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줄 알았다. 덕산 같은 시골에 짱박혀 사는 일상 말이다. 학기말로 바쁜 학교 일하랴, 틈틈이 술 마시러 다니랴, 주말이면 늦잠 자고 집안일 하랴. 정신없이 굴러가는 내 하루, 일주일, 한 달이 무척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도시 공기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 달 만에 덕산을 떠나 충주 시내에 갔다. 특별한 걸 한 것도 아니었다. 떡볶이 체인점에서 국물떡볶이를 사 먹고, 후식으로 티라미수와 커피를 먹은 뒤, 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간간이 오가는 공원을 걸었을 뿐이다. 문득 도시에서 누렸던 자유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국물떡볶이를 사 먹을 자유, 식후 디저트를 누릴 자유, 가로등 켜진 공원에서 걸을 자유,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을 스쳐 지나갈 자유 말이다. 집 앞만 나가도 아는 얼굴, 혹은 알 수도 있는 얼굴, 아니면 앞으로 알게 될 얼굴을 마주하는 내 일상을 감안하며 소박한 자유의 목록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나 서울 갈래”를 외치던 이효리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도시 공기 마시고 싶다”고 호소하길 몇날 며칠,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1년 중 며칠 정도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디 소속 누구, 어디 사는 누구가 아니라 ‘온전한 나’인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게다가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하늘은 푸르고, 밤공기는 적당히 선선한 지금, 내 지역살이의 롱런을 위해서라도 떠나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여행지로 강원도 속초를 골랐다. 제천이 강원도와 붙어있는 탓에 가까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바다가 보고 싶었던 데다, 가보고 싶은 서점도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냥 바닷바람 맞으며 회에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생각만큼 가깝지 않은 속초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여행은 평범했다. 장마철이 걸쳐 흐리고 습한 날씨 덕에 신나기는커녕 차분해지기까지 했다. 여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분으로 속초 동네 책방 ‘완벽한 날들’에 도착했다. 어김없이 동네 책방 큐레이션 탐방 취미가 발동해 책등을 눈으로 훑어보는데, 책방 소장용, 그것도 사인본만 모아 놓은 책장에서 이번 여행과 완벽히 잘 어울리는 책 두 권을 발견했다. 손님이 ‘속초에 관한 책은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건넬 책이 필요해 쓰기 시작했다는 21세기 북스의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 <속초>, 속초의 배 목수 이야기를 기록한 사진 인터뷰집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다. 속초에서 속초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점에서, 또 두 권의 책이 관광지와는 완전히 다른 속초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진짜’ 속초 여행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머릿속에 속초 지도를 펼쳤다. 안개 낀 높은 설악산, 바다의 관문인 영랑호와 청초호, 파도가 센 동해바다까지. 펼친 지도 속으로 들어가면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동아서점 김영건 대표를 비롯한 저자들의 옛 기억이 재생됐다. 부모님 따라 아침마다 어쩔 수 없이 졸린 눈 비비며 영랑호를 따라 뛰어야 했던, 혹은 배 목수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던 어린아이. 나중에 자신의 부모님만큼 자라 속초에 돌아왔을 때 ‘지겨운 고향’이 아닌 ‘이야기를 품은 도시 속초’에 관한 안내서를 쓰는, 혹은 배 목수를 인터뷰하며 잊혀가는 배 목수라는 직업과 관광도시가 아닌 어업으로 먹고사는 속초를 기록하는, 속초를 지역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이들이 만든 속초에 관한 책. 나는 책을 읽으며 그린 지도를 따라 속초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칠성조선소에서는 배 목수 양태인·전용원이 보였고, 6.25전쟁 때 피난 갔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나마 북쪽과 가까운 속초에 자리 잡은 이들이 수두룩한 실향민의 도시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청초호에서는 명태와 오징어를 잡으러 남쪽에서 올라온 배가 호수 가득 들어찬 모습을 상상했다. 속초에 관한 책을 읽었을 뿐인데, 속초가 내게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속초 칠성조선소 안 서점에서 찍은 사진. 사진=김예림

그러고 보니 여행이 별로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심지어 내가 들렀던 도시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역사를 가진 지역에서 어떤 기분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도를 그리듯 여행한 게 아니라, 점을 찍듯 여행해서, 그래서 너무 쉽게 잊었던 것이다.

무작정 비수도권에 살아야만 지역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실천하는 삶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생태, 민주주의, 인구소멸을 말하면서 정작 지역의 삶은 택하지 않는, 농촌에서의 삶에 당연히 마당 딸린 전원주택을 상상하는 서울 사람이 모순적으로만 보였다. 그러다 얼마 전 지역에 10여 년 살아온 청년을 인터뷰하면서 다시 속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좁고 답답한 지역살이나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 발전에 관한 문제의식을 말하리라 생각한 내 예상과 달리 그들 입에서 나온 고민은 의외로 치열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다. 속초의 배 목수 이야기처럼 말이다. 직장 내 골치 아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내년에는 어떤 새로운 작물을 심을지, 안 그래도 문화 인프라가 없는 마을에 뭐가 생기면 재밌을지를 고민하며 산다고 말했다. 오래된 지역 불평등 발전에 분노하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우리나라 지도에 이름을 몇 개나 표시할 수 있을까? 안다고 할 수 있는 지역은 몇 개나 될까?

지도를 그리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덕산을 살아보려 한다. 그러다 지치면, 누구도 나를 모르길 바라는 순간이 오면, 어느 계절이라도 다시 떠나면 된다. 누군가 지역을 묻는다면, 여행지에서 모아온 지도를 꼬깃꼬깃 펼쳐 보여주리라. 내가 아는 지역은 이런 거라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치열한 일상이 쌓인 아름다운 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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