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로운넷 = 윤병훈 발행인
"플라스틱으로 돌아가자"...'내 편'만의 정체성 정치
어떤 사건, 상황 등에 대해 우리가 가진 확신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어느 사회집단에 속하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확신은 사회적 소속감이라는 기능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보여주기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개인의 확신이 단순한 지식의 표현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사회적 집단과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총 쏘듯' 쏟아낸 행정명령들이 '사회적 소속감'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가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정치적 올바름(PC)과 관련된 기존 정책들을 대대적으로 폐기하는 행정명령(다양성·형평성·포용성 프로그램 종료)에 서명하고, "플라스틱으로 돌아가자"며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권장하는 행정명령도 예고했다. 페미니즘이나 기후변화론에 반대하는 그의 지지자들의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다.
사회적 소속감 외에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높은 스트레스나 불안을 느끼면, 예측 가능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 비현실적인 확신을 가지려 한다. 망상적 믿음은 불안이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로 작용한다. 망상은 감각적 지각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아이디어, 생각이다. 특히 고집스럽게 고수하려는 생각, 즉 확신이다.
광장에서..."요즘 왜 그렇게 제정신 아닌 사람이 많은 거야?"
"우리 시대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멍청한 사람들이 확신에 차 있다는 점이다."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 2차 세계대전을 겪고서 남긴 말이다. 지식이 부족하거나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주장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갖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요즘 왜 그렇게 제정신 아닌 사람이 많은 거야?" 2025년 초, 내란 사태가 일으킨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두 패로 갈린 시민들이 광장에서 서로를 향해 주고받는 말이다. 다른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제정신이 아니'라고 서로를 비난한다. 음모론에 빠진 꼭두각시들이 혼란과 재앙을 초래한다며 서로를 '미친놈들'로 치부한다.
자신을 꼭두각시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명백히 착각)한다. 스스로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환상은 상황을 잘못 평가하는 실수로 이어진다. 이런 실수는 늘 특정 방향으로 향한다. 한쪽으로 편향되는 것이다. 망상적 확신이 뿌리내리고, 그 지점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망상적 확신의 특성은 모순되는 증거나 이성적 반대 논지가 있어도 교정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망상적 확신의 교정 불가능성은 '이성적 확신(진실에 부합하는 인식의 확고부동함)'과 심리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확신은 근본적으로 예측의 한 가지 형태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확신은 개연성에 의존한다. 반면, 극도로 개연성이 없는 음모론은 모든 사건에서 원인 혹은 의도를 찾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용한다. 단순한 설명을 좋아하고, 그냥 서로 우연히 가까이 있었을 뿐인 사건을 서로 연결시킨다. 로또복권에 내가 당첨될 개연성은 전무하지만 매주 누군가가 당첨되기에 줄 서 구매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러셀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 정보화 시대의 망상적 확신은 지능과 관계없는 것 같다. 되려 똑똑한 사람들이 확증편향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럴듯한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지능이 있기 때문이다. 망상적 확신에 매몰되어 비상계엄을 발동한 윤석열 대통령이 멍청하지 않다는 증거는 체포자의 명단에 국민의힘 한동훈 전대표가 포함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비상계엄 직전 한동훈 대표의 90도 폴더 인사가 '배신의 예비동작'임을 간파할 만큼 똑똑했다. 그래서 그를 사살하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망상적 확신이 어디(무엇)에 좋은가?
'세상의 갖가지 사건들 뒤에 특정 집단의 음모가 있다는 설을 퍼뜨리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음모론이 과거보다 더 만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사람들은 그것이 명백히 잘못된 것인데도 망상적 확신을 굳게 고집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일반적으로 '선택적 압력이 존재하느냐'라는 논증이 수반된다. 망상적 확신이 어디(무엇)에 좋은가? 라는 물음이다.
진화론적 '선택적 압력'은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인이다. '사람들이 믿는 바와 상관없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므로 세상에 대한 진실된 설명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해 강한 선택적 압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는 논증에는 '세상에 대한 진실 된 설명'이 생존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진실 된 설명)이 반드시 '사실'만이 아니라 망상, 착각, 허위 정보 같은 '거짓'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선택적 압력'일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자연선택은 세상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과 배치되는 '창조론'과 같은 종교적 신념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 생존과 번영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신이 엿세 동안에 세상을 만들었다는 '6일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인식적으로 불합리하다는 걸 보지 못하는 현상은 스스로의 확신을 더 흔들림 없이 고수함으로써 적응적으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종교나 미신에 대한 믿음은 그 내용이 정말 실재하는지, 개연성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실용적인' 의미에서 위안을 주고, 녹록치 않은 삶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살아가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신봉과 달리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거짓’ 믿음인 ‘망상적 확신’은 어디에 좋은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점쟁이나 도사, 혹은 정치협잡꾼의 말에 솔깃하여 망상적 확신을 고집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다.
망상적 확신은 개인의 심리적 상태와 주변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우리가 믿는 것, 혹은 믿고 싶은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 점쟁이나 도사들의 수법이다. 정치협잡꾼도 자신의 지지층이 믿고 싶은 서사를 제공하여 정치적 지지를 유지하려고 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원한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가 비합리적인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기에, 비합리적 확신이 인기가 훨씬 더 많다.
'내란 사태' 중심에 음모론 신봉자들
윤석열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 사태’에는 점쟁이, 도사, 자신의 이익만 쫏는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사이비 목사,극우유투버 등의 정치적 협잡꾼들이 짜놓은 음모론의 덫에 걸려 망상적 확신을 가진 음모론 신봉자들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확신에 의거해 속하고 싶은 집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속하고 싶은 집단에 의거해 확신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단 음모론을 믿게 되면 필터 버블(컴퓨터에 기반한 확증편향), 에코 챔버(끼리끼리 소통), 역화효과(逆火效果, 확신에 위배되는 사실이 제시될 때 확신이 도리어 강화되는), 개념적 보수주의(확신에 반하는 정보가 속속 드러나는데도 기존 확신을 고수하는), 감정적 추론(직관을 신뢰하는)등의 올가미에 스스로 묶여 빠져나오지 못한다.
망상적 확신은 주변 환경에 내부적 요인, 즉 개인의 심리적 상태가 상호작용하여 콘크리트처럼 굳어진다. 우리는 확증편향을 통해 "믿고 싶은 것"을 강화한다. 그래서 각 개인의 확신은 그 자체로 독립된 산물이 아니라 늘 배경에 의해 좌우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가 주장한 "가짜 뉴스"에 대한 확신은 그가 지지받던 계층이 신뢰하는 뉴스 채널(폭스TV)을 통해 강화되었다. 트럼프가 주장한 "가짜 뉴스"는 단순한 사실 왜곡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나 보도에 대해 반발하며 언론을 비판하고,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된 정치적 전략이었지만, 그의 주장을 따르는 지지자의 확신이 개인이 소비하는 정보와 주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윤대통령의 '불법선거 중국 개입론'이나 트럼프의 '중국의 미국 선거 개입론'은 단순한 개인의 망상이 아니라, 정치적 전략, 사회적 분위기, 미디어 환경 등 다양한 배경 요인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된 사례이다.
친위 쿠테타...'트·윤 파시즘'
"이 불법선거가 사실 중국과 크게 관련이 있다.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대한 제보를 많이 받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부정선거 의혹을 밝히는 것은 대통령의 책무...". 2025년 2월 2일에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2차 변론에서 윤 대통령 측이 부정선거 의혹과 '중국 간첩'의 개입을 주장하며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강조한 변론의 한 대목이다.
윤대통령의 '중국 간첩에 의한 부정선거'에 앞서, 외부의 위협을 통한 정치적 정당화를 꾀한 트럼프의 "중국의 미국 선거 개입" 음모론은 극단적 정치 양극화를 이뤄내면서 트럼프에게 재선이라는 영광을 보답으로 안겨주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패배 뒤 복잡한 선거 패배의 원인을 "중국의 개입"이라는 간단한 내러티브로 제시하였다. "미국을 망치는 건 중국과 민주당"이라며 외부의 적을 설정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하려고 음모론을 확산시켰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도둑질"이라는 음모론을 믿고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이 2021년 1월 6일 미 국회의사당 폭동사건이다. 트럼프의 '중국 선거개입' 음모론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정치적 현실을 바꾸려는 선동과 조작의 도구로 작용한 것이다. 음모론 확신자들이 미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사건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의 친위 쿠데타 시도였음이 명백함에도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사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4년 뒤 트럼프는 미국 정치를 극단적 양극화로 내모는데 성공하며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앞 문장의 단어들을 트럼프→윤석열, 중국 개입→ 중국 간첩, 미국을 망치는 건 중국과 민주당→대한민국을 망치는 건 중국과 민주당, 선거 도둑질→부정선거, 1월 6일 미 국회의사당 폭동→1.19 서부지법 폭동, 친위 쿠테타→내란, 공화당→국민의힘으로 바꿔 넣으면 모든 상황에 완벽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을 음모론의 중심에 두는 이유도 추측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대응에 대한 비판을 받자, 그 책임을 중국에 돌림으로써 국내 비판을 피하고자 했다. 트럼프는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지칭하며, 바이러스의 기원이 중국 우한의 연구소라는 주장을 펼쳤다. 미국 내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경계심, 두려움과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이러한 감정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지지층을 결집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려움'이라는 쉽게 자극될 수 있는 기본적인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트럼프가 음모론의 중심에 중국을 끼워넣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의식에 호소하면서 "우리는 속았고 약탈 당해왔다"며 외부의 적을 강조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자신의 정책 실패나 문제에 대한 비판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보수는 반중, 진보는 반일 팔이?, 상처에 소금 뿌리는 자들
이번 계엄 사태는 반중 정서가 한국 극우보수 세력을 결집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보수진영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빨갱이, 종북주의'를 들이대며 위기를 덮어 왔지만, 더 이상 약효가 먹히지 않게 되자, 그 대안으로 중국을 등장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나마 쓸 수 있는 카드가 반중국 정서에 기대는 것 외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계엄에 대해 설명할 명분이 없으니까 부정선거와 탄핵에 중국이 개입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한국사회 기저에 반일 정서 만큼 뚜렷한 반중 정서가 있다는 분석은 수년 전부터 나왔다. 2022년 미국 외교전문매체 '디플로맷'이 한국인 1,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인 81%이 중국을 매우 부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답하였으며, 이는 조사 대상 27개국 중에 반중 감정이 가장 심한 것이라고 한다. 2위 스위스가 72%, 3위 일본이 69%였다. 정치협잡꾼들이 대중 표몰이 낚시의 미끼를 종북에서 혐중으로 갈아 끼운 이유이다.
윤대통령이 계엄의 사유로 주장한 '중국 간첩에 의한 부정선거'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뜬금없이 중국 이야기를 꺼낸 것은 2024년 12월 12일 계엄 사태에 대한 대국민담화에서였다. 윤 대통령은 계엄 배경을 설명하면서 중국인들의 군사시설 촬영을 언급하고, "(야당이 나라를 지배하면) 중국산 태양광 시설들이 전국의 삼림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대통령과 이익을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이 공적 발언을 통해 연쇄적으로 중국을 언급하면서 혐중 정서를 강화하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 일부가 부정선거, 탄핵 촉구 집회에 대한 중국 개입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혐중 정서가 무분별하게 사회 전체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은 "가는 곳마다 중국인들이 탄핵소추에 찬성한다고 나선 바로 이것이 탄핵의 본질"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같은 당 유상범 의원은 페이스북에 "탄핵 찬성 집회에 중국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고 올렸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과 가짜뉴스이다.
나 홀로 잘 사는 세상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경을 맞댄 나라 사이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그중에서도 한중일 삼국은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변수가 더해져서 '배타적 민족주의'나 지나친 '국가주의'로 치닫을 강한 휘발성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는 '위험 지구'이다. 반일이 그렇듯, 반중이 어떤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순간 전쟁에 준하는 갈등으로 발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는 때로 한 개인의 정의이거나, 한 지역, 한 국가의 정의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못지않게 혐한론을 자국 정치에 이용할 중국과 일본의 정치인과 협잡꾼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반중, 혹은 반일이라는 국수주의 섶에 불길이 붙으면 가장 먼저 재로 사라질 민족이 누구일까?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한 정치협잡꾼과 '난세에 한 몫'보려는 유투버들이 드리운 덫에 낚여 실체도, 증거도 없는 음모론을 신봉하고 이웃 국가를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