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아진 해를 등지고 분주하게 집으로 사라지는 겨울밤, 맞벌이 부부의 발걸음이 이상하리만큼 여유롭다. 그들이 아이를 데리러 도착한 곳은 도란도란 아이들의 소리와 온기가 새어 나오는 작은 도서관. 온마을이 함께 아이를 품고 돌보는 아파트다.

새벽이슬의 얼음 알갱이가 녹지도 않은 이른 시간 빨강 방수 앞치마와 검은 장화 고무장갑으로 무장하고 모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작은 산처럼 쌓여있는 김장재료 너머로 건강한 중년의 남자들은 커다란 빨간 대야에 모여앉아 무채 칼을 쥐고 막걸리 내기를 하는 풍경.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2019년 같이살림 고덕리엔파크 3단지의 기억의 조각이다.

2019년의 뜨거운 열정의 조각은 김승희 님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는 시구를 절로 생각하게 했다. 네모반듯한 아파트 사이에서 온기를 더하는 사람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고덕리엔파크 3단지 사람들이다. 돌봄과 나눔이라는 의제를 모으러 1년 동안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고덕리엔파크 3단지 같이 살림 2단계 2020년 사업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설렜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면 누구든 방과 후 돌봄교실에 올 수 있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면 누구든 방과 후 돌봄교실에 올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낯선 위기에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돌봄과 나눔의 의제로 나뉘어 각각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의견을 모았다. 부지런히 정기회의를 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나가면서 돌봄교실과 나눔교실을 준비했다.

돌봄교실은 방과후 돌봄교실로 오후 2시에서 5시까지 돌봄이 필요한 아이면 누구든 올 수 있게 하였다. 돌봄교실에서는 아이들에게 만들기, 요리하기, 나무놀이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했고, 재미있는 교실을 만들고자 주민 교사들이 헌신했다.

나눔교실은 어른이 대상이며 나눔을 하고 싶은 것들을 배우는 교실을 만들었다. 발효 아카데미로 장 만드는 것을 나눔했으며, 손뜨개로 수세미와 친환경 면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었다.

나눔교실에서는 친환경 면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었다.
나눔교실에서는 친환경 면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었다.

가장 큰 과제는 공간이었다. 2019년에는 관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작은 도서관을 빌려서 돌봄을 했으나, 2020년엔 그동안 사용하지 못한 청소년문화센터를 사용하고 싶었다.

청소년문화센터는 여러 공간이 있음에도 다 문을 닫아놓고 입주자 대표회의, 임차인 대표회의 모임만 진행하고 창고로 방치한 곳이다. 죽어있는 공유 공간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한 결과, 청소년문화센터를 리모델링해 돌봄교실과 공유부엌을 만들 수 있었다. 그간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고 창고로 방치된 ‘고덕리엔파크 3단지 아파트 유휴 공간’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2020년에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고 비어있던 공간이 드디어 주민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주민들의 힘으로 이곳을 마을 카페, 돌봄 교실, 마을 부엌 등으로 만들었다.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비용을 만들 정도로 2019년의 돌봄 교실과 나눔의 성과는 대단했다.

공간이 마련되자 방문하거나 참여했던 주민들이 필요한 물건을 기부해(수납장, 실내장식 소품, 학용품, 주방용품 등) 공간을 하나씩 채우고 있다. 주민들의 손길이 묻어 더욱 친근한 곳이 되고 있다.

주민들의 화합과 노력으로 돌봄교실을 마련했다.
주민들의 화합과 노력으로 돌봄교실을 마련했다.

2020년 김장 나누기 행사는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11월에 시행되면서 철저하게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아파트 한복판에서 시골집 앞마당을 재현한 정겨운 풍경은 사라졌지만, 공개적인 행사보다는 안전한 행사로 진행됐다.

준비하는 주체 회의에서 단지 내 어려운 이웃들이 코로나로 지원받기 힘든 점을 고려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코로나 방역(안면 보호대 착용, 음식섭취 금지, 명단 작성, 열 체크, 자체 소독 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해 약 400kg (30가구) 김장을 나누는 성과를 이어나갔다.

철저하게 비대면으로 진행됐기에 나눔 대상 이웃을 대면할 기회는 사라졌다. 하지만 김장 재료 준비 등 2일 간의 긴 행사에서 힘든 기색 없이 참여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려운 이웃을 찾은 추진단 회원들의 활약이 더욱 빛이 났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김장 행사를 진행했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김장 행사를 진행했다.

고덕리엔 3단지 '공동주택 같이살림'의 주민 주체인 마을 주민모임 ‘사이’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임차인대표회의, 관리사무소 외에 노인회, 부녀회뿐 아니라 근처 강명초, 강명중 학부모회와 함께 프로젝트를 전방위적으로 진행해왔다. 박철민 ‘사이’ 대표와 이들의 기지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학교와 주민들의 협조체계가 만들어져 단지 내에서 돌봄 공백에 놓여있는 아이들과 가정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됐우며, 더욱 요긴한 돌봄이 가능했다. 여러 주민조직(부녀회, 학부모회 등)에서 돌봄 공백 아이들과 1차로 수요를 파악하고, 학교라는 공적 체계와 함께 홍보, 조언, 사업방향 등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일상생활 기술을 직접 체험하는 마음 학교, 강좌사업인 '발효 아카데미'를 통해 주민들이 구체적으로 배우고 싶은 교육을 계획하고, 친목을 다졌다. 배움의 기회에 그치지 않고 단지 내 돌봄과 나눔을 같이 실천하는 과정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발효아카데미를 통해 발효식품을 만드는 실습을 진행했다.
발효아카데미를 통해 발효식품을 만드는 실습을 진행했다.

지난해 12월 15일 사업 종료 예정이었으나, 당초 계획보다 빠르게 12월 1일에 사업을 종료했다. 취재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의 온기 어린 조각들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고덕리엔파크 3단지 공동주택 같이살림'이‘ 계속 남아주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