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하되 착취하지마라.'   일러스트레이션=노춘석 디자이너. 생성형 AI로 '플레오넥시아'를 이미지화했다.  
'탐욕하되 착취하지마라.'   일러스트레이션=노춘석 디자이너. 생성형 AI로 '플레오넥시아'를 이미지화했다.  

이로운넷 = 윤병훈

'햇살론 유스'는 수입이 불안정하고 신용이 낮은 청년이 절박한 상황에서 고금리대출이나 불법사금융에까지 내몰리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정부재원인 복권기금을 활용하여 2020년부터 시행된 낮은 금리의 정책금융 사업이다. 약 40.3만 건이 공급되었으며, 총 대출액은 약 1조 3,197억 원(2024년 9월 말 기준)에 달한다.

지난해 '100억대의 자산을 보유고위공직자의 자녀가  '햇살론'을 대출받았으며 해당 자녀는 해외 주식을 보유'라는 뉴스(2024.09.03 프레시안 외)가 지금의 탄핵정국과 맞물려 다시 소환되었다. 같은 시기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된 바에 의하면 고위공직자 '그'의 배우자와 두 자녀는 재산신고 당시 애플, 엔비디아, 테슬라 등 총 28억원 상당의 해외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딸이 혼자 살면서 스스로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모자란 돈에 대해 대출 받은 것"이며 "청년들이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는 데 일정 부분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사과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에 '나'는 이런 사실과 상황을 우리 사회의 현실과 견주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자문에 마땅한 답을 갖지 못한 채 잊고 있었는데,  최근 윤대통령의 탄핵과 관련된 2030청년의 시각과 행동이 이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기억이 소환되었다. 

복권기금은 복권을 구입한 이로부터 징수한 돈(간접세)으로 조성한 기금이다. 100억대 자산가가 복권을 구입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복권기금에는 100억대 자산가가 기여한 돈이 한 푼도 없다. 가난한 자들의 헛된 희망으로부터 착취한 돈으로 운용되는 '햇살론 유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청년을 위한 자립지원용 대출이다. 자산가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혹는 주식 투자로 자기 자본을 불리려는 청년이 신청해서는 안되는 돈이다. 

(고위)공직자의 역할은 공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남의 몫을 가로챈 자녀의 행위에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태도는 공적 책임과 윤리적 기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공익을 실천할 의무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자녀가 잘못되면 화살은 부모에게 돌아간다'는 상식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다.

100억대 자산, 고위공직자, 그 자녀, 해외주식투자, 복권기금, 햇살론...등의 키워드를 감싸고 있는 윤리적, 도덕적 문제는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상류층(혹은 특권층)은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철통같이 방어할 뿐 아니라 지수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를 통해 매우 빠른 속도로 계층간의 차이가 벌어진다. 돈과, 돈을 벌고 지키는 정보를 물려 받는 자는 사다리의 높은 곳에 머물고, 배우지 못하고 빚을 물려 받은 자는 낮은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롯한 고금의 철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정확한 개념 정의 없이는 참된 논의가 불가능하다'며 사물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는 것을 중요시한 것은 철학의 본질이 실천적 삶을 안내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하면 '무엇이 부정의(不正義)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이해 시키려면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편이 쉽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가지려는 태도나 욕망'을 '플레오넥시아'라는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플레오넥시아(pleonexia)'는 부당하게 남의 것을 빼앗거나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절제되지 않은 과도한 소유욕과 권력욕이다. 플레오넥시아는 탐욕(Greed)보다 더 적극적이고 비도덕적인 개념이며, 고대 철학에서는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탐욕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지만 반드시 남을 착취하진 않는 욕망으로 다른 사람의 몫까지 빼앗으려는 경향의 '플레오넥시아'와 구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레오넥시아'를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특성으로 보았다. '정의란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인데 , 플레오넥시아는 자신의 정당한 몫보다 더 가지려는 태도로, 불공정함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플레오넥시아에 빠지면, 정의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 모든 부조리(부정의)한 현상의 이면에는 우리 내면에 깃든  '플레오넥시아'가 있다. 탄핵 반대 집회의 광장에 나선 2030젊은이들이 터져나오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불길한 디스토피아 -복수심과 폭력으로 얼룩진 -'타나토스(자기파괴적 충동)'로 빠져드는 길목에는 윤리와 도덕 대신  '플레오넥시아'가 자리하고 있다. '그'와 '나', '우리' 내면의  '플레오넥시아'가 젊은이들의 극우화를 매개하고 촉발하는 핵심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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