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내 백년, 기억하세! 머내 만세, 자랑하세!”
‘만세운동’ 하면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3.1운동,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4.1운동 등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만세운동의 물결은 특정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한반도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고, 해외로도 확산됐다.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열정을 여과없이 보여준 세기의 사건이 바로 3.1운동이다.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용인 머내 마을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할 역사다.
‘머내’는 현재 수지구 동천동?고기동의 옛 지명으로, ‘멀리 있는 냇물’이라는 뜻을 지녔다. 지난 2016년 9월 이곳에 사는 주민 10여 명이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기 위해 아마추어 공부 모임 ‘머내여지도’를 만들었다. 이 모임은 구성원 스스로 '아마추어'라고 칭하지만, 일제강점기 실제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발굴하며 지역 역사를 스스로 쓰고 있다.
동네 역사공부 모임, 숨은 독립운동가 16명을 발굴하다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1919년 3월 머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기록을 찾고, 당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했다.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3월 마을에서 ‘99주년 기념 걷기대회’를 열어 마을의 역사를 기념했다. 11월에는 숨은 독립운동가 16명을 찾아냈고, 이 중 15명이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도록 이끌었다.
머내여지도 모임을 주도한 김창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이 풀어내는 '머내 만세운동'은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숨은 독립운동 이야기, 우리 역사 이야기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당시 고기 2리 구장(이장 격)이던 이덕균(1879~1955)과 고기1리 주민 안종각(1888~1919)의 주도로 머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1000여 명의 주민이 동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균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안종각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돼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함께 운동에 동참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훈장이나 포상도 받지 못했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가 포상 대상을 3개월 이상의 형, 태형 90대 이상의 선고를 받은 이들만 선정한 탓인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 엄격한 기준이 완화됐다. 이에 따라 옥고 기간이나 태형 수와 관계없이 활동 내용을 심사해 포상 자격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머내여지도 회원들은 당시 판결문과 후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추적했다. 태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공식 기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 지난해 11월 수지구청 문서고에서 지금의 블랙리스트인 ‘범죄인 명부’를 찾아냈다. 일제강점기 때 수기(手記)로 작성된 명부에는 16명이 ‘태 90’이라는 즉결 처분을 받은 사실과 직업, 연령,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이를 계기로 16명 중 추후 소극적 친일 행위에 가담한 1명을 제외한 15명(이도해, 홍재택, 강춘석, 권병선, 김영석, 김원배, 김현주, 남정찬, 윤만쇠, 이달순, 이희대, 정원규, 진암회, 천산옥, 최충신)이 지난 3월 1일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게 됐다.
김 위원은 “올해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았는데, 숨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더 의미 있게 행사를 치를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주민이 기획·운영하는 축제…3월 30일 표지석 제막·만세길 행진
오는 30일 열리는 머내 만세운동 행사는 고기초등학교 앞에서 100주년 기념 표지석 제막식을 시작으로, 약 4km의 만세운동 길을 따라 행진하는 걷기대회 등으로 꾸려진다. 모든 행사는 주민들의 주도다. 용인 동천마을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머내여지도, 마을극단 동동, 밥챙알챙 마을합창단, 머내풍물패연합, 고기교회 등 마을 공동체 여럿이 참여한다.
이들은 각 모임의 특성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자발적·무보수’로 함께한다. 마을에서 열리는 잔치를 직접 기획하고 진행해 주민 스스로 즐기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관의 지원 없이 350여 명이 참여했으며, 올해는 용인시청, 수지구청, 보훈지청 등과 민관 합동 행사로 확대 진행할 계획이다. 지역 주민들이 주도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용인과 성남의 접경이자 서울의 변두리로 ‘베드타운’의 전형인 이 지역에서 유독 마을 공동체 모임이 활성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 위원은 “이우학교, 소명학교 등 대안학교가 생기면서 학부형과 학생들이 많아졌고, 이들을 중심으로 모임이 발달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고, 이들이 섞여 생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서울 근처니까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거지. 지역에 대한 정체성이나 프라이드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잖아요. 그런데 마을의 스토리를 발굴하면서 역사를 알게 되고, 지역의 특징을 배워가면서 애정이 생기게 되죠. 축제를 열면서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접점이 생기고,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참 즐겁습니다.(웃음)”
지역의 정체성을 주민 스스로 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 위원은 “사는 맛이 다르다”고 답변했다. 그는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밖에 없는데, 한국사회에서 사는 곳이란 부동산적 가치로만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며 “도시든 시골이든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기적으로 이해할 때, 지역에 대한 애정과 흥미는 물론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궁금증이 생긴다”고 이야기했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는 3월의 주말, 100년 전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길을 거기 사는 후손들이 다시 거닌다.
거창한 애국심이 아니라 동네를 산책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사는 지역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두 발로 거닐어 보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좁다란 골목길과 시원한 천변길을 걸으며 머내의 ‘재발견’이 아닌 첫 ‘발견’을 하기 위해.
사진제공. 머내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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