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효정 (기후정의동맹 ·인제 자치와 자급 모임 활동가, measophia@naver.com)

"밀양은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의 깃발이다"

-밀양 행정대집행 10주년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며

채효정 활동가
채효정 활동가

밀양으로 가는 이유

6월 8일 새벽, 강원도 인제 남면 북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길을 나섰다. 밀양 행정대집행 10주년 집회에 가기 위해서다. 어른 세 명과 어린이 두 명, 효정, 정은, 현욱, 그리고 가야와 솔. 한 차에 탄 우리는 인제에서 9년 째 공부모임을 이어오고 있는 ‘자치와 자급 모임’ 멤버들이다.

줄여서 ‘자자’라고 부르는 우리 모임은 책읽기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읽은 것을 머리에만 두지 말고 실천하자는 기치로 마을과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을 찾아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현실의 이야기란 걸 깨달았고,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매달 1만 원씩 연대 기금을 적립해서 여러 사회 운동의 투쟁 현장에 보내자고 마음을 모아 꾸준히 해왔다.

몇 해 전부터는 연대 기금만 보내지 말고 우리도 직접 참여도 해서 힘을 보태보자고 뜻을 모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삼삼오오 소박한 대오를 꾸려 같이 가고 있다. 오늘 가는 곳은 밀양. 밀양 행정대집행 10년을 맞아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가 전국 15곳에서 출발한다. 강원 영서 지역 버스는 춘천-홍천-횡성-원주를 들러 밀양으로 가는데, 우리는 홍천에서 버스를 탈 계획이다. 오늘 밀양 가는 인원은 다른 지역에서 출발해서 밀양에서 만나기로 한 멤버까지 모두 일곱 명. 김밥도 싸고 감자 고구마도 쪄 와서 소풍 가는 길처럼 설레기도 하지만, 나선 길은 멀다. 인제에서 밀양까지 여섯 시간, 마음먹기 쉽지 않은 거리를 이렇게 달려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진= 채효정
/사진= 채효정

송전탑, 쇠사슬, 밀양 할매

먼저 나의 이유를 말해보자. 밀양에 가기 일주일 전,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밀양 송전탑 투쟁의 의미를 나누고, 이번 집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직위원회에서 기획한 ‘탈탈 낭독회’에 발언자로 참여했다. ‘탈탈’은 ‘탈핵 탈석탄’에서 따온 약자다. 낭독회는 밀양 투쟁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 밀양-서울>의 주요 부분을 낭독하고, 발언자들의 듣는 시간으로 구성되었다. 사전에 나에게 온 질문은 크게 세 가지였다. 나에게 밀양은 무엇인가. ‘밀양 할매’로 상징되는 여성들의 투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후정의운동과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에서 밀양 투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면서 나는 밀양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는 중요한 순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밀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얼음골 사과나 영화 ‘밀양’ 같은 평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밀양 투쟁 이후의 밀양은 다음 세 가지 이미지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송전탑, 쇠사슬, 그리고 밀양 할매. 송전탑은 전기를, 쇠사슬은 국가폭력을, 밀양 할매는 그에 맞선 저항 주체를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이 밀양 투쟁 이후 송전탑이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하곤 한다. 전에도 있던 철탑이지만 예사롭지 않게 보았던 철탑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밀양 송전탑은 ‘전기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전기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 던졌다. 그건 문명과 체제에 대한 근본 물음이기도 했다. 

밀양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은 전기가 생산되어 소비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폭력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목격했던 날이었다. 그날은 2014년 6월 11일이었다. 새벽 6시, 밀양 송전탑 부지 농성장으로 2천 명이 넘는 경찰과 200여 명의 한국전력 직원과 밀양시청 공무원들이 산을 올라왔다. 주민들이 쇠사슬로 몸을 묶고 저항하였는데 경찰은 군사 작전 하듯 농성장을 때려 부수고,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제압 연행했다.

바로 아래 사람이 있는데도 천막을 날카로운 커터 칼로 죽죽 자르고 들어오는 모습, 그 아래서 비명을 지르던 주민과 연대자들, 할머니들의 목에 감긴 쇠사슬을 마치 개 목줄을 잡듯이 잡고서 절단기로 위험천만하게 잘라내는 모습, 서로 껴안고 있는 수녀님과 할머니들을 떼어 내어 짐짝처럼 들어내는 모습, 팔이 비틀리고, 손가락이 부러지고, 발목이 밟히며 비명과 절규, 탄식과 울음이 산을 뒤덮던 모습, 옷을 벗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할머니들이 아들딸 같은 경찰들에게 처참하게 제압당하는 모습이 TV와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가장 미칠 것 같았던 장면은 작전을 끝낸 경찰들이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환하게 웃으면서 현장에서 ‘기념 촬영’을 하던 장면이다. 

/사진=채효정
/사진=채효정

쇠사슬을 감고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

그러나 한 순간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현장에는 또 다른 존재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 엄청난 폭력을 목도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환멸과 회의에 빠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존재에 남아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보게 해준 사람들. 지금도 고유명사처럼 ‘밀양 할매’라 불리게 된, 싸우는 할머니들이 그들이다. 

‘지방-농촌-여성-노인’이라는 취약성을 압축하고 있는 존재인 밀양 할매는 가장 낮은 곳의 가장 연약한 이들이 어떻게 가장 강하고 치열한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사회 운동과 변화의 가능성에 냉소하고, 체제전환을 말하면 지금 전환의 주체가 누구인지, 투쟁의 주체가 어디 있는지 묻는 이들에게 ‘밀양 할매’는 ‘여기 있소’하고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저항하는 민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실체이며, 그들은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고 나타난다. 

밀양에서도 초기에 송전탑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섰던 이들은 이장, 면장, 동장, 노인회장, 영농후계장 등 지역에서 중요한 결정을 담당하는 권위 있는 남성들이었다. 재산권과 건강권이 직결된 문제인 만큼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지만 한전의 회유와 협박에 가장 먼저 포기하거나 돌아선 이들도 이들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여성으로서, 농민으로서, 노인으로서 차별받고 살아왔던 할머니들은 어떻게 그렇게 끈질긴 투쟁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강한 바람에 나무는 넘어져 부러져도 풀은 뽑히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린다. 힘없는 이들에겐 힘없는 이들의 힘이 있다. 남자들은 부러졌지만 여자들은 부러질 게 없었다. 대신 서로를 뿌리로 지탱하는 풀뿌리의 힘은 더 컸다. 

밀양 투쟁의 또 다른 상징인 ‘바느질 연대’는 밀양 할매들이 끈질긴 투쟁을 해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할매들은 싸움으로 무너진 마음을 함께 모여 바느질을 하며 기우고, 연대자들과 이어나갔다. 그때 당한 모진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다가도, 경찰들 눈을 피해 길이 없는 길을 만들며 산으로 올라가고 구덩이를 파고, 물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농성장을 지키던 때를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며 그때가 참 재미있었다고 하는 할머니들을 보며, 나는 그게 어떤 긍지와 자부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들고 서러운 날들이었지만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기에 사람답게 살았다 말할 수 있었던 날들. 그리고 ‘밀양의 친구들’이 되어준 수많은 연대자들이 있었다. 함께 바느질도 하고, 함께 산을 오르고, 함께 천막도 쳤던. 연대자들에겐 밀양 할매들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준 존재였고, 밀양 할매들에겐 연대자들이 그런 존재였다. 

인도의 칩코 운동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거대 자본의 생태학살과 공동체 파괴에 맞선 환경운동 곳곳에서 나타났던 나무 껴안기 운동에서도 나무를 껴안은 이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특히 대부분의 구성원이 여자들인 우리 자자 모임에서도 이번 밀양 송전탑 투쟁과의 연대는 다른 어떤 연대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고, 서로를 돌보며 저항을 이어나갔던 밀양 할매들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영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끝나지 않은 싸움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그 아수라장에서 땅바닥에 나뒹구는 끊어진 쇠사슬을 소중히 주워 담던 할매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했다. 이 마당에 그걸 왜 주워 가방에 담는지. 할매는 답했다고 한다. 나중에 또 쓸 일이 있지 않겠냐고.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쇠사슬을 결사항전의 결기를 상징하는 도구로만 여겼다. 싸우기 위해 몸을 감았지만 좋아할 수는 무겁고 차가운 쇳조각. 그런데 몸을 감았던 쇠사슬을 몸의 일부처럼 거두어갔던 할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로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걸 경찰들이 가져가 버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마음에 대해 헤아려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보여준 “다음에 쓸란다!”는 패기와 결기, 배포와 유머는 그 비통한 순간을 한 순간에 뒤엎고, 승리와 패배를 뒤집어버렸다. 나에겐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이 매우 컸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어떤 싸움이 한 국면에서 패배하면 다 졌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쇠사슬을 챙긴 할머니는 패배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많은 사회운동들에 대해 묵직한 꾸지람을 던지는 것 같다. 졌는지 아닌지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시작한 싸움, 우리가 끝내야 끝나지는 것이다. 

정말로 할머니들은 농성장이 철거되고 기어이 송전탑이 다 완공되고 나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 사람들은 묻는다. 이미 송전탑은 세워졌는데 지금 송전탑 반대 투쟁이 무슨 의미냐고. 할머니들은 말한다. “송전탑 뽑아 불티, 소나무야 자라거라”고. 송전탑이 세워질 때는 못 세우게 싸웠고, 송전탑이 세워진 지금은 뽑아야 하니 싸우는 것이다. 송정탑을 뽑을 때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인데, 이제 세월이 흐르고 나도 나이가 많아지니 예전처럼 산을 타고, 구덩이를 파서 움막을 짓고, 나무를 못 베게 껴안고 싸웠던 그 때처럼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그게 미안하고 안타깝다고, 말하는 할머니들. 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밀양 가는 길에 함께 보면서 버스 안은 눈물 바다가 됐다. 죄송한 마음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밀양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란 걸 깨달았다. “송전탑 뽑아 불자”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오늘 타고 가는 이 희망버스는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과거의 국가 폭력의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한 투쟁의 중심부인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탈탈 낭독회를 준비하면서 나는 밀양을 ‘과거의 투쟁’으로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는데, 밀양 할매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더 든든하고 좋았다. 할머니들은 연대자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늘 당당하게 밀양으로 와줄 것을, 함께 싸워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밀양 송전탑 투쟁은 한 지역에 국한된 투쟁이 아니라 전국적인 송전탑 반대 투쟁, 탈핵 투쟁의 한 장이 될 수 있었다. 

에너지 불평등에 맞서

밀양 송전탑의 전기는 울산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왔다. 가장 많은 전기를 소비하는 곳은 서울과 수도권이지만 그 전기를 생산하는 핵발전소는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대규모로 생산된 전기를 대규모로 소비하는 곳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초고압 송전탑이 필요하다. 밀양 송전탑은 핵발전소와 한 몸인 것이다. 초고압 송전탑은 가정용 전기인 220볼트보다 약 3천 400배 많은 76만5천 볼트의 전기가 빠르게 흐르는 전기 고속철도다. 엄청난 전기 소음과 전자파가 발생하며 근처 동식물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성장체제를 지탱해온 주요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도 마찬가지였다. 석탄의 이동에는 철도가 필요했고, 석유의 이동에는 송유관이 필요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주유소에서 돈만 내면 연료를 주입할 수 있지만, 석유가 오는 길에 대해선 잘 생각하지 못한다. 송유관은 곳곳에서 터지기도 하고 새기도 하며 수많은 오염사고를 일으킨다. 석유는 자본에겐 막대한 이윤을 벌어다 주지만 채굴지의 주민들에겐 지옥을 안겨준다. 생산지를 비롯하여 많은 이동경로에서 석유는 자본에겐 축복이지만 민중에겐 저주였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미국에서는 다코타 지역 원주민들의 송유관 반대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전국에서 활동가, 연대자들이 다코타로 모여들었고, 그 가운데 국가 폭력이 자행되었지만, 사회적 정치적 이슈가 되면서 송유관은 다코타를 지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다코타에선 승리했고 밀양에선 패배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 운동에서 밀양이 만들어낸 힘은 결코 패배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건은 모두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에서의 지역적 계급적 차별이라는 ‘에너지 불평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운동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밀양 송전탑의 현재적 의미는 이제 송전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에너지를 써도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재생에너지 전환에 대해서도 그대로 물어진다. 어떤 한 지역을 희생시켜 거대한 규모의 재생에너지 발전 단지를 만들고 거기서 대규모로 생산한 전기를 송전탑을 통해 멀리 떨어진 소비지로 보내는 이런 방식이라면, 그게 재생에너지라도 불평등한 에너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태양과 바람의 에너지를 대안 에너지라 생각하고 전환을 요구한 것은 그것이 탄소를 배출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태양과 바람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서 마을 단위 지역 단위로 얼마든지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근린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 생산과 소비를 민주적이고 생태적이며 공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정의롭고 평등한 에너지 전환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이 주도하는 재생에너지 전환은 에너지의 상품화, 시장화, 사유화를 추동하고, 주류 환경운동 일각에서는 불평등한 에너지 생산 체제와 방향성에 대한 문제제기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라는 생산성의 구호를 재생에너지 전환에서도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밀양 송전탑 투쟁은 재생 에너지 생산에서도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내부 식민지가 또다시 만들어져야 하는지, 밀양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에게 다시 묻는다. 기존의 생산체제와 지배관계를 바꾸는 노력을 함께 하지 않을 때 ‘탈탄소 전기 사회’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은 또다른 위험을 초래한다. 체제가 아니라 연료만 바꾸는 전환이 되지 않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전환의 방향과 원칙’이다. 기후정의운동이 ‘공공적·생태적·민주적 에너지 전환’의 원칙을 강조하는 이유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싸움이다

어떤 이들에겐 밀양은 ‘끝난 싸움’이고, 송전탑이 세워진 마당에 ‘송전탑 반대 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밀양 투쟁은 지금도 에너지 불평등의 살아있는 사례로 정의로운 전환의 방향과 원칙을 묻는 이정표가 되어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는 기후정의운동에서도 중요한 원칙과 좌표를 제시한다. 

밀양 765kv 송전탑은 울산 신고리 핵발전소에서 기장, 양산, 밀양, 창녕을 거쳐 북경남 변전소까지 90.5km의 거리에 세워진 총 161기의 송전탑 중 일부 구간에 불과하다. 다른 곳도 크고 작은 주민들의 반대 투쟁이 있었지만 다 합의하였고 끝까지 저항한 곳이 밀양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얼마나 많은 지역에서 송전탑 부지마다 반발이 있었고, 합의가 되었겠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예를 들면서 밀양의 투쟁이 얼마나 소수의 사례이며 이길 수 없는 무모한 투쟁인지 말하곤 한다. 하지만 강원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 탔던 한 탈핵운동가는 말했다. 그 긴 송전로에, 극히 일부 구간일 뿐이었던 한 지역의 투쟁을 그토록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것은 무엇 때문인지, 힘없는 노인들을 그렇게 폭압적으로 짓밟아야 했던 이유를 역으로 생각해보라고. 그건 바로 전기가 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곳이 막히더라도 전기는 흐르지 못한다. 한전이 주민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쓰면서도 우회 노선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건설 비용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밀양 투쟁 덕분에 그와 같은 강압적 폭력 수단은 이후에 다른 송전탑 건설이나 개발 현장에선 쓸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돈으로 회유하고 공동체 분열시키는 방식은 더 정교해졌지만 이마저도 ‘비용’이 비싸졌다. 밀양 주민대책위의 100여 가구는 지금도 한전의 보상을 거부하고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고 있다. 밀양 송전탑은 주민 보상과 합의 없이 세워진 송전탑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흐름을 차단하는 형태의 물류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의 파업이 생산을 중단하는 파업이었다면 오늘날 위력적인 파업 형태는 이동을 멈추는 파업이다. 생산지가 전 지구적으로 할당 배치되고 기업이 대체 하청기지를 조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대공장 임노동자들이 공장을 멈추는 것 이상으로 물류를 멈추는 파업이 자본에 맞설 수 있는 노동자의 힘이 되고 있다. 화물트럭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를 비롯해서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에서 나타났던 로터리 점거 투쟁, 홍콩 민주화운동 당시의 전철 지연 시위, 유럽 농민시위에서 고속도로 및 도심 점거 시위, 항만 노동자들의 선적 파업 등에서 볼 수 있다. 전기의 생산과 흐름에 직접 개입하는 노동자 민중 운동의 사례들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 멕시코 시에라노르테 데 푸에블로 지역에의 ‘저항의 빛’ 운동은 에너지를 지역에서 생산하고 자급하는 주민 에너지 자급 운동이다. 프랑스의 ‘로빈 후드’ 투쟁은 프랑스 일반노동총연맹(CGT) 소속 전력 노동자들이 벌인 비공인 파업으로 저소득층과 학교, 병원, 보육원, 소상공인들에게 전력망을 연결하여 상품화된 에너지를 무상으로 공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운동들은 에너지의 사유화나 공공화냐, 자본의 독점적 지배냐 민중적 통제냐, 노동, 인권, 생태에 반하지 않는 에너지 전환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현재의 에너지 투쟁에 참고할 만한 전략과 사례들을 제시한다. 밀양도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나아가 이와 같은 전체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운동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다시 연대의 희망버스를 타자

우리가 타고 간 강원 버스가 당도한 송전탑 현장은 용화마을 102번 송전탑 자리였다. 놀랍게도 그 송전탑은 논 한 가운데 세워져 있었다. 전기 흐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전기가 얼마나 센 전기면 저런 소리가 나겠심니까?” 웅웅 거리는 굉음을 설명하며 밀양 할매 한 분은 이렇게 물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 이상하게 도시에선 잘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농촌에선 더 많이 보이고 더 가깝게 있다. 작년부터 얻어서 농사짓고 있는 땅도 바로 앞에 ‘송전탑 뷰’가 펼쳐진다. “선생님 농사짓는 밭이 어디 쯤이예요?”하고 물으면 “덕산리 송전탑 아시죠? 그 아래요”라고 대답한다. 송전탑이 시골의 랜드마크인 셈이다. 덕산 송전탑도 논 한 가운데 서있다. 처음 귀촌해서 농사짓던 곳은 산꼭대기 능선을 타고 가는 송전탑 말고는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는 가문비나무와 밤나무 숲이 둘러싼 아름다운 골짜기의 끝자락이었다. 그런 곳이 드문 곳이었다는 걸, 앞으로는 송전탑, 뒤로는 축사, 옆으로는 사격훈련장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총 소리, 소 울음소리 들으며 감자 옥수수 심으며 깨닫는다. 열무, 아욱, 근대, 오이, 토마토, 가지, 호박, 고추, 상추, 땅콩, 고구마 자라는 평화. 이 평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데, 윤석열 정부에서 발표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노후 핵발전소 수명을 연장하고, 대규모 핵발전소 3기를 추가로 건설하고, 소형모듈원전(SMR)을 도입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멸로 이끌 계획이다. 이 계획을 멈춰 세우지 않고는 소박한 평화의 염원이 내 땅에서만 실현될 리는 만무하다.

밀양에서 앞장서서 싸웠던 할머니들 가운데는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남아 있는 분들도 많이 연로해지셨다. 한전은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끝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할매’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행정대집행은 2014년이었지만 싸움은 2005년부터 시작되었다. 농사 지으며 살아가던 평범한 농민들이 역사에 기록될만한 저항의 주체들이 되어간 과정은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이런 투쟁의 현장은 도처에 있고,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밀양 할매’와 같은 이들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이제 내가 그 할매가 될 것이니까. ‘밀양 행정대집행 10주년 윤석열 핵폭주 원천봉쇄 결의대회’에 모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사라지지 않는 ‘밀양 할매’로 나타날 수많은 얼굴들을 본다. ‘설악 인제 자치와 자급’ 깃발을 들고 밀양을 만나러 갔던 우리 자자 모임도 훗날 설악산 할머니, 산양 할머니들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배운 것을 알뜰히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인데 말이다. 함께 간 동무는 연대자들이 누구였는지, 도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했던 것인지, 그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런 이야기도 했다. 송전탑은 밀양에만 있는 게 아니었고, 투쟁도 밀양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인제와 가까운 홍천에서는 양수발전소·송전탑 반대 투쟁이 계속 되고 있다. 이번 밀양 희망버스도 홍천 양수발전소 송전탑 반대 주민대책위와 함께 타고 갔다. 밀양은 멀지만 홍천은 가까우니, 더 자주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밀양의 친구들’이 되어 밀양으로 달려가고 밀양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저항의 이야기를 전했듯이, 홍천 투쟁에도 더 많은 ‘홍천의 친구들’이 되어주면 좋겠다. 밀양이 만들어냈던 국가와 자본의 폭력, 농촌 식민지화에 함께 맞서는 도시와 농촌의 연대를 앞으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투쟁에서도 계속 만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글은 ‘사단법인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웹진 <正道精進>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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