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Special Rapporteur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장애인 권리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출처=EmbracingDiversity

‘나이로비 원칙’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2018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장애여성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의 '성과 재생산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rights) 보장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에 이어, 케냐 나이로비에서 이 분야의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이끌어낸 가이드라인입니다. 이 원칙은 성과 재생산 권리의 하나인 임신중지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기존의 인권 기준을 더욱 진전시켰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그동안 장애인의 권리를 끌어들여 임신중지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일부 세력을 비판하고, 우생학 정책의 대상이 되어온 장애여성들이 온전히 참여하여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보에 근거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할 수 있도록 성과 재생산 건강 관련하여 ‘물품과 서비스가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접근가능’하며, ‘정보와 의사소통이 접근가능한 형태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접근성을 강조합니다.1)

임신중지, 산전검사, 장애와 관련된 나이로비 원칙./출처=https://nairobiprinciples.creaworld.org/

굳이 장애를 따질 것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개인이 가진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교육이나 직업은 물론 거주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장애를 비롯한 소수성에 대한 낙인을 없애고 접근권을 확장시키는 국가적 차원의 의료 정책이 필요할 것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애와 관련하여 겪었던 유년 시절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주변인들의 장애에 대한 태도가 이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는데요. 일상적인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일수록 자신의 성과 재생산에 관해 이야기하기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장애가 성적 관계, 결혼, 피임, 출산, 양육에 있어서 중요한 장벽이 될 수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권리보다는 보호나 금지 위주의 교육을 받게 되기 쉽죠. 자신의 성에 대한 탐색이나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할 기회가 적으면 성적 무지나 호기심 과잉으로 오해받거나 폭력적이고 취약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게 됩니다. 이는 비장애아동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지만, 장애 유형에 따라 의사소통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아동은 정보에 대한 접근성 자체가 아예 다른 경로를 가게 되어 또다른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족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활동보조인, 교사, 사회복지사, 장애관련활동가, 의료인 등 주변인들이 함께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고민하면서 자율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과 재생산 건강과 관련된 의료에는 생리, 피임, 임신, 임신중지,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 성매개감염, 성폭력 등 다양합니다. 의료인은 이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 이외에도 장애의 정도나 유형, 복용하는 약물, 가족 구성, 거주지, 직업, 일상생활에서 조력자의 필요 등에 따라 의료서비스의 방법과 선택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전반적인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장애, 나이, 성 정체성, 언어 등에 따라 이해가능한 전달 방식, 관련 자료 제공, 통역자의 필요성 등에 대해 고민하면서 최상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해야 합니다. 영국의 의사능력법(Mental Capacity Act 2005)을 참고하면, 이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한 표현, 사진, 물품 등을 활용하여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속도로 반응을 살피며 요점을 나누어 반복해서 정보를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 당사자가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결정 결과에 따라 자신뿐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까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합니다.2)

그러자면 평소보다 충분한 진료시간이 필요함은 물론, 양질의 자료를 생산하고 의사소통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당사자를 중심으로 한 협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는 장애인에 대한 의료서비스 문턱을 낮추는 것에서 나아가 현재 의료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로비 원칙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율성입니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아동의 경우 생리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몸에 대한 느낌이나 통증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표현 방식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은 가까이서 돌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주기적인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 돌봄제공자는 관련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의료인과 상담하고 행동 치료 및 진통제나 피임약, 호르몬 루프 등의 호르몬 치료도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통제와 달리 호르몬 치료는 통증 조절과 동시에 피임 효과도 가져오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당사자가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소통과정에서 의료인과 돌봄제공자의 협력은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죠.

그밖에 임신이나 임신중지, 피임,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 등과 같은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장애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데에는 더욱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지지와 협력이 세심하고 공고해질수록 장애에 대한 낙인을 제거하고 접근 장벽을 낮추게 되는 것과 더불어 우리 모두의 성과 재생산 건강 권리는 더욱 확장될 것이 분명합니다.


1) 나이로비 원칙 전문(번역문) (출처=장애여성공감 https://wde.or.kr/tag/%EC%9E%AC%EC%83%9D%EC%82%B0%EA%B6%8C/)

2) 최현정, <정보에 기반한 동의와 의사결정지원>,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2020년 1월 이슈페이퍼 (출처=http://srhr.kr/2020/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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