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북반구의 새해는 차갑기만 하다. 이 추운 겨울을 함께 나고 있는 벚나무와 은행나무를 본 적 있는가? 봄에 피는 벚꽃은 본 적 있지만, 벚꽃이 지고 그 자리에 나는 버찌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가을날 노란 은행잎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만 5월에 자라나는 손톱만 한 은행잎을 귀여워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물며, 벚꽃도 은행잎도 없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 놓고 있는 한겨울 벚나무와 은행나무가 눈에 띌까 싶지만, 그렇다 해서 벚나무와 은행나무가 우리 곁에 없는 것은 아니다.

‘식물맹(plant blindness)’은 식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전체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식물을 인간이나 동물에 비해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뜻하는 말이다. 1999년 식물학자이자 교육자 엘리자베스 슈슬러와 제임스 완더시가 제안했다. 식물맹은 다양한 증상을 보인다. 우선,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식물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식물맹이라면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식물 고유의 특성을 과소평가하며, 식물을 동물이나 인간을 위한 부차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모든 생물의 에너지원을 제공하지만, 가끔은 그 막중한 역할보다 ‘공기정화’ 기능이 더 사랑받고는 한다. 2018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에 포함된 탄소량 중 80%를 식물계가 차지하는데, 인간을 포함한 동물계 전체의 탄소량은 0.4%에 불과하다. 지구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 숨쉴 수 있는 이유는 식물 때문이지만, 우리는 일상 생활 속 식물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변명을 해 보자면, 사람들이 식물에 무관심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식물은 초식동물에는 먹히지 않으면서도 번식은 할 수 있게, 꽃은 화려하지만 다른 대부분 부위는 초록색이다. 게다가 서로 붙어 자라 개개의 식물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강가에 떠 있는 백조 한 마리는 눈에 띄지만 함께 모여 자라는 나무들은 구분하기가 힘들다.

영국 노리치에 있는 웬섬 강(River Wensum)

대부분 식물이 생명에 위협적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식물들이 배제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에 대해선 슈슬러와 완더시의 글 '식물맹 이론에 대하여(Toward a Theory of Plant Blindness)'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사람과의 공통점이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식물에 관련된 경험이 적은 게 식물맹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과 식물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지고 있다. 쌀이 나무에서 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는가 하면, 아침에 토스트를 먹고도 식물을 먹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영국 초등학생들 이야기도 있다. 슈슬러와 완더시는 식물맹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식물에 관한 정규교육을 늘리고, 다양한 식물 종을 널리 알릴 것을 제안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속씨식물은 총 36만 9,000여 종이다. 조류 1만 1,000여 종, 포유류 6,500여 종에 비할 수 없이 많다. 국제자연보호연합(IUCN)은 멸종위기 생물 명단인 ‘레드리스트(red list)’를 배포한다. 레드리스트에 오르는 생물 종은 자생 가능성으로 선정되며, 개체수가 많아도 스스로 번식할 수 없으면 레드리스트에 오른다.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종이 분석된 조류는 14%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속씨식물은 10%만이 분석됐고, 그중 1만4938종이 멸종위기다. 아직 분석조차 안 된 속씨식물 종은 얼마나 많이 사라지고 있을지 알 길이 없다. 겉씨식물은 전체 1,000여 종 중 400여 종이 멸종위기 종이다. 대표적인 겉씨식물 은행나무도, 인간의 도움 없이 자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레드리스트 멸종위기 종으로 올라 있다.

남반구의 새해는 덥다 못해 모든 게 타들어 갈 지경이다. 몇 달째 계속되고 있는 호주의 산불은 역대 최악의 가뭄과 폭염, 그리고 강풍이 한데 어우러져 일어나고 있는 참사다. 호주는 특성상 자연 산불이 일어나고 산불에 여러 생물들이 적응해 살아가지만, 기후위기는 이 산불을 더 크게, 더 오래 번지게 했다. 야생 동물 5억 마리가 죽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전해지는 가운데,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은 도대체 얼마나 많이 재가 됐을 지 아득하기만 하다. 안 그래도 줄어들고 있는 식물을 우리는 점점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식물을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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