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 수종사/사진=이로운넷

새해 벽두에 운길산 중턱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천년 고찰 수종사를 찾았다. 들머리 앙상한 나뭇가지에 온 동네의 까막 까치들이 새까맣게 둘러앉아서 설맞이 잔치를 베푸는지 깍깍거리며 소란스럽다. 시멘트로 포장된 찻길을 비껴 산등성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중간에 세워진 아담한 정자에 올라 가져온 커피로 목을 축이고는 다시 걸었다. 벌써 절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가면 되느냐고 물으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거짓말쟁이라더니 한참을 더 걸어도 절은 커녕 스님 뒷꼭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갈수록 멀게만 느껴지니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건가보다.

정겨운 산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쉬엄쉬엄 길을 따라 오르니 다시 넓은 도로가 나타난다. 일주문을 지나고 불이문을 지나 돌계단을 밟아 올라서니 대웅보전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에 마음이 숙연해지고 높고 낮은 산봉우리와 북한강, 남한강의 유장한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려 태조왕건과 조선조 세조의 아득한 전설이 숨어 있고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아 세상의 티끌을 씻은 곳이다.

찾아 온 길손들에 정성들여 차를 내어주는 삼정헌(三鼎軒)에 들렀더니 작설차의 풍미도  일품 이러니와 통유리 너머로 일망무제 펼쳐진 양수리의 풍광이 한 폭의 수묵화다. 과연 대문호 서거정이 ‘동방에서 최상의 전망을 가진 명당사찰’이라 격찬할 만하다.  다산은 젊은 시절 자주 이곳을 찾았고 강진 유배생활 중에도 이곳을 못 잊어 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능내리에 머물면서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다산은 14세에 이곳에 와서 시 한수를 읊었다.

游水鐘寺 수종사에서 노닐며

垂蘿夾危? 드리운 댕댕이 넝쿨이 비탈에 얽혀 있는데  不辨曹溪路 절집으로 가는 길을 구별하지 못하겠네

陰岡滯古雪 그늘 진 언덕에는 묵은 눈이 남아 있고       晴洲散朝霧 맑게 갠 모래섬에는 아침 안개 흩어진다

地漿湧嵌穴 땅속 생명수는 바위틈에서 솟아나고          鐘響出深樹 종소리가 깊은 나무숲에서 울려오네

游歷自玆遍 산을 주유함이 여기서 시작되니                幽期寧再誤 먼 훗날 만날 약속 어찌 다시 그릇 되리.

/사진=이로운넷

절집 추녀 끄트머리에 쇠 조각 물고기가 걸려 나풀거리고 있다. 그 배경에는 끝없이 넓은 하늘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물고기는 바람결 따라 허공을 헤엄친다. 물고기를 메달아 둔 뜻은 잠잘 때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부지런히 정진하여 번뇌를 벗으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단다. 하늘이 바다가 되어 화마로부터 목조 사찰을 보호해 주기 바라는 주술적인 발원도 숨어 있는 듯하다.

절 마당 한켠에는 세조가 심었다는 해묵은 은행나무가 고고한 자태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건만 이곳에서 고담준론하던 옛 사람들의 발자취는 찾을 수 없고 저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도 그제의 강물이 아니다. 무아의 정경에 도취되어 억겁의 세월 속에 변화무상한 자연의 이치를  더듬으며 상념에 잠길 즈음 해가 벌써 팔당댐을 건너 산기슭으로 비껴 가면서 나에게 돌아갈 길을 재촉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물상도 세태도 인심도 소리없이 변한다. 불지 않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고 가지 않는 세월은 세월이 아니지.  머지않아  새봄이 오면 낙엽 진 가지에 또 다시 새잎이 돋아나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산천을 알록달록 물들이겠지,,,  행복도 불행도 한순간의 꿈인 것을,

키워드
#단필단상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