록 하는 제도적/철학적 기반들을 정립했다. 그는 연구원의 연구활동이 좀 더 실용적으로 국가 차원의 목표에 부합해야 함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과학의 필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마치 세계대전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과학, 끝없는 프론티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던 바네바 부시처럼 정문강 또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실상 ‘응용’과학이 발달한 국가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순수’과학을 제창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미국의 많은 ‘순수’ 과학연구는 모두 실업계가 투자한 돈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순수’와 ‘응용’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혹은 대다수의 과학적 응용은 소위 ‘순수’한 연구로부터 시작된다. 최근의 무선전화와 X선은 바로 이러한 것의 분명한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고생물학이 석유 지질학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 되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증기기관 연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최근의 예로 X선 연구를 통해 단백질 분자의 구조를 밝혀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문강은 자연과학뿐만이 아니라 과학방법론과 연계된 역사학, 언어학, 고고학, 사회과학 연구를 진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과학주의자였지만, 그는 새로운 국가통일의 기초로서 인문사회과학은 깊이 연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통일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공공의 신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신념의 기초는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 위에서 수립”될 수 있고, “역사학과 고고학은 우리민족의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고, 언어학과 인종학 및 기타 사회과학은 우리민족의 현대를 연구하는 것”으로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 우리의 역사를 연구”해야만 “새로운 신념의 기초가 확립”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념에 잊혀진, 실천적 과학지식인

정문강은 과학을 상아탑 속에 가두지 않고, 자신과 조국이 놓인 현실적 상황을 결부시켜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중국에 필요한 ‘과학’을 과학적 인식 혹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강조했고, 제도적으로는 지질조사와 연구인력의 충원, 그리고 과학기술연구의 중국적 필요성에 대한 정비로 실현시켰다. 그는 평생동안 ‘과학구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걸었고, 과학을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추상적 학문의 영역에 놔두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추동력의 지렛대로 삼았다. 그보다 더 확실하게 중국근대화에서 과학과 과학자의 역할을 보여준 인물은 없었으며, 여러가지 의미에서 그는 중국 ‘과학구국’의 선구자였다.

이처럼 중국 현대사 속에서 과학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기념비적이어야만 하는 인물이 현재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서도 잊혀진 이유는 1980년대까지 중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과현논쟁이 과학파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정문강이 주도했던 과학파의 사상적 승리는 이후 공산당의 설립과 농민공을 통한 마오쩌둥의 승리에 깊게 투영되지 못했다. <중국현대사상론>의 저자 리쩌허우는 이를 ‘구망’과 ‘계몽’의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즉, 과학파가 내세웠던 ‘계몽’운동이 이후 공산당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구망’운동에 의해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신중국 설립 이후 구망을 위한 과도한 이념화가 경직된 국가체제를 초래했고, 바로 그 문화대혁명의 격랑 속에서 과학구국은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정문강이 군벌시기 장제스에 협조했었다는 이유로, 그는 ‘반동 군벌의 원흉’, ‘반혁명주의자’, ‘제국주의의 졸개’라는 평가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중국 근대화의 역사에 우뚝 서 있는 실천적 과학지식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정문강이라는 인물은 20세기초 중국 과학구국 운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중국대륙에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고 정문강의 과학구국사상은 이후 현대중국의 발전에 거대한 사상적 흔적을 남겼다. 1933년 난징에서 설립된 중국 과학화운동협회의 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발견된다. 정문강의 꿈은 중국사회의 기저에 깊은 흔적으로 남았다.

“자연과학과 실용과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 과학지식을 민간으로 확산시킴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공동의 지혜가 되게 하자. 나아가 이런 지식이 민간에 전파된 후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민족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날로 쇠약해가는 중화문화를 부흥시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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