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은 오클라호마주의 유서 깊은 도시 털사에서 열리는 유세에 자신감이 있었다. 유세는 코로나19로 몇 달간 지연됐던 대선 레이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신호탄이었고 티켓이 100만 장이나 예매되었다는 선거 캠프의 보고에 더욱 고무됐다. 노예해방 기념일인 준틴스 데이(Juneteenth Day)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백인 폭동이 발생한 도시를 유세장으로 선택한 것이 주는 정치적 부담을 주변에서 경고했지만, 지난 대선에서 압승을 안겨준 털사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트럼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리 조 로프의 트럼프 유세 노 쇼 제안은 틱톡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즉시 행동에 옮겨졌다. 미국 언론은 정치 운동으로서의 K-pop 팬덤에 주목하고 있다.

유세장은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BOK 센터였는데 인원이 차고도 넘칠 것 같아 야외무대까지 설치되었다. 그런데 유세 당일 모인 사람은 수용 인원 3분의 1에 불과했다. 평소 열성적인 지지자들로 가득한 트럼프 유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것은 ‘틱톡 할머니’ 메리 조 로프의 유세 보이콧 제안에 호응한 K팝(K-pop) 팬들이 집단 행동한 결과였다. 메리 조 로프는 준틴스 데이에 유세가 열리는 것에 대한 항의로 티켓을 예매만 하고 행사 당일에는 노 쇼(no show)할 것을 제안하는 짧은 영상을 틱톡에 올렸다. 수많은 K팝 팬들이 평소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던 광클 실력을 십분 발휘해 유세 티켓을 예매하고는 나타나지 않아서 유세장을 썰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디지털 행동주의로 진화하는 K팝  팬덤

미국의 10대·20대를 지칭하는 Z세대가 중심이 된 K팝 팬들의 디지털 행동주의는 올해 들어 구체적인 힘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대선 유세 보이콧은 일회성 단체 행동이 아니었다. 지난 5월 28일에 걸그룹 블랙핑크가 피처링한 레이디 가가의 싱글 ‘사워 캔디(Sour Candy)’가 발매되었는데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벌어진 지 사흘밖에 안 되어 전 미국이 들끓던 시점이었다. K팝 팬들은 앨범 홍보를 위한 해시태그 '#SourCandy' 대신 '#BlackLivesMatter'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대적으로 공유하며 온라인 여론을 움직였다. 댈러스시 경찰국이 불법 시위자 채증을 위해 앱을 만들고 시민들의 제보를 독려하자 이번에는 아이돌 짤로 만든 팬캠으로 뒤덮어버렸다. 온라인에서 해쉬태그 달기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탄소년단과 소속사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단체에 100만 달러를 지원하자 방탄소년단의 ‘아미(ARMY)’들은 불과 하루 만에 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K팝 팬덤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아이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온라인의 익명성에 기대어 자신을 감추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K팝 팬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kpopstans' 해시태그를 달고 디지털 행동주의에 동참하고 있다. 

K팝에 친숙하지 않은 세대는 이런 역동적인 움직임이 갖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한류는 언어와 지역의 장벽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얻더니 이제 장르의 한계마저 극복하고 구체적 사회적 행동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한류는 갈수록 커져가는 한국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를 상징한다.

동의와 협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힘, 소프트 파워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의 조셉 나이(Joseph Nye) 교수가 소프트 파워를 처음 개념화한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한 국가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하드 파워(Hard Power)다. 하드 파워를 가진 국가는 다른 국가를 힘으로 억누르고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 반면 소프트 파워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동의와 협조를 얻어내는 부드러운 힘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힘으로 찍어눌러 굴복하게 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 반대급부를 제공해서 그만한 대가를 얻어낼 수도 있다. 그중에서 제일 가성비가 좋은 방법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해서 상대가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를 매혹시키는 힘이야말로 소프트 파워다.

한 국가의 매력은 그 나라가 보유한 사회, 문화적인 가치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이상화하고 높은 호감을 가졌던 것은 그 사회가 가진 합리적 문화와 지향하는 가치 때문이었다. 똑같은 역할을 지금 한류가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부 국가, 특정 매니아층에 국한해서 소비되던 한국 드라마, 영화, 아이돌 그룹 노래가 점차 더 많은 나라의 더 다양한 계층으로 퍼지고 있다. 한류는 단순히 한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서 ‘한국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식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보편성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서 한류를 더욱더 넓게 확산시키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한국 소프트 파워의 핵심인 한류

세계 주요 강대국들은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투자를 해왔다. G2인 미국과 중국은 여기에도 선두주자였다. 특히 중국은 소프트 파워도 미국에 절대 열세에 놓여있다며 여러 나라에 대규모 경제, 문화적 지원을 해왔다. 하지만 인풋에 비해 아웃풋은 별로 좋지 않았다. 세계는 오히려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고, 영화 ‘기생충’이 제기한 사회 불평등에 관심을 갖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을 보고 한국의 전통 복식과 궁궐 문화에 호기심을 표하고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통해 남북 관계를 이해한다. 이렇게 한류는 우리가 그 힘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 소프트 파워의 중추가 됐다.

소프트 파워 이론에 대한 구체적인 측정기준이 마련되면서 국가 간의 순위도 매기기 시작했다. 2010년에 잡지 '모노클( Monocle)'이 소프트 파워 인덱스를 만들었고, 2015년부터는 미디어 회사 포트랜드(Portland)와 서던캘리포니아대(USC)가 공동으로 주요 30개 국가의 소프트 파워 랭킹인 ‘The Soft Power 30’을 만들었다. 소프트 파워 랭킹은 ‘정치 기구의 퀄리티, 문화적 호감도, 외교 네트워크, 고등 교육기관의 명성, 경제 모델의 호감도, 디지털 참여도’ 등을 토대로 한다. 

주요 30개 국가의 소프트 파워 랭킹인 The Soft Power 30. 한국은 계속해서 상승세로 보이고 있고 내년도 순위는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는 지난 5년간 20위권 초반을 유지하다가 2019년에는 19위에 올랐다. 10위권은 대부분 북미와 유럽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현재진행형인 코로나19 대처가 내년도 순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약진이 예상된다. 참고로 순위를 매긴 30개 국가 중 아시아 국가는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뿐이다. 20위권 안에 든 나라는 한국과 일본인데 한국은 상승세인 반면 일본은 하락세다. 

소프트 파워에서 스마트 파워로

물론 냉정한 국제관계에서 소프트 파워만 가졌다고 해서 한 국가의 입지가 다져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스마트 파워(Smart Power) 개념이 등장했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스마트 파워를 “한 국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정당성을 수립하기 위해 타국과의 동맹, 파트너십, 모든 종류의 기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소프트 파워를 통해 다른 국가의 호감을 샀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구체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스마트 파워다. 코로나19와 관련해서 우리나라가 의료물품이 필요한 다른 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스마트 파워를 만들어 가는 구체적 행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드 파워는 부족하지만 소프트 파워와 스마트 파워는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오래전에 내다본 정치인이 있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다. 1998년 한국 디자이너대회에서 한 연설에서 “다가오는 21세기는 문화와 경제가 하나가 되는 문화경제의 시대가 될 것이며, 두뇌강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 했고 재임기간 내내 문화산업을 지원해서 한류의 기반을 닦았다. 지금 우리나라가 소프트 파워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스마트 파워를 키워나가고 있는데에는 그런 혜안을 가졌던 정책결정권자의 덕이 크다. 

최근 백범 김구 선생이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언급한 문화강국론이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돈은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정도면 되고, 국력은 외국의 침략을 막을 정도면 족하지만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했던 백범의 소망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차근차근 실현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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