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이야기] 6. 정원을 사랑한 남자
[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이야기] 6. 정원을 사랑한 남자
  • 영국(노리치)=안희경 식물분자생물학 박사
  • 승인 2019.11.25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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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이네스 원예 연구소, 식물학 발전에 투자

영국에도 소위 ‘불타는 금요일’이 있다. 집 근처 피시앤칩스(fish and chips) 가게에는 금요일이면 줄이 길게 늘어선다. 배달도 안 되고, 식당에 테이블도 없고, 술도 안 팔기에 다들 팔뚝만 한 생선과 감자튀김을 종이에 둘둘 말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시내 펍(pub)들도 분주해진다. 그리고 또 한 곳, 필자가 속한 연구단지 내 레크리에이션 센터도 시끌벅적 해진다. 금요일에만 바(bar)가 열리는데, 이 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맥주가 일품이다. 연구단지 내 연구소 설립자 이름을 딴 ‘존 이네스’ 맥주다.

존 이네스(John Innes; 1829-1904)는 런던의 부동산 중개업자였다. 그는 형과 함께 런던 남서쪽 윔블던(Wimbledon) 근처 머튼 지역 땅을 사들여 전원주택단지를 지었다. 독신이었던 존 이네스는 유산을 모두 국가에 기증하며 원예 과학 연구소나 미술 작품을 수집할 미술관을 건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친척들은 소송을 걸었으나 이기지 못했고, 존 이네스 자선단체(John Innes Charity)가 세워졌다. 신탁관리자들은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1910년 존 이네스 원예 연구소를 세웠다. 본래는 머튼 지역에 지어졌으나 1967년 영국 동쪽 노리치에 있는 지금의 연구단지로 이전했다.

원예 연구소로 시작한 존 이네스 연구소는 영국 현지인들에게 원예용 배양토로도 유명하다. 1930년대 정원사들은 키우고자 하는 식물을 종마다 다른 흙에 키웠다. 존 이네스 원예 연구소 소속 정원사들은 모든 원예작물을 키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배양토를 만들기 위해 수년간 연구했다. 이렇게 개발된 ‘존 이네스 배양토’는 특허 없이 공개돼 8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 그 뿐이 아니다. 1970년대까지 육종에 집중한 결과, 새로운 과일 53종, 꽃 28종, 채소 15종 등을 개발했다.

하지만 존 이네스 연구소의 연구 방향은 초기부터 응용작물과학보다는 순수과학을 향하고 있었다. 초대 소장으로는 멘델의 유전학 연구를 영국에 퍼뜨린 윌리엄 베이트슨(William Bateson), 베이트슨이 사망한 후에는 그 뒤를 이어 유전학 실험실을 담당했던 J.B.S. 홀데인 등 유전학에 강한 인물들이 임용돼 식물유전학이 대표 연구 주제가 됐다. 지금도 여전히 토마토, 밀, 유채 연구 등 작물유전학에 강세를 보인다. 한편, 1980년대 식물학의 새로운 모델 ‘식물 애기장대’ 연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면서 식물의 기본적인 생명현상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하는 중이다.

존 이네스가 왜 원예 연구소를 짓고자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개발한 머튼의 전원주택 단지는 집집마다 생울타리가 둘러 있고 여전히 곳곳에 공용녹지가 남아 있다. 원예에 관한 관심이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유추할 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연구소는 원예 연구소를 넘어서 ‘식물은 어떻게 사는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풀어내는 연구소로 거듭났다.

존 이네스 연구소가 위치한 노리치 연구 단지. /사진=존 이네스 연구소 홈페이지

존 이네스 연구소는 절반 이상의 연구기금을 영국 생명과학연구기금(BBSRC)으로부터 지원받는다. 존 이네스 재단은 지금 있는 연구소 부지를 매해 나무 한 그루라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대여하는 한편, 대학원생 장학금 및 복지시설을 유지하는 역할만 한다. 존 이네스 재단은 연구소 내 어린이집 건립, 바를 포함한 레크리에이션 센터 운영, 수영장을 비롯한 다양한 스포츠시설 유지 등을 지원하고 있다. 연구소 내 연구는 공적 자금을 통해 이뤄지지만, 그 인프라는 민간 재단이 지원하는 방식이다. 정부에서 꺼려하거나 미처 영향을 끼치지 못 하는 분야를 진흥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위험도가 떨어지면 정부에 다시 배턴을 넘기는 이런 방식은 정부에도, 민간 재단에도 이득일 것이다.

대부들의 자선활동이 활발한 요즘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빌과 멜린다 게이츠, 그리고 워런 버핏이 시작한 ‘기빙플레지(Giving Pledge)’ 모임이다. 재산 절반 이상을 자선활동에 기부하기로 한 억만장자들의 모임이다. 빈곤 퇴치, 백신 개발, 지구온난화 방지 등 쌓인 현안을 정부나 기업이 아닌 제3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전 글의 개츠비 재단이나 이번에 소개한 존 이네스 재단의 활동 목표는 식물학의 발전이다.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도 농업에 좀더 초점을 두고 있지만, 식물학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고 있다.

왜, 식물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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