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에 있는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함양에 머물고 있는 예멘 친구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이주민 문제 연구자 친구에게서 들었단다. ‘‘빈둥’과 빈둥 식구들이 떠올라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시시때때로 촌구석에 있는 우리들을 떠올려 주는 도시 친구들. 철마다 좋은 책들을 싸서 보내거나, 물려줄 아기용품이나 옷가지들을 싸들고 오는 건 기본이고, 가끔 우리가 했으면 하는 일을 제안하고 안내해주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이런 연결자 역할까지…. 

잊고 있었다. 2년 전 제주로 입국한 예멘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전화를 끊고 나서야 생각해본다. 예멘이 어떤 나라였지? 내전, 난민, 무슬림, 커피…. 그리고는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2.
이주민 연구를 한다는 지인의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분과의 통화로 알게 되었다. 2년 전 제주로 입국한 500여 명 예멘인들 중 심사를 거쳐 난민 지위를 획득한 사람은 단 2명뿐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민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G1 비자(인도적 체류 허가 비자)’를 받아 매년 갱신하며 지내고 있으며 함양에 있는 예멘인들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 비자는 난민에 해당하지 않지만 고문 등 비인도적인 처우나 처벌,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 등을 현저히 침해당할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사람으로서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체류 허가를 받은 외국인을 말한다. 몇몇 취업 제한 분야를 제외한 단순 노무 분야에서 취업이 가능하다.

그중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너덧 명 정도 되고 가장 한국어 공부에 열의가 있는 M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엊그제 M과 통화를 했는데 라마단 기간이라 그런지 기운이 좀 없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라마단은 이슬람력(태음력)의 제9월. 이슬람교에서 ‘코란’이 계시(啓示)된 달이라 하여, 이 1개월 동안 교도들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모든 음식과 흡연, 성교 따위를 금한다.

오랜만에 M도 만날 겸해서 언제 한번 함양에 놀러오겠다는 이야기로 전화를 끊었다. 

#3.
며칠 뒤 M에게서 먼저 카톡이 왔다. 

Hello!

한국 바다를 배경으로 한껏 폼 잡고 찍은 한 젊은이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잠시 생각해본다.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가족과 나라를 떠나온 이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M이 궁금해하는 건 한 가지였다.

함양에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이 있나요?

<함양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문의를 해보았으나 현재 함양군에는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한글교실 외에 다른 외국인을 위한 한글교실은 없단다. 한때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청강의 기회를 열어준 적도 있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이제는 그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어쩌지? 함양군에 당신과 같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실은 없는 것 같아...

#4.
영어와 한국어를 교환하는 마을모임을 조직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 친구들의 영어 실력이 천차만별인데다 마을에 이들 존재가 갑자기 오픈되는 것이 괜찮을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내가 가르쳐줄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막상, 외국인에게, 영어로, 기초부터 한글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막막할 땐 우선 ‘구글링’을 해봐야 한다. ‘외국인+한글+배우기’ 등을 검색어로 컨텐츠들을 찾아보니, 역시, 외국인을 위한 온라인 한국어 학습 컨텐츠가 잘 구축되어 있었다. 그중 ‘세종학당’ 온라인 코스가 괜찮아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안내하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5.
“저.는. 예.멘. 사.람.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첫 시간에는 온라인 한국어 초급 1강, ‘은/는’과 ‘-이에요/-예요’ 표현, 나라 이름 등을 함께 공부했다. 함께 온 P는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해 따로 한글 자모음표를 복사해주고 발음을 익혀오라고 했다. 혹시 특별히 알고 싶은 표현이 있는지 물으니, P가 “사장님,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고 싶어요”라는 표현을 알고 싶단다. 종이에 문장을 적어주고 발음을 천천히 알려주었다. 공책에 발음을 적던 P가 고개를 들고 묻는다.

“다른 친구 한 명 더 데리고 와도 돼요, 마담 리?”(그럼, 그럼~)

‘이렇게 해나가면 되겠다’는 M의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니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공부가 끝난 뒤 치지도 못하는 우쿨렐레를 뚱땅거리며 “사장니임~ 반장니임~ 시간외 왜 안 줘요오~” 하고 장난스레 노래까지 부르는 걸 보니, M도 이제 이 공간이 좀 편안해졌나 싶다. 

이 친구들 나이에 나는 프랑스 배낭여행 중이었다. 그때 워크캠프에서 함께 지내다 이스라엘의 ‘공습’ 때문에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팔레스타인 친구들은 아직 잘 지내고 있을까. 아비뇽 성곽에 걸터앉아 팔레스타인 친구가 부르던 아랍 노래가 아직 귀에 쟁쟁하다. 

M과 P, 다음 주엔 나를 위해 ‘세계 최고’ 예멘 커피를 가져오겠단다. 

‘건강한’ 예멘 커피를 마시며 공부하는 한국어 교실이라... 

아무래도 ‘마담 리’는 당분간 이 한국어 교실 때문에 까페 출근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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