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맞으며 영어권에서는 10년마다 할 수 있는 Happy New Decade라는 새해 인사를 한다. 연도의 끝자리가 0으로 바뀌면서 앞으로 펼쳐질 10년(decade)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더욱 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한다면 다가올 미래에 차지할 몫은 클 것이 분명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는 항상 전조를 동반한다. 미세한 시그널을 빨리 감지할수록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새로운 10년은 국제 관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미디어들은 각종 수치와 데이터로 변화를 예측한다. 분야별로 국가의 순위를 매기고 앞으로의 등락 또한 전망한다. 한편 데이터가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한 국가의 역동성이다. 지금 어떤 국가가 역동적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 향후 국제 관계에서 주요 플레이어가 될 나라를 예측할 수 있다.  

CIFP 콘퍼런스 참석자들이 향후 5년 이내에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손을 들어 찬성을 표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연례 CIFP(Conference on Indonesian Foreign Policy)가 열렸다. ‘세계 최대 외교 정책 콘퍼런스’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였지만 인도네시아의 시각으로 국제 정세를 조망하는 국내용 행사였다. 콘퍼런스는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쉼 없이 진행되었다.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인 홀이 꽉 찼는데 참석자 대부분은 20~30대 청년들이었다. 오전에는 메인 홀에서 전체 컨퍼런스를 하고 오후에는 총 12개의 세션을 관심사에 따라 골라서 참석하게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콘퍼런스 전체가 인도네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패널리스트 대부분과 극소수의 외국인 참가자를 제외하면 다 인도네시아 사람인데도 모든 강연과 질의, 응답이 영어로만 이뤄졌다.

딱딱한 주제를 다루는 콘퍼런스의 경우 대개 진행방식과 형식이 천편일률적인데 그런 선입견을 깰 정도로 자유분방함이 넘쳤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처럼 인도네시아의 현 외교부 장관도 여성이다. 축사를 겸한 스피치에서 2019년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인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RCEP)의 타결과 부산에서 11월에 있었던 한-아세안 특별정상회담의 결과를 영상과 함께 설명했다. 인도네시아가 거둔 외교적 성과를 나열할 때마다 청중들이 환호성을 질러서 아이돌그룹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외교부장관의 순서가 끝나자 히잡을 쓴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여성 인권 문제를 재치있게 풍자하고 정부의 대외 정책에 대한 여성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해서 큰 공감을 끌어냈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는 히잡을 쓴 여성이 공적 행사에서 그런 주제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콘퍼런스의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 어떤 동기로 참석자들이 내내 자리를 지키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학교에서 콘퍼런스 참석을 학점과 연계 시켜 반강제적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살짝 들어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몇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학점은 전혀 무관하고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참석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몇몇에게는 전공이 국제 정치나 외교냐고 물어보니 대학에서는 IT를 공부했고 지금은 금융계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라고 한다.

끝마칠 때까지 참석자가 거의 줄지 않았던 행사장을 떠나면서 만약 우리나라에서 한반도와 4강 외교 전략과 같은 건조한 주제로 콘퍼런스를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반드시 들어야 하는 교양필수 과목이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참석할 우리 대학생은 몇 명이나 될까,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일을 하지만 순전히 현 정부의 외교 정책이 궁금해서 황금 같은 토요일을 반납할 젊은 직장인들은 얼마나 될 것이며, 우리나라의 외교성과에 대해 스포츠 경기장에서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할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으로 다원주의,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쳐왔다. 미국과 소련이 극한대립을 했던 냉전기를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고 버텨낸 생존전략이었다. 소련이 패망한 후 냉전이 해체되고 미국의 라이벌로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미국과 중국 양강 체제로 재편되자 세계는 신냉전기에 접어들었다. 마크 갈레오티 교수가 정의한 ‘뜨거운 평화’(Hot Peace)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는 양 진영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앞서 언급한 콘퍼런스는 인도네시아의 청년 세대에게 변화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고 향후 어떤 방향으로 키를 잡아야 할지 깨우쳐주려는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맹주를 자처하지만, 국제 외교 무대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약한 인도네시아가 지역에 안주하지 않고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적극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본받을만하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 자신과 주변에만 국한되기 쉬운데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있어야 지평이 넓어진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려면 먼저 인식의 지평부터 넓혀야 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무엇보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일단 웹 브라우저의 시작 화면을 네이버나 다음이 아니라 구글 뉴스로 설정해놓자. 평소 막연하게라도 관심을 가졌던 국가가 있다면 기본으로 세팅해둔다. 그러면 해당 국가의 주요 뉴스가 분야별로 매번 업데이트된다. 헤드라인을 매일 훑어보면서 어떤 이슈가 있는지 들여다보자. 구체적인 관심거리가 생기는 경우 해당 섹션을 추가해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언어의 장벽은 큰 문젯거리가 아니다. 웹 브라우저에서 해당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Vox 유튜브 채널.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안에 대해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콘텐츠를 제공한다.

같은 맥락에서 외신도 미국 일변도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대신 싱가포르의 스트레이츠 타임스나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를 자주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신남방정책의 무대가 되는 국가들의 소식을 더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관련 기사의 양이 비교되지 않는다. 텍스트보다 영상을 선호한다면 정보의 보고인 유튜브를 이용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이슈가 되는 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Vox의 국제 뉴스나 아랍권 CNN격인 알자지라 방송의 다큐멘터리와 같이 서구 미디어와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미디어를 접할 필요가 있다. 

새해에는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눈을 돌렸으면 한다. 눈길이 가는 곳에는 결국 발길이 닿는다. 일보일경(一步一景)이라는 말처럼 낯선 세상에서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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