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박사후연구원이 돼 영국으로 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설렜던 건 첫 ‘근로계약서’였다. 매일 출퇴근을 하지만, 한국의 대학원생도, 영국의 대학원생도 노동자가 아니다. 난생 처음 본 근로계약서는 수십 장쯤 됐는데, 계약 기간, 연봉, 근로 시간과 함께 연가(annual leave)와 병가(sick leave), 부양자를 위한 긴급 휴가 (emergency leave) 등이 안내돼 있다.
영국의 풀타임 노동자에게는 최소 28일의 연가가 주어진다. 영국의 공휴일 8일에 EU 회원국이 노동자들에게 보장하는 20일이 추가됐다. 병가는 조금 더 복잡하다. 첫 주까지는 진단서 없이 병가를 쓸 수 있다. 근로계약서에 따라 다르지만, 병가를 내면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병가수당(statutory sick pay; SSP)을 지급해야 한다. 이는 피고용인이 질환으로 출근하지 않은 지 4일째부터 지급된다. 병가수당은 매주 원화 15만원(£94.25)이 최저한도로 지정돼 있으며, 최대 28주까지 지급된다. 병가수당 지급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주급이 원화 18만원(£118) 이상 되어야 하며 일을 시작하고 8주차가 지나야 병가수당 대상이 될 수 있다.
부양자를 위한 ‘긴급 휴가’는 피부양자(배우자, 자녀, 부모 등을 모두 포함)를 위해 쓸 수 있는 휴가다. 긴급한 경우에 쓰는 것인 만큼, 미리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쓸 수 있다. ‘긴급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잘 정의되어 있으며 ‘교육 시설이 갑자기 문을 닫는 경우’도 긴급 사항에 해당된다. 교육 시설이 문을 닫은 뒤 아이를 봐줄 사람을 찾을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 중이다. 영국은 이제부터 시작인 듯하다. 나날이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증가하고 있고 얼마 전 첫 사망자도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3월 3일 코로나바이러스 대응 방침(Coronavirus Action Plan)을 발표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가장 많은 기간에는 전체 노동자의 1/5이 결근할 것이라는 예측도 내놨다. 이에 대비해 병가수당 지급 시기에 관한 개정안이 3월 4일 발표됐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거나 걸린 사람과 접촉을 하여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노동자를 위해 4일째부터 지급되는 병가수당을 첫날부터 바로 지급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꾼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아픈 몸으로 일에 나서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교육 시설 외에는 돌봄 대안이 없는 경우를 위해 휴교 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나는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거나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격리를 해야 하는 상황, 혹은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갑자기 문을 닫는 상황이 닥쳐도 해결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쉬어야 할 때 쉴 수 있는 사람은, 불행히도 많지 않다. 자가격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물품을 배달하는 택배 노동자, 음식을 배달하는 배달 노동자 대부분 온라인 플랫폼 노동자로 특수고용노동자다. 이들은 자영업자에 해당되어 연가, 병가 등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고용주가 원하는 만큼만 일하는 ‘0시간 계약 (Zero-hour contract)’을 한 노동자들은 최저 주급 이상을 벌지 못해 병가수당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는 병가수당, 아니 쉬는 것마저도 먼 나라 이야기일지 모른다.
영국 코로나바이러스 대응 방침에는, 기저 질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약국에서 구할 수 있는 해열제 등을 이용한 자가 치료를 권한다고 돼 있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는 충분한 휴식만이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다. 나아가 더이상의 질병 확산을 막을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아플 때 쉴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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