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이야기] 11. 무의식적 편견, 일터 성비 불균형 부른다
[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이야기] 11. 무의식적 편견, 일터 성비 불균형 부른다
  • 오스트리아(비엔나)=이지현 분자유전학 박사
  • 승인 2020.02.03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 사회진출 늘었지만 유리천장 여전...생명과학 분야 높은 직급에는 20%만 여성
같은 내용 지원서도 남성 이름일 때 더 높게 평가한다는 실험 결과도
유럽서는 출산시 연구비 지원, 웹사이트 설립 등 성평등 실현되도록 정책 마련 多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렸다. 사회에서 높은 직위에 있는 여성 멘토들의 인터뷰가 담긴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모그룹에서 최초로 여성 임원이 돼 화제가 됐던 멘토의 인터뷰가 궁금했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으로서’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의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회식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술을 마시며 어울렸다”거나, 본인은 많은 여성이 커리어에서 겪는 결혼·출산·육아라는 3가지 과업과 상관없는 ‘골드미스’라 다른 남성 동기들과 다름없이 야근을 도맡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도 인정했다. 그녀는 다른 여성 후배들이 따를 “표본”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그렇지만 그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의 삶의 궤도는 당시의 나에게 여성으로서 높은 직위에 올라가려면 대체 현재 내가 가진 ‘정체성’을 얼마나 벗어던지고 남성에 동화돼야 하는가 하는 슬픈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훌쩍 지난 현재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성으로서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려면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필자가 있는 생명과학 분야는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관련 대학 진학률이 남성의 진학률과 비슷하다. 하지만 박사 후 연구원, 책임 연구원 및 교수, 시니어 수준의 책임 연구원 및 종신 교수로 직급이 상승할수록 여성의 비율이 급격하게 줄어 가장 높은 직급의 전체 중 15%~20%만이 여성으로 구성돼있다. 높은 직급에서 여전히 성별 불균형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려는 여성의 열망이 남성보다 낮아서라는 이유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구조적으로 수정돼야 할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문제가 부각되는 교수 임용, 승진 과정을 살펴보자. 한 연구에서는 미국 연구 대학들의 교수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평가에 편견이 나타나는지를 실험했다. 똑같은 2개의 지원서에 지원자의 이름만 남성 혹은 여성 이름으로 바꾸어 넣고 평가하게 한 결과, 교수들은 남성 지원자를 더 능력이 있고 고용할 가치가 있으며, 여성 지원자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편견은 교수들의 성별과는 무관하게 나타났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 다른 장애물은 추천서로부터 비롯된다. 남성성이 과학자로서의 이상적인 표본이라는 성 고정관념이 추천서에서 어떤 자질을 강조할 것인지에 영향을 미친다. 한 의과 대학 교수직 지원자들 312명의 추천서를 사후 분석한 결과, 남성 지원자들은 추천서에 연구 능력, 논문 출판, 직업에 대한 열망과 관련된 내용을 빈번하게 적었지만, 여성 지원자 추천서의 경우 가르치는 능력, 실질적인 임상 기술, 개인의 열정이 더 많았다. 연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항목을 강조한 추천서를 받는 남성 지원자들은 여성 지원자보다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다른 연구에서는 여성 지원자의 경우 아주 뛰어난 평가의 추천서를 받는 비율이 남성 지원자의 절반 수준이었고, 남성 지원자들의 추천서에는 지원자의 약점에 해당할 만한 코멘트가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성에 대한 편견은 오랫동안 이어진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와 평가 지표에 의해 공고해졌고, 우리의 무의식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여성이 커리어를 이어 나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출산, 육아에 따른 공백과 같은 명백한 차이를 제외하고도 우리의 인식 기저에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현재 조직에 작동하는 틀에 더 자신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현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줄기세포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를 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 발렌티나 그레코(Valentina Greco)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조직의 다양성을 잃게 하고 여성들이 가진 정체성을 빼앗아 간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의식적 편견을 줄이고 연구 조직 내 성평등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까? 유럽 내 기초 연구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는 유럽연구회(ERC, European Research Council)에서는 공식 출범한 2007년부터 꾸준히 연구비 선정과 집행 과정에 성평등이 실현되도록 정책을 세우고 보완, 발전시켜 오고 있다. 동료 평가 과정에서 일어나는 편향을 줄이기 위해 평가 그룹의 성별 균형을 맞추도록 한다. 같은 정도의 우수한 연구 제안서라면 여성 리더가 이끄는 공동연구 그룹을 남성 리더가 이끄는 그룹보다 좋게 평가한다. 여성 과학자가 아이를 낳는 경우 1명당 연구비 지원 가능 나이를 18개월 늘려 출산과 육아로 생기는 불이익을 상쇄시킨다. 이러한 정책은 당장 여성들의 불이익을 줄여주는 동시에 연구 지원 기관에서부터 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를 커뮤니티에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개선시켜 나가는 길은 남성들에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주는 길이기도 하다. 균현잡힌 라이프 스타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일깨워주는 LIBRA 포스터 캠페인 중 하나. /사진=LIBRA

유럽 연구기관들의 성별 균형을 맞추기 위한 다른 노력의 예로 2015년~2019년까지 유럽연합의 지원 아래 유럽의 13개 자연 과학 연구소들이 참여해 진행한 ‘LIBRA 프로젝트’가 있다. 이들은 다른 연구소들에서의 성평등 수준을 평가하고 혁신적인 실행방안을 수행한다는 목표 아래 연구 및 활동을 진행했고, 그 내용을 정리해 놓은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학계의 성평등을 목표로 박사과정생, 박사 후 연구원에게 적절한 훈련을 제공하는 한편, 임용 과정에서 기관이 여성을 더 많이 모집하고 고용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상세하게 제시했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중시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 또한 강조했다.

우리는 숫자만으로 보이는 다양성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을 원한다. 무의식적 편견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계속될 때 진정한 다양성을 가진 조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