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9일 서울 시내의 한 건설현장 노동자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다./사진=뉴시스
 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9일 서울 시내의 한 건설현장 노동자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다./사진=뉴시스

이로운넷 = 조은결 기자

첫 출근한 베트남 청년은 그날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무더운 폭염이 이어진 건설 현장서 그의 체온은 40.2도, 그의 생명을 앗아간 건 폭염이었다.

경북 구미의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 베트남 국적의 20대 일용직 노동자가 쓰러져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는 지난 7일 오후 4시 40분께, 구미시 산동읍 한 아파트 공사장 지하 1층에서 벌어졌다. 

23세의 A씨는 첫 출근날이었다. 거푸집 설치 작업을 하던 그는 퇴근 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난 뒤, 다시는 동료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A씨를 발견한 동료는 "앉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측정된 체온은 40.2도. 당시 구미 지역의 낮 최고기온은 37.2도였고 지역에는 열흘 넘게 폭염 경보가 발령 중이었다.

경찰은 "발견 당시 체온 등을 이유로 사인을 온열질환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부검을 통해 정확한 원인을 확인할 방침이다. 또 지인을 통해 기저질환 여부 등도 조사 중이다.

고용노동부 구미지청은 "사고 직후 해당 사업장의 작업을 전면 중지했다"며 "사업장에 온열 대책이 제대로 마련돼 있었는지 현장 점검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사진= 민주노총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사진= 민주노총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민주노총 건설노조 대구경북지부는 9일 대구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베트남 국적의 20대 이주노동자의 사망 당시 체온은 40.2도로, 명백한 온열질환 산재 사망"이라며 "이는 개인적 불운이 아닌 건설현장의 고질적인 안전 불감증, 미흡한 안전관리, 관리감독 부재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노조는 "내국인 노동자들에게는 휴식을 보장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평소와 같이 작업을 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건설업체들이 비용 절감과 공기 단축을 위해 안전을 등한시한 관행이 결국 참사를 불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부와 관계 당국은 혹서기 건설 현장의 온열질환 예방 대책 이행 여부를 특별 관리 감독하고 위반 사업장에 강력한 행정 처벌을 집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실제로 고용 중인 근로자나 외국인 근로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할 경우 고용사업주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시 근로자 5인 이상일 경우) 및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 잇따른 폭염에 연이은 쓰러짐...노동자 목숨 앗아가는 '폭염'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는 절기 '소서(小暑)'인 7일 오후 제주시 건입동 인근 도로 위로 지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본격적인 더위를 알리는 절기 '소서(小暑)'인 7일 오후 제주시 건입동 인근 도로 위로 지열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기상청에 따르면 9일 낮 최고기온은 26∼36도로 예보됐다. 

이번 주 최고 기온은 역대 가장 높다. 8일 오후 3시6분께 서울(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 기준) 기온이 37.7도까지 오르며 종전 최고기온인 1939년 7월 9일 36.8도를 86년 만에 넘어섰다. 7월 상순으로는 117년 만에 가장 더운 날이다. 인천(35.6도), 부산(34.5도), 대전(36.3도) 등도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지난 3일 오후 5시께, 경북 영주시 이산면 한 밭에서는 제초 작업을 하던 필리핀 출신의 30대 남성이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쓰러졌다. 의식 없이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온열질환으로 분류됐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도희 영주지청장은 "폭염 작업 시 2시간 이내, 20분 이상 휴식을 해야 하며 작업 장소 주변에 물과 그늘, 보냉장구를 둬야 한다"면서 "외국인 근로자, 고령자 등은 낯선 기후환경과 온열질환에 체질적으로 취약하므로 더욱더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주지역 서비스노동자들도 "사지로 내모는 무대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제주지역본부는 9일 성명을 통해 "기후 위기 시대에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는 대책 없이 일만 하라는 것은 사지로 내모는 일"이라며 폭염 예방 조치를 촉구했다.

이들은 "2시간마다 20분 휴식은 생존을 위한 기본 조치"라며 "이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명백한 방치이자 국가의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또한 "매해 여름마다 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가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며 "4만 보를 걸으며 야외에서 일하다 사망한 故 김동호 코스트코 노동자, 과로사한 故 정슬기 쿠팡 택배 노동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고용노동부를 향해 "즉시 세부 규칙을 공포하고, 휴식권 보장 등 폭염 예방조치를 현실에 맞게 강화하라"고 전했다.

◆ 정부 현장점검에도 실효성 의문..."폭염, 예방할 수 있는 죽음...그러나 현장은 여전히 방치"

권창준 고용노동부 차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산재 예방을 위한 범정부 협의체 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고용노동부
권창준 고용노동부 차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산재 예방을 위한 범정부 협의체 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고용노동부

정부는 9일 고용노동부 차관 주재로 '산업재해 구조 원인 분석 및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1차 범정부 협의체 회의'를 열었다. 

권창준 고용부 차관은 "산업재해 원인은 기술적 요인뿐 아니라 기업의 경영관리, 고용 구조, 일하는 방식 등 다양하고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지배구조와 이와 결부된 고용 구조로부터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제13차 현장점검의 날을 맞아 고용노동부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과 함께 건설·조선·물류 등 폭염 고위험 사업장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점검에 나섰다.

김종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은 "역대급 폭염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며 "2시간마다 20분 이상 휴식 제공과 밀폐공간 안전 확보는 최소한의 보호조치"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현장 점검에서 △기온 33도 이상 시 매 2시간 이내 20분 휴식 △물·그늘·보냉장구 확보 여부 △온열질환 예방 장비 지원 △질식 위험 밀폐공간 작업 교육 등 '폭염 안전 5대 기본 수칙' 이행 여부를 집중 확인하고 있다.

아울러 밀폐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식 재해 예방 점검도 병행 중이다. 기온 상승으로 맨홀, 오·폐수 처리시설, 축사 등 밀폐공간에서 유해가스가 증가하면서 질식 사고 위험이 커진 데 따른 조치다.

점검 항목은 △호흡 보호구 착용 등 3대 안전수칙 준수 △밀폐공간 안전작업절차 수립 여부 △작업자 대상 실효성 있는 교육 여부 등이다.

고용부는 7월 말까지 기존 200억 원 예산을 모두 활용해 온열질환 예방장비를 지원하고, 2차 추경으로 확보한 150억 원을 50인 미만 사업장에 추가 지원할 예정이다.

건설현장 체온측정기 및 무더위 쉼터 설치 사진. /사진=LH
건설현장 체온측정기 및 무더위 쉼터 설치 사진. /사진=LH

건설업계도 폭염 대응을 강화하고 있으나, 실효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삼성물산·현대건설·포스코이앤씨 등 주요 건설사들이 '3대 기본 수칙(물·그늘·휴식)'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사고가 반복되자 노조를 중심으로 '폭염법' 제정 요구가 재확산되고 있다.

폭염법은 △폭염기 건설현장 사업주의 체감온도(온습도) 관리 의무 △그늘막·휴게실 설치 강화 △샤워실·탈의실 등 세척시설 설치 의무화가 핵심 내용이다. 더불어 폭염을 명확히 산업재해로 규정하고 정밀한 보호체계를 법제화하자는 취지다.

건설노조는 지난해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건설 노동자들은 상시적으로 열사병에 노출돼 있다"며 폭염법 제정을 촉구한 바 있다.

당시 박세중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고용노동부 지침에 따라 2시간에 20분씩 휴식하도록 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자주 쉬는 것이 도움이 된다"며 "더운 날씨에 2시간 동안 계속 작업하는 게 체력적으로 더 힘들다. 게다가 건설현장엔 쇠파이프, 망치 같은 금속 도구들이 달궈져서 노동자들의 체감온도를 더 높인다"고 강조했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도 "건설현장의 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며 "현장에 가면 천막 하나 치고 의자 몇 개 놓은 걸 휴게실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허울뿐인 시설로는 폭염을 견디기 어렵다. 기후위기로 날씨가 점점 더 뜨거워질 텐데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윤종오 진보당 국회의원이 지난 8일 구로변전소 인근 구로광역시설관리반 관할 현장을 찾아 철도노조와 함께 폭염 현장 안전점검을 진행하고 한국철도공사 및 노동자와 간담회를 진행했다/사진=윤종오 의원실
윤종오 진보당 국회의원이 지난 8일 구로변전소 인근 구로광역시설관리반 관할 현장을 찾아 철도노조와 함께 폭염 현장 안전점검을 진행하고 한국철도공사 및 노동자와 간담회를 진행했다/사진=윤종오 의원실

윤종오 진보당 국회의원이 지난 8일 구로변전소 인근 구로광역시설관리반 관할 현장을 찾아 철도노조와 함께 폭염 현장 안전점검을 진행하고 한국철도공사 및 노동자와 간담회를 진행했을 당시, 한낮 기온은 36도를 넘어섰고 노동자들이 일하는 선로온도는 53도에 이르는 폭염이었다고 전했다. 

이날 구로광역시설관리반 소속 현장노동자는 "폭염 일수가 늘어나다보니 너무 더운 것이 애로사항"이라며 "작년부터 선로 관리를 위해 자동살수장치를 설치하고 있는데 아직 미설치 된 곳은 직접 물을 뿌리고 있다. 추가로 설치 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9일 서울 시내의 건설현장 노동자들이 야외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연일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9일 서울 시내의 건설현장 노동자들이 야외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정부가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살이 익을 것 같다", "숨을 못 쉬겠다"는 노동자들의 호소는 멈추지 않는다. 단 한 명의 노동자도 폭염으로 쓰러지지 않는 여름은 아직 멀기만 하다.

노동계는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 산업현장에서 잇따른 산재 사망 사고에 대해 정부의 소극적 대응과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 차단 행위가 참사를 불렀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지난 8일 성명문을 통해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며 "더위도 재해이며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여전히 방치돼 있다.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정부와 사업주의 안일한 태도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특히 지난 7일 구미에서 발생한 20대 이주노동자 사망 사건과 더불어 지난 6일 폭염 속 밀폐공간 작업하다 사망한 '인천 맨홀 사건'의 50대 노동자를 언급하며 "폭염 속에서도 기본적인 안전조치조차 지켜지지 않는 열악한 노동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규탄했다.

민주노총은 현재 고용노동부가 사업주에 대해 실질적인 강제력이 없는 '권고' 수준의 조치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만약 법적인 강제 조항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해당 노동자들은 2시간 20분마다 휴식을 취하고, 작업 시간대가 조정되며, 이동식 냉방기 설치와 같은 최소한의 안전 조치를 보장받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규제개혁위원회와 고용노동부의 무책임한 행정은 결국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특히 노동부가 마련한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 개정안이 규제개혁위원회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사실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규제 완화를 우선시한 결과, 노동자들은 폭염 속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며 "정부는 지금 당장 책임 있는 자세로 나서서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폭염은 재난이며 재난 속에서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며 △'2시간 작업 후 20분 휴식'을 포함한 폭염 대응 규칙 개정을 즉각 추진 △사업주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혹서기 작업중지 의무화, 이동식 냉방기 설치, 충분한 휴식시간 보장 등의 실질적 조치 법제화 △규제개혁위원회는 산업안전보건 규제 완화 권고를 즉시 철회와 같은 조치를 촉구했다.

기후 변화로 인해 폭염은 점점 더 길고 강해지고 있다. 이제 단순한 날씨를 넘어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으로 인식되고 있다. 노동계의 경고처럼, 반복되는 죽음은 참사가 아니라 방치의 결과이며 지금 필요한 것은 '권고'가 아닌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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