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사회문제들을 남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도전은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혁신가들이다. 아름다운가게, (사)아쇼카 한국, 카카오는 전폭적이지만 매우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사회혁신가들을 발굴하고 경제적 지원과 연대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사회혁신가들이 바꾸는 세상을 함께 따라가봤다

“나는 물건을 샀을 뿐 노동까지 산 건 아니다”

송경호 더피커 대표는 물건을 구입한 뒤 포장재를 뜯어내고 씻고 분리배출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노동까지 해야 하지? 소비자들에게 포장을 선택할 권리를 주자”

그의 문제의식은 2016년 국내 최초로 포장 없이 내용물만 살 수 있는 이른바 제로웨이스트숍 개장으로 이어졌다.

성동구 서울숲 2길 29에 위치한 '더피커' 매장은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문을 연다. (일/월요일 휴무)
성동구 서울숲 2길 29에 위치한 '더피커' 매장은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문을 연다. (일/월요일 휴무)

"첫 사례라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제가 생각한 기준에 부합되는 생산자를 찾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300여 군데를 둘러봤지만 10군데도 추리기 힘들었거든요. 그나마도 발주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잘못돼 소포장 상태로 오거나 관련 법령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물건을 전부 철수해야 하는 혼란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계속 보완작업을 거치다 보니 더피커의 기준은 업계의 기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종업계에서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 대기업의 ESG 담당자들에게 더피커의 좌충우돌 경험담은 꿀팁으로 작용했다.

 

요람에서 다시 요람으로

그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미 배출된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 다른 관점에서 쓰레기 문제를 바라봤다. 생산단계부터 쓰레기의 발생을 원천봉쇄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다.

송경호 더피커 대표가 매장 한쪽에 마련된 못난이 농산물 코너에서 마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코너는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작거나, 약간 흠이 있어 상품성은 떨어지지만 친환경 농법으로 자란 과일과 채소를 포장 없이 만나볼 수 있다.
송경호 더피커 대표가 매장 한쪽에 마련된 못난이 농산물 코너에서 마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코너는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작거나, 약간 흠이 있어 상품성은 떨어지지만 친환경 농법으로 자란 과일과 채소를 포장 없이 만나볼 수 있다.

"제로웨이스트 분야에선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요람에서 요람까지’라는 표현을 씁니다. ‘제로웨이스트 매장’은 단지 ‘포장 없이 물건을 살 수 있는 곳’ 이 아닙니다. 운영자들은 생산단계에서부터 물 사용량, 전기 사용량, 탄소 배출량 등을 확인하고 유통단계에서는 벌크(대용량)로 가져올 수 있는지 그리고 포장재의 재사용 여부 등을 점검합니다. 결국 폐기된 자원이 다시 원료로 쓰이거나 혹은 쉽게 자연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중요한 지표로 봅니다. 자원의 순환성을 강조한 거죠."

송 대표에게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맞춘 물건이 있느냐고 묻자 “100%는 아니지만 그에 근접한 사례로 스테인리스 소재의 보관 용기가 있다”라고 소개했다.

더피커 매장을 둘러보고 있는 고객들. 12시에 문이 열리자 점심시간을 이용한 직장인들과 동네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더피커 매장을 둘러보고 있는 고객들. 12시에 문이 열리자 점심시간을 이용한 직장인들과 동네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스테인리스는 철이니까 다시 녹여 쓰면 되는데 무슨 폐기물이 발생할까 싶습니다. 하지만 공정 단계마다 스크래치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비닐을 씁니다. 어떤 공장은 절반가량이 비닐로 뒤덮일 정도였어요. 저희 생산자는 비닐 사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료를 벌크 형태로 가져옵니다. 유통과정에서는 포장이 없으면 제품에 스크래치가 나거나 찌그러질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별수 없이 박스에 넣어 개별 포장으로 입고됩니다. 그러나 차후에 박스를 전량 회수해 재사용하고 있고 고장 나기 쉬운 밀폐용 실리콘이나 손잡이 등은 다시 고쳐 쓸 수 있도록 평생 A/S가 보장됩니다. 못쓰게 된 실리콘 역시 용기를 만드는 회사로 보내 재활용률을 높이고 있어요. 폐기 단계에서도 양질의 고급 스테인리스를 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다시 원료로 돌아가기에 용이합니다."

그는 “창업 초기와 달리 요즘에는 어느 정도 생산자풀(pool)이 형성돼 서로서로 소개해 주고 있다”면서 “작년부터 ESG 열풍이 불면서 생산자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의식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현재 더피커는 40여 명의 생산자와 소통하면서 100여 개의 상품을 취급하고 있다. 이들은 대규모가 아닌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곳이다.

소비자들은 빈 용기를 가져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상품을 덜어서 살 수 있다. 깜빡하고 용기를 가져오지 않은 고객들에겐 기증받은 유리병과 쇼핑백을 제공하기도 한다. 
소비자들은 빈 용기를 가져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상품을 덜어서 살 수 있다. 깜빡하고 용기를 가져오지 않은 고객들에겐 기증받은 유리병과 쇼핑백을 제공하기도 한다. 

소비에 마침표를 찍자

그는 “화폐와 재화를 교환하는 행위만을 소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용하는 기간도 소비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친환경 물건을 사는 것도 좋지만 오랫동안 끝까지 사용하고 폐기하는 것, 말하자면 구매에서 폐기까지 서사가 있는 소비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제로 웨이스트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록 자신이 포장된 물건을 샀거나 플라스틱 제품을 갖고 있더라도 친환경 제품으로 바꾸기보다는 기존에 갖고 있는 제품을 오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송 대표는 "리페어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와 수리 전문 풀랫폼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더피커가 진행한 리페어 클래스. 일회용 랩과 지퍼백등을 대체할 수 있는 밀랍랩을 만들어보고 유지, 보수할 수 있는 방법등을 배울 수 있다. /  사진 제공= 더피커
더피커가 진행한 리페어 클래스. 일회용 랩과 지퍼백등을 대체할 수 있는 밀랍랩을 만들어보고 유지, 보수할 수 있는 방법등을 배울 수 있다. /  사진 제공= 더피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수리할 수 있는 권리’가 화두입니다. 현재는 제조사가 제공하는 A/S센터가 아닌 곳에서 수리를 받으면 더 이상 A/S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 많아요. 이것은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겁니다. 더피커는 리페어(수리) 교육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우수한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과 소비자가 쉽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큰 온도차... 답은 실행력

더피커의 남다른 판매전략 가운데 하나는 1+1 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송 대표는 “재고를 빨리 털어내기 위한 할인 판매는 지양한다”면서 “이는 소비자들에게 과소비를 강요하지 않으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제로웨이스트 문화가 대안 제품에만 집중된 점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스테인리스 빨대를 샀다’, ‘친환경 수세미를 샀다’ 와 같은 행위에 너무 만족하면 안 됩니다. 친환경 설거지 세제를 사놓고 배달음식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는데 진짜 환경친화적인 삶은 배달음식을 줄여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죠. 또 면화가 합성섬유보다 친환경적인 소재는 맞지만 대량생산과정에서 물이 오염되고 탄소 발생량도 굉장히 많아요. 소재가 제아무리 건강하더라도 필요 없는데 물건을 샀다면 친환경이란 딱지를 붙여 놓은 또 하나의 쓰레기일 뿐입니다.”

더피커는 친환경소재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온,오프라인으로 판매한다. 온라인 판매 때는 고객으로부터 기증받은 택배박스를 최대한 활용해 재사용하고 있다.
더피커는 친환경소재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온,오프라인으로 판매한다. 온라인 판매 때는 고객으로부터 기증받은 택배박스를 최대한 활용해 재사용하고 있다.

그는 "현시점에서 제로웨이스트 매장이 늘어나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이것이 최종 목표가 되면 곤란하다" 라고 조언했다.

“매장 수나 물건들을 얼마나 늘릴까가 목표가 되면 위험할 수 있어요. 이보다는 회복의 지점으로 돌아가 과거처럼 보통의 채소가게, 정육점 등에서 소비자들이 포장 없이 살 수 있는 인프라가 정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매장 운영 이외에도 정책자문위원회나 지자체, 시민단체, 주민공동체들과 협업하고 교육을 진행하며 컨설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이유입니다.”

송경호 더피커 대표는 지난 5년간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제로웨이스트 소비문화에 혁신을 몰고 온 점을 인정받아 2021년 아름다운가게가 선정한 뷰티풀펠로우에 뽑혔다.

그는 “소비단계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옳은 줄 알았으니 실천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생산자가 제품 기획 단계부터 폐기 과정까지 전 과정을 고려해 탄소 발생량이나 쓰레기 발생량을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송대표는 “ESG 열풍이 불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수많은 대기업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관심도에 비해 기업 활동에 실제 적용하려는 노력에서는 온도차가 매우 컸다”라고 진단했다.

환경 문제를 다룬 다양한 책과 잡지들. 송 대표는 "환경운동에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면서 "관련 책자를 소개하고 콘텐츠를 제작해 환경친화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파하는데 힘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환경 문제를 다룬 다양한 책과 잡지들. 송 대표는 "환경운동에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다"면서 "관련 책자를 소개하고 콘텐츠를 제작해 환경친화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파하는데 힘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제로웨이스트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실로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폐기물이란 단어 속에는 단지 쓰레기 문제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 안전 문제 등 인권문제가 얽혀있고 젠더 문제, 동물보호 문제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어요. 누군가는 그런 연결 구조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 그 반대라 생각합니다. 연결성을 매개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파할 수 있다면 문제를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