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수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 영등포구 경인로 72길 4. 올망졸망한 철공소들이 늘어선 골목을 걷다 한 낡은 건물 앞에 섰다.

“여기 맞나요?”

휴대전화로 주소를 읊어대니 “맞다”면서 "지하 1층으로 내려오면 된다”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찬찬히 살펴보니 계단을 따라 깨알 같은 글씨로 백지장이란 노란 딱지가 붙어있었다. 문을 여니 예상 밖의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지장은 신도림역 부근 이 건물 지하 1층과 옥탑 공간을 빌려주고 있다. 이 지하 공간은 IMF이후 19년간 비어있었다.

30평의 널찍한 공간에는 조명등과 소파 그리고 탁자 몇 개가 전부다. 빔프로젝터 설비와 냉장고 한 대가 눈에 띨뿐 콘크리트 벽면에는 페인트칠조차 돼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방문자를 맞이했다.

“저희는 낡고 오랫동안 방치됐던 공간을 찾아내 최소한의 인테리어 비용을 들여 공간을 싸게 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공간을 개성과 취향에 맞게 채워가는 건 이용자들의 몫이죠.” -- 김차근 백지장 대표

 

그의 말대로 백지장이 운영하는 공간에서는 3년 남짓 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접어뒀던 꿈을 펼쳐나갔다. 핑퐁스튜디오란 유튜브 채널 운영팀은 1년간 이 지하 공간에서 60편의 영상 콘텐츠를 제작했다. 하루 24시간 5만 5000원의 사용료와 중고 기계 5만 원이 그들이 들인 투자비용이다.

“돈도 넉넉지 않고 성공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리수를 두긴 쉽지 않죠. 백지장은 그런 분들에게 ‘지금 당장 시작해도 괜찮다’라는 용기를 넣어주고 있다는 평을 듣습니다.”

 

핑퐁스튜디오는 시작 당시 구독자 수 27명에 불과했지만 1년 사이에 구독자 수 3만 명, 페이스북 구독자5도 5000명으로 늘었다.

 

?백지장 공간에서 유튜버로서 꿈을 키워간 핑퐁스튜디오가 제작한 콘텐츠들./사진제공=백지장

 

1500회 모임 .. 누적 이용자 1만 8000명 기록의 비결

 

백지장은 영등포구 일대에서만 5개의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누적 이용자 수는 1만 8000명. 모임 숫자로는 1500회에 이른다. 올해만도 600회의 모임이 열릴 예정이다.

 

김차근 백지장 대표는 "개성과 취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용자들에겐 기존의 설치물이 방해가 될 수 있다"면서 "이용자들이 백지에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최소한의 가구만을 비치한 공간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 서울에 예쁘고 편리한 공간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나 초기 창업자들에게는 꾸밈없는 그리고 부담 없는 이용료로 사용할 자유로운 공간도 필요합니다. 그들을 상대로 한 대안 공간들이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수익성이 낮아 2~3년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저희는 이용료를 낮게 유지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공간을 만드는데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

백지장은 시간당 대여가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공간을 빌려준다. 공간 크기에 따라 평일의 경우 하루 6만 원에서 10만 원 선이다. 그러다 보니 잠시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하기 위한 모임보다는 이 공간에서 무언가 작당을 꾸미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나인앤드가 백지장 문래 조명공장 공간에서 연 아티스트와 함께한 프로그램/사진제공=백지장

 

“ 처음에는 저렴한 파티룸인 줄 알고 찾았다가 실망하고 가신 분들도 많았어요. 저희 주요 고객들은 창작자들이거나 취향이나 관심사를 기반으로 모인 20~30대의 젊은 층들입니다.”

 

재능 있는 신진 아티스트를 발굴해 세상에 소개하고 더 많은 창작자들이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나인앤드(9AND)는 창업 직후부터 백지장 공간에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아티스트와 함께하는 살롱, 아티스트와 함께 하는 아카데미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지금은 자체 공간을 가지고 수십 명의 아티스트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문화콘텐츠 회사로 발돋음했다.

 

백지장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또 하나의 장점은 내 멋대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 저희 공간은 백지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무얼 설치해도 괜찮은 공간입니다. 나갈 때 원상복구의 개념은 붙였던 걸 떼어내고 청소를 하고 가는 수준입니다. 청소를 하고 싶지 않은 이용자들에겐 청소비를 따로 받습니다. 청소는 지역의 청년들이 아르바이트 형태로 진행합니다.”

 

?백지장의 신도림역 지하 1층 공간에서 열린 밴드 전기장판의 첫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 이들은 따뜻한 전기장판위에 모여 앉아 곡을 감상했다./사진제공=백지장

 

방치된 공간에서 사회적 가치를 캐내다

 

김차근 백지장 대표가 공간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2016년 교외 창업동아리 활동을 위한 공간을 찾는 데 무려 3개월이 걸렸고 이를 쓸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데 또 3개월이 걸렸다. 6개월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다 보니 동아리 모임도 활력을 잃어갔다.

“ 공간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저희 같은 고민을 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공간 나눔 사업을 하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백지장의 출발입니다.”

 

?백지장 1호 공간인 대림역 대로변 지하창고의 현 모습. 김 대표는 월 30만 원에 이 공간을 빌려 공간 임대 사업을 시작했다/사진 제공= 백지장

 

백지장이 운영하는 공간들은 흔히 온라인 부동산 사이트나 일반 중개업소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물건들이다. 매물로 올려놓기엔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 낡은 공간들로 발품을 팔아야만 찾아낼 수 있는 공간들이다.

김 대표의 발품과 지인들이 알음알음 알려준 정보로 백지장이 확보한 공간은 신도림 고가 옥탑과 대림 지하창고, 문래 조명공장 등 총 5군데다. 공간 임대 수익률도 나쁘지 않다. 공간에서 나오는 월 매출만 평균 650만 원으로 백지장이 건물주로부터 빌리는 임대료는 월 60만 원 미만이다. 대관율도 높아 성수기 때는 70%, 평균적으론 50%를 웃돈다. 전체 이용 사례의 45%가 재 이용자들일 만큼 신뢰도 높다.

백지장은 2017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선정과 2019년 H-온드림 사회적기업 창업 오디션에서 인큐베이팅 부분 개별 창업팀에 선정되면서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멘토들의 조언을 받아 도시재생센터나 공간 기획자들과 교류하며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도림천 위 고가도로에 맞닿은 신도림 옥탑 공간. 18평의 독립 공간으로 탁 트인 하늘과 농

김 대표는 “온라인상에 존재감을 키워서 백지장의 공간을 현재의 서울 서부만이 아닌 서울 동부 등에도 열어 더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단기 목표”라고 말했다.

 

“성수, 을지로처럼 매력적인 지역의 숨은 공간을 찾아 창작자, 모임 운영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백지장과 같은 공간도 지속 가능하다는 사례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공간 이용자들의 이야기 발굴로 사회적 가치 전파

 

백지장의 주요 관심사는 공간뿐이 아니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활동에 숨겨진 사회적 가치를 발굴해 전파하는 일이다.

 

?비전업 DJ공연과 전자음악 매니아들의 축제현장/사진 제공=백지장

“다양한 팀이 백지장을 거쳐 창업·창단을 했고 또 성장해 갔습니다. 기념회나 후원행사도 많이 열렸고요. 플라스틱 쓰지 않는 날 같은 캠페인성 행사도 열렸어요. 다양한 생활문화 활동도 열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돌 팬들이 모여 공연영상을 함께 보며 지난 공연을 추억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을 소재로 다양한 주제의 파티를 열기도 합니다. 저희는 우리 공간에서 열리는 다양한 활동들을 한 장르씩 묶어 매달 소개해주는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이달 말 전업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을 담은 생활문화전시회 꼭지가 소개될 예정이다.

 

“저희가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이용자들을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자들이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해야 불필요한 요소들을 빼내 지금처럼 저렴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요. 저희는 이용자들이 삶에서 가치 있다고 느끼는 활동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공간을 넘어 모임으로 .. 모임가.co  서비스 개발 중

 

보랏빛 조명이  켜진 백지장 공간 아래 선 함께하는 사람들. 총 4명으로 경영학,컴퓨터공학,디자인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였다. 김 대표는 "백지장의 뜻으 여러 장을 맞대면 더 두꺼운 하나의 책이 완성된다는 의미"라면서 "협업과 다양성을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백지장은 모임을 여는 사람들을 위한 웹서비스 '모임가.co'를 개발 중이다.

 

“창작자들에게 젤 필요한 것이 활동을 하기 위한 예산 마련이라면 모임을 주선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백지장 공간에서는 비슷한 취미와 성향,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모임이 많이 열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 사이트에 들어가야만 어떤 모임이 열리는지 알 수 있어요. 소규모 모임은 사이트조차 없지요. 다양한 모임들을 한꺼번에 조회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준비 중입니다.”

 

김 대표는 이를 위해 열정적으로, 혹은 전문적으로 많은 수의 모임을 여는 팀과 파트너십을 맺으려고 한다.

“첫 번째 창업이라 그런지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속도가 느려요. 일단 백지장 홈페이지에 들어와 보세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사진. 이우기(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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