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판을 새로 짜고 국제 무역에 큰 밑그림을 다시 그리는 일이 최근 벌어졌다. 지난 11월 4일,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 the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무역협정이 타결됐다. 동남아 국가연합인 아세안 소속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해서 총 15개 국가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지난 4일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이 타결됐다. 동남아 국가연합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하는 15개국가가 맺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다./사진=산업통상자원부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이라는 명칭도 RCEP라는 영문 약어도 잘 와 닿지 않으니 친근하게 ‘알쎕’이라고 하자. 한마디로 알쎕은 한마디로 15개 국가가 함께 맺은 FTA(자유무역협정)다. 일반적으로 FTA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2개 국가 간에 체결된다. 한편 특정 지역에 있는 여러 국가가 동시에 서로 FTA를 맺으려면 꽤 골치 아픈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대의 이익이 자신의 손실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니 참여하는 모든 국가가 협상 테이블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긴다. 당사자가 딱 둘이라면 수 싸움이 상대적으로 덜 치열한데 협상자가 다수이다 보니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면 고차방정식이 동원되어야 한다. 알쎕은 그런 과정을 거치며 맺어진 ‘메가 FTA’다. 이번 합의에 이르기까지 7년간 28차례의 공식 협상이 있었으니 무척 산고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알쎕이 어떤 의미가 있는 무역협정인지 이해하기 위해 다음 여섯 가지 포인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알쎕의 규모다. 알쎕 협상 타결 뉴스와 더불어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협상 막판에 인도가 불참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다시 살펴볼 텐데 인도가 알쎕으로 복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 세계 GDP와 교역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자유무역 경제 블록이 만들어진다. 그간 국제 무역의 양대 축이 미국 중심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경제 블록과 유럽 연합(EU) 경제 블록이었다면 그 가운데 양자를 능가하는 거대한 경제 블록이 등장하는 것이다.

둘째, 알쎕이 맺어진 배경이다. 세계 경제는 국가 간에 자유무역을 통해 서로 윈윈하는 구조로 발전해왔다. 자유무역이지만 중구난방으로 할 수는 없으니 룰을 만들고 그것을 잘 지키는지 감독할 세계무역기구(WTO)가 생겼다. 그런데 자유무역이라는 대세에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이 어깃장을 놓았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관세를 올리며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고 이에 질세라 중국도 관세 인상의 맞불을 놓았다. 세계 경제의 양강이 보호무역 구도로 가게 되자 여기에 휩쓸려 피해를 보게 된 국가들은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2013년에 협상을 시작한 이래 지지부진하던 알쎕이 급물살을 타고 합의점을 찾았다.

셋째, 알쎕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에 차질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세계 정책에서 인도와 동남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취급을 받았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봉쇄 정책을 쓰는 미국에 대항해 중국은 해당 지역에 각별히 공을 들였고 아차 싶었던 미국은 뒤늦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 회귀전략을 표방하고 중국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한다. 우선 태평양 지역에 새로운 판을 짜는데 태평양 연안의 12개 국가를 묶어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했다. 문제는 후임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미국이 주도했던 TPP에서 탈퇴해버렸다는 점이다. 미국이 빠지는 바람에 TPP가 해체될 위기에 놓이자 기존에 참여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 아세안을 중심으로 알쎕이라는 대체 자유무역협정을 만들게 된 것이다.

넷째, 알쎕을 주도하는 것은 어느 나라인가. 중국은 알쎕 소속 대부분 국가의 최대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알쎕 지역에 자신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지대와 유리한 룰을 만들어야할 동기와 의지가 충분하다. 피상적으로는 중국이 알쎕의 처음과 끝처럼 보인다. 그런데 중국만큼이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아세안이다. 국제 자유무역협정은 명분과 달리 경제 강국이 게임의 룰을 정하고 약소국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이 만들어지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약소국들이 비비고 들어가 하나로 뭉쳐서 독자적인 발언권을 행사할 공간이 생겼다. 미-중 양강 대립 구도에서 아세안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 이런 상황을 레버리지로 삼아 아세안은 다자간 무역협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다섯째, 왜 인도는 막판에 알쎕 불참을 선언했는가. 완전한 불참이라기보다 인도의 정치, 경제 상황 때문에 잠정 보류한 상황이다. 알쎕은 중국이 참여를 주저하던 일본을 끌어들이면서 시계가 빨리 돌아갔다. 중국의 입김이 지나치게 세질 것을 우려한 일본은 인도가 한 축을 담당해줘야 균형이 유지될 것으로 보고 인도의 참여를 독려해왔다. 회원국 모두 인도의 참여에 낙관하던 상황이었는데 막판 탈퇴라는 급반전이 일어났다. 알쎕에 대한 인도의 가장 큰 우려는 중국산 저가품 및 호주와 뉴질랜드산 농산물, 낙농업 제품의 대량 유입으로 자국 산업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다. 특히 최대 라이벌인 중국에 대한 피해의식이 크다. 작년 인도의 국제 무역에서 최대 적자국이 중국이다. 인도의 강점은 소프트웨어, 통신, 저렴한 IT 전문인력 등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별로 필요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수입할 것은 많으나 중국으로 수출할 것은 별로 없는 상황이라면 대중국 무역적자가 가파르게 증가할 것은 분명하다. 중국에 산업기반이 잠식당하다 못해 아예 종속되는 상황을 예방하고 당분간은 경제 체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인도의 계산인 셈이다.

여섯째, 알쎕은 우리에게 어떤 이점이 있는가. 별 볼 일 없는 동남아 국가 중심의 무역협정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무슨 실익이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우리의 국제무역에서 아세안이 차지하는 비중을 몰라서 하는 우문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대부분 개도국이지만 2015년부터 경제공동체를 이뤄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전체 교역에서 아세안은 중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성장동력을 서서히 잃고 있는 우리 경제에 알쎕은 터보 엔진의 역할을 하게 된다. 미-중 무역전쟁이 지속하면 한국의 GDP는 22%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알쎕 체제에서는 오히려 16%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월드 이코노미 저널도 알쎕의 최대 수혜자는 베트남과 한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남쪽에 활로가 뚫린 것이니 이제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남쪽을 향해야 마땅하다.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최대 수혜자는 한국과 베트남이 된다는 전망. 왼쪽은 미-중 무역전쟁이 계속 되는 상황, 오른쪽은 인도가 빠진 상황에서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으로 인한 각 회원국별 GDP상승폭./사진=월드 이코노미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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