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기 싫어. 너무 고급 양로원이야!”

홍콩 칼룬통에 있는 양로원에 봉사하러 갔을 때다. 입구 문이 열리면서 단아하고 예쁜 정원이 보이자마자 같이 갔던 자원봉사자가 실망한 듯 내뱉은 말이다. 그때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여러 양로원을 다니며 봉사한 경험이 많았지만,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말 자원봉사로 처음 간 곳이라 그 반응이 의아했다. 음악심리테라피를 하면서 다양한 양로원을 다녀본 후에야 비로소 이해했다.

아파트를 살 때, 차 한 대 겨우 들어가는 주차 공간마저 억 단위 비용을 들여야 하는 홍콩 사정상, 조그마한 정원이라도 있는 양로원은 고급일 수밖에 없다. 여러 국적의 사람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인 홍콩은 양로원의 모습도 참 다양하다. 전문 매니지먼트가 운영해 여러 취미활동을 제공하고 홍콩 최고급 호텔에서 연말 파티를 하는 고급 양로원부터, 활동 시간이 배정되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조그마한 식판이 붙어있는 의자 공간이 전부인 열악한 양로원까지 각양각색이다.

영어가 공식 언어인 홍콩의 양로원은 다국적 노인들이 어울려 생활한다. 광둥어를 사용하는 양로원이 대부분이지만 중국에서 이주해온 노인이 늘어나 만다린이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양한 국적의 노인들이, 다양한 양로원의 시설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한 가지 일관된 모습을 발견한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다.

치매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소통이 되기도 하지만, 중증 치매 노인들 눈빛은 세상과의 소통을 체념한 듯 외부 자극에 별 반응을 안 보인다. 종종 환경 조건에 상관없이, 조건 반사적인 신체 반응인 듯 특정 행동을 반복한다. 내가 만난 70대 후반의 이탈리아 할아버지는 누구든지 다가가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면, 손을 잡고 손등에 부드럽게 입술을 대고 인사했다. 90세 후반의 홍콩 할머니는 항상 복주머니를 갖고 다니시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하셨고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100살 넘은 호주 할머니는 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고운 자태로 꼿꼿하게 앉아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했다. “자연은 바라보기만 해도 배움을 얻는다”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그 할머니의 자태는 인간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자연의 일부로서 큰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4년 전 제주도 양로원에 계시는 이모할머니를 찾아뵀다. 이모할머니께서는 제주 4.3사건때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시며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어릴 적 자주 뵀던 이모할머니는 고생 한번 한 적 없는 듯 늘 곱고 온화했다. 지금, 100세를 훌쩍 넘겨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말을 건넬 때마다 참 곱고 따뜻한 반응을 보인다.

치매를 앓는 사람의 여러 행동을 관찰하면서, 삶을 되돌아보곤 한다. 훗날 나의 의식이 나를 떠난 후에 나는 과연 어떤 행동과 감정을 보여줄까. 미래의 나의 모습은 현재의 습관적인 행동, 생각, 감정, 일상의 연장선이 아닐까…

나이 일흔에 발레를 시작한 '덕출'과 스물셋 꿈 앞에서 방황하는 발레리노 '채록'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 드라마 '나빌레라.' 극중 덕출은 치매를 앓고 있다./출처=티빙
나이 일흔에 발레를 시작한 '덕출'과 스물셋 꿈 앞에서 방황하는 발레리노 '채록'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 드라마 '나빌레라.' 극중 덕출은 치매를 앓고 있다./출처=티빙

요즘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나빌레라"가 홍콩에서도 회자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발레 예술에 입문하여 꿈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다양한 예술 분야가 있는데, 아름다운 삶 자체가 최고의 예술작품이 아닐까? 하루하루의 삶이 예술인 듯 가꾸며 살아간다면 의식이 떠나는 날이 올지라도, 그날의 모습은 꽃자리에 머무는 "나빌레라"일 것이다.

[치매 노인들을 위한 음악 테라피 Tip]
치매 노인들의 기억을 돕기 위해, 쉬운 리듬과 음악을 이용하여 노래로 대화를 해보자. 노래로 대화를 하는 요법은 치매 증상으로 인해 불안감이 높아진 노인들의 심신안정에도 큰 효과가 있다. 좋은 예로, 홍콩의 대형 치매 요양원의 노인들은 요양원 주소를 노래로 기억한다. 또한, 다수의 요양원 스텝 중에서 치매 노인들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름은, 늘 노래로 인사를 나누는 음악테라피스트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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