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임정수립 100년, 다시 만세] 10. "조국을 잊지않고,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다간" 혁명가들
[3.1운동‧임정수립 100년, 다시 만세] 10. "조국을 잊지않고,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다간" 혁명가들
  • 이로운넷=최범준 인턴 기자
  • 승인 2019.06.22 02: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약산(若山) 김봉원·약수(若水) 김두전·여성(如星) 이명건 이야기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배우 조승우는 영화 암살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연기했다. 영화 속 대사처럼, 김원봉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자랐다. 밀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 성지로 손꼽힌다. 밀양시는 시청 홈페이지에서 김원봉, 윤세주, 최수봉, 김익상, 김상득, 황상규 등 독립운동가 77명을 소개하고 있다. 김원봉은 같은 밀양출신 독립운동가이자, 고모부인 백민 황상규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김원봉이 밀양을 떠나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그와 뜻을 같이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김두전과 이명건, 김원봉은 각각 경남 동래, 경북 칠곡 출생인 동향 친구들과 독립운동에 삶을 바치기로 뜻을 모은다. 세 사람은 김원봉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를 찾아가고 백민은 세 청년에게 ‘조국을 잊지 말고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라’는 뜻을 담아 각각 약산(若山), 약수(若水), 여성(如星)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시대의 풍랑 속에서 산처럼 살았던 김원봉에겐 물처럼 별처럼 함께 살아간 김두전과 이명건이 있었다.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간 약산(若山)

약산은 ‘군사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16년 경성 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3.1 운동 후 1919년 11월 백민의 지도아래 ‘의열단’을 결성한다. 조선총독부 폭파시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동양척식주식회사 습격 등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 중심에 의열단이 있었다.

김원봉은 이념보다는 민족을 앞세운 민족주의자였다. 의열단 행동강령에 이어 의열단 정신과 독립노선을 담은 강령 필요성을 느꼈고, 1923년 아나키스트 단재 신채호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이후 중국 국공합작으로 탄생한 중국 최초 현대식 군사학교 황포군관학교에 입교(1926년)해 국민당 장개석과 인연을 맺었다. 국민당 장개석과 인연은 이후 조선의용대 창설(1938년) 등 활동 지원으로 이어진다. 국민당 장개석은 일본제국주의보다 중국내 공산주의자 궤멸에 골몰했던 반공주의자였고, 반공주의 노선은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시안사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42년, 김원봉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 34회 회의에 참가하며 임시정부에 입각한다. 당시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는 “오늘의 이 의회가 성왕을 이루게 되어, 마음속, 진심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소회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김원봉은 백범 김구와 라이벌 관계였다. 그간 임시정부를 배척했던 좌파 정당들이 임시정부 합류를 결정하고 임시의정원에 등원한 배경에서 백범의 소회를 짐작할 수 있다.

김원봉은 해방을 위해 기꺼이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한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일부 역시 임시정부로 흡수됐다. 이후 광복을 맞은 김원봉은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제2진으로 귀국한다.

약산(若山) 김원봉

해방정국과 약산(若山)

그는 귀국 후 몽양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했다. 조선인민공화국 군사부장 역임 등 좌우합작 정치노선에 기여한다. 하지만 국내정세는 약산의 편이 아니었다. 일제강점당시 김원봉에 걸린 현상금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200~300억에 이른다. 일제가 현상금 거액을 걸어도 잡을 수 없었던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 붙잡힌다. 1947년 2월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수모를 당한다.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는 죄목이었다. 노덕술은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 부르고 뺨을 때리며 모욕한다. 풀려난 김원봉은 꼬박 사흘을 목 놓아 울었다.

1947년 7월, 김원봉이 뜻을 같이했던 여운형이 총탄에 쓰러진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생존 인물 가운데 최고의 혁명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몽양이었다. 김원봉은 여운형 암살 이후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자’고 호소했지만, 정세는 여의치 않았다. 1948년 4월, 김원봉은 남북협상 참가를 위해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는다.

김원봉은 북으로 가기 전 중국 중경 활동 당시 비서 역할을 했던 사마로에게 편지를 남긴다.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 지역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 이듬해 6월, 김원봉의 라이벌이자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던 백범마저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경교장에서 숨을 거둔다.

김원봉은 북에서 조소앙, 안재홍 등과 중립화를 통한 민족단결과 통일을 주장했고, 권력의 눈밖에 난다. 1958년 11월 그는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다.

반민특위로 감옥에 갇힌 국회부의장, 약수(若水)

약수 김두전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노동자 조직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20년 최초의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결성에 참가해 구속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1922년 귀국해 1942년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이듬해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다 붙잡혀 6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약수(若水) 김두전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지만, 건국준비위원회 좌경화에 반발하며 사퇴했다. 이후 우파계열 정당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지만 당은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김규식이 이끌던 진보 민족주의 노선에 합류한다.

이후 고향인 부산 동래에서 1948년 5.10 총선거 제헌의원으로 당선, 초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앞장섰지만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 투옥된다. 대한민국 제헌의회 국회부의장 약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출옥할 수 있었다. 약수 역시 북으로 넘어가 평화통일을 촉구했지만, 1959년 반당혁명분자로 몰려 숙청됐다.

조국의 문화를 연구했던 여성(如星)

여성 이명건은 경북 칠곡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 언론인, 학자, 민족운동가, 화가 등으로 활동했다. 여성은 3·1운동 당시 대구지역 독립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학생 비밀결사조직 혜성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혜성단 만세시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 실패했지만, 각종 독립운동 문서를 인쇄 배포하여 지역에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여성은 혜성단 활동으로 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사회주의사상을 배운다. 1926년부터는 상해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했고 1929년 국내로 귀국해 언론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역임하고, 당시 각종 통계를 총망라한 <숫자조선연구>를 집필했다. 이 외에도 <애란민족운동>·<약소민족운동의 전망> 등을 집필했다. 여성은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돼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다. 이후 복식(服飾) 분야 연구에 몰두해 1946년 <조선복식고>를 펴낸다. 이 책은 한국 복식 분야를 개척한 의의가 있고, 복식사·미술사 연구자 들에게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여성(如星) 이명건이 지은 책 <조선복식고> 민속원이 2008년 재발행했다. 조선복식고는 이화여전 학생들이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 사진 : 민속원

여성은 해방 후 약수와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문화부장 및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몽양 여운형 암살 후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 북에 남는다. <조선미술사개요>(1955년)·<조선건축미술의 연구>(1956년) 등을 펴내며 학자, 강사로 활동한다. 여성은 1959년 약산 김원봉과 함께 숙청된다.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았던 세 친구는 모두 고향(밀양·동래·칠곡)을 등진 채 쫗기듯 북으로 건너가야 했고,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밀양독립운동기념관 http://www.miryang.go.kr/doklip/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