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제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온라인으로 동료들과 실험 결과를 논의하던 중이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아이가 아빠와 놀고 있었다. 신이 난 아이는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는 그대로 동료들에게 전해졌다. 아이 목소리가 들린다는 말에, 그대로 카메라를 돌렸다.
“응, 바로 옆에 있거든.”
두 달 남짓 이동제한을 겪으며 우리 집 거실은 거실 겸 놀이방 겸 사무실이었다. 거실 책상은 식사 때면 본래 용도인 식탁으로 쓰였으니, 이동제한 기간 동안 거실은 식사 공간까지 겸비한 만능 거실이었다.
박사과정을 보내고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내면서 깨달았다. 나는 올라갈 곳이 없다기보다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일이 남들보다 훨씬 어렵다고. 임신, 출산, 육아는 인생의 기쁨이지만, 학계 내 경쟁에서는 똑같은 거리를 달려도 힘이 배로 드는 모래주머니 같다. 이동제한 기간이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온라인 회의를 하고 전 세계 온라인 세미나를 들을 기회가 된 반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회의 일정을 잡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시간이 됐다. “애가 낮잠 자러 들어가면 회의합시다.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해 준 고마운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막연히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기 힘들다고만 생각했지, 그 현실이 실제로 어떨지 잘 알지 못했다.
올해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서 발표된 논문은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논문 저자의 성별을 예측해 학계의 젠더 격차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1950년대 논문의 여성 저자 수는 12%였지만, 2010년대에는 35%에 이르러 더 많은 여성이 학계에 진입했다. 남녀 학자의 연평균 논문 출간 편수도 1.3편으로 비슷했다.
하지만 1950년대보다 2010년대 학계 내 남녀 간 격차가 더 많이 벌어졌다. 연구진은 여성이 남성보다 학계에서 일찍 이탈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해마다 여성 학자가 학계를 떠날 가능성은 남성에 비해 19.5%나 더 높았다. 여성은 전기간에 걸쳐 남성보다 빨리 학계를 떠나지만, 특히 더 많이 떠나는 기간은 학계 진입 후 5~10년 사이였다. 박사후연구원, 혹은 비정년 교수직을 수행할 때다. 이 시기는 교수직을 구하고 정년을 보장받기 위해 어느 때보다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여성에게 이 시기는 생물학적으로는 가족을 꾸릴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2005년 시작된 아테나 스완(Athena SWAN·Scientific Women’s Academic Network) 헌장은 스템(STEM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 and Medicine) 계열에 속한 여성이 지속적으로 경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선언이다. 선언만 하는 게 아니다. 연구소나 대학 학과 단위로 지원한 후에는 금상, 은상, 동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그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선정 기준은 기관 내 여성 비율, 특히 직급별 여성 비율, 그리고 임신·출산·육아·입양 등에 따른 지원 정책 여부다. 정책에 대한 소속 직원들의 만족도가 정성 평가에 포함된다.
영국 연구비 수여 기관은 과학 연구 기관의 젠더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아테나 스완을 비롯한 젠더 평등 요소를 연구비 지급 기준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2011년 영국 국립보건연구기관(NIHR·National Institute of Health Research)에서는 아테나스완을 은상 이상 수상한 기관에만 연구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영국 내 여러 연구비 지급 기관을 통합 관리하며 영국 내에서 최대 규모로 연구 기금을 관리하는 영국연구혁신기구(UKRI·UK Research and Innovation)에는 아테나스완 수상 등 젠더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기관이 연구비 수여에 유리하다고 언급되어 있다. 개별 기관의 선한 의지에 기대기보다는, 변화가 확실히 이뤄지도록 고삐를 잡는 것이다.
하지만 아테나스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 한다. 아테나스완을 수상했다고 하루아침에 기관 분위기가 달라지진 않는다. 소속 기관 내 여성의 비율이, 특히 고위직 여성 비율이 증가한다고 해서 전체 여성 비율이 달라지거나 처우가 개선되지도 않는다. 기관의 문화를 바꾸는 건 지원하는 과정 자체다. 지금껏 해왔던 회의 시간이 모두에게 적합했는지, 성별 고정관념으로 동료들 간에 일을 분배하지는 않았는지 등 사소하지만 누군가를 끌어당기는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걷어간다. 이렇게 공동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가 기관 문화를 바꾸는 데 조금씩 기여한다.
하지만, 여성이 양육과 가사의 의무를 온전히 지고 가는 한, 아테나스완(, 여성 과학자를 우대하는 어떤 제도도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긴 어렵다. 얼마 전 UKRI의 대표(CEO)로 식물학자 오토린 라이저 경(Dame Ottoline Leyser)이 취임했다. 그는 두 아이의 엄마로 과학계의 젠더 평등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2011년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과학자가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남자들은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해 왔잖아요? […] 아이를 낳는 건 사실 잠깐이에요. 진짜 문제는 그 후 20년간 일과 육아를 함께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건 젠더 문제가 아니라 양육의 문제죠.”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육아는 남녀가 함께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공백은 공동으로 분담하며 사회는 그 공백을 인정하고 뒷받침해 주는 문화적 변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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