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영국의 해변 도시 브라이튼에서 대학원생의 정신건강 및 복지에 관한 국제 회의(1st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mental health and wellbeing of postgraduate researchers)가 처음으로 열렸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건강과 웰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학회는 콕 집어 ‘대학원생의 정신건강’만을 다뤘다. 그 누구보다 똑똑하며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은 미래 학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학회라니?
2018년 네이처지 연구에 따르면, 대학원생은 일반인에 비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경험할 확률이 6배 이상 높다. 한국도 비슷하다. 201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교육환경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대학원생의 60% 이상이 우울감을 평균 이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들어 우울증을 경험하는 한국의 20대 인구가 전체적으로 늘고 있다는 보고가 있지만, 같은 연령대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의 대학원생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연구에서 대학원생 우울증의 대표적인 원인을 비정상적으로 긴 근무시간과 과중한 업무량으로 꼽는다. 나와 같은 이공계열 연구자의 경우, 실험이라는 육체 노동을 일과 시간에 하고 퇴근하면, 하루에도 몇 편 씩 발표되는 관련 분야 논문이 기다리고 있다. 끊임없이 연구 주제를 생각하는 게 미덕이라지만, 이렇게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리는 건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다. 대학원생과 교수 사이에 낀 박사후연구원(포닥)에게는 짐이 더 얹힌다. 짧은 계약 기간이 만드는 불안정한 생활, 그리고 그 안에 새로운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이다.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지도교수다. 연구에 따르면, 지도교수가 이들의 정신건강 관리를 얼마만큼 지지하고 돕는지에 따라 우울?불안의 빈도가 크게 낮아졌다. 그렇다고 교수가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또, 교수 임용 기준은 연구 업적이지 제자들을 얼마나 잘 이끄는지가 아니기에, 도울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최근 구미권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대학 및 연구소 단위로 심리상담을 제공하거나, 정신건강 및 웰빙에 관한 안내 자료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다. 같은 공간 안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는 동료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터놓고 이야기할 동료가 한 명만 있어도 한결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이익을 염려해 이 마저도 꺼리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의 삶은 고달프다. 성공보다 실패하는 실험이 많고,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실패를 곱씹으며 다음 실패를 준비해야 한다. 성공한 실험 결과를 얻어도 타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나도 몇 번씩 같은 실험을 반복해봤다. 같은 결과가 여러 번 나왔지만, 다른 사람이 해도 같을까 의심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거듭되는 실패를 견뎌낼 힘과, 스스로를 의심하되 스스로에게 실망하지는 않는 자신감이 필요한 과학자. 다른 무엇보다 건강한 마음이 필수다.
연구의 고유 특성보다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원인은 지금의 연구 환경이다. 쉼없이 끊임없이 자기 실력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연구 평가 체계, 쉬지 않고 계속 일해야 한다고 무언의 강요를 하는 연구 문화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가장 오래 실험실에 머무르는 소수만이 살아남는다. 연구의 독창성은 마음이 편할 때, 가장 건강할 때 빛을 발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학계에 있을 때 독창성의 범위가 확장되고, 더 창의적인 연구가 이뤄진다고 믿는다.
연구 고유의 특성과 환경이 ‘우울한 과학자’를 더 많이 만들지만, 무언가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무한 경쟁, 그리고 과도한 업무량은 학계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문화는 사회 곳곳에 있다. 그 문화 때문에 누군가는 우울하고, 누군가는 그만큼의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없어 일찌감치 포기한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해야 하는 일터는 정상적인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 조건을 갖춘 이들만 살아남는 일터는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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