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보를 웃도는 쌀쌀한 날씨. 겨울 느낌이 물씬 나는 지난 11월의 한 주말은 서울 서대문구 유원홍은아파트 주민들이 모여 생강편과 생강청을 만드는 날이었다. 만든 제품은 주민들이 조금씩 나누어 먹거나 장터에서 판매 예정이다.

인왕시장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 실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뒤로 북한산을 지고 아늑한 곳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단지 바로 앞 건물 3층에 있는 경로당으로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요즘 무엇보다 중요한 위생
요즘 무엇보다 중요한 위생.

“지금 오신 분들은 이쪽에서 열 체크하고 이름 연락처 적어주세요.”

방역과 위생에 유난스러울 만큼 엄격히 신경 쓰고 있었다. 이웃 간의 단합과 편의를 도모하러 모인 자리인 만큼,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우리는 여기 공간 크기에 맞게, 철저하게 인원수를 제한해서 지원받아요. 요즘은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위생도 마찬가지다.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이 이 단지에서 수년간 내려온 전통인 만큼, 사람들은 이미 위생과 안전을 챙기는 것이 몸에 익어 보였다.

​“나는 아예 모자를 쓰고 왔어, 머리카락이 안 빠지는 것 같아도 이건 필수지.” 

“집에서도 요리할 때, 스카프로 머릿수건부터 만들어 쓰거든. 이건 거의 버릇이야.”

유자청 담그기.
유자청 담그기.

​유원홍은아파트에는 서울의 여타 아파트와는 다른 특별한 문화가 있다. 주민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문화가 그것이다. 넉넉히 만들면 장터를 열어 팔기도 한다. 친환경 식자재를 공동구매하기도 하고, 근처 ‘포방터시장’을 비롯한 지역사회와의 공생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어제, 오늘 쓰는 생강은 포방터 상인회장에게 30kg 주문한 거고, 떡 같은 재료도 그쪽에서 가져오려고 노력해요. 설탕은 유기농으로 서대문 지역 생협에서 구매한 거고요. 지난주에 담근 고추장이나 다음 주의 김장재료도 지역사회에서 믿을만한 것들로 찾아서 마련될 거예요.”

지역사회와 공생하는 생강차 재료.
지역사회와 공생하는 생강차 재료.

바닥 청소를 끝내고 재료 다듬기가 시작됐다. 생강편과 생강청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강의 흙을 씻고, 껍질을 일일이 벗긴 뒤, 모두 균일한 두께로 썰어줘야 한다. 여기에 설탕을 버무려 녹이고 수분을 날려주면 생강편이 완성된다. 썰어둔 생강을 병에 담고 설탕에 며칠간 재워 두면 된다.

문제는 30㎏의 생강을 하룻밤 말리는 동안 위생적으로 식자재를 보호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말리는 것이었다. 베테랑 주부들이라도 집밖에서 대용량으로 생강차를 만드는 경험은 흔치 않았다.

“생강을 썰어 준비한 뒤, 잘 말릴 방법을 모두 이리저리 고민했어요. 결국 구멍이 뚫린 바구니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생강을 담아 놓고 각도를 잘 맞춰 선풍기를 틀어줬어요. 바람이 통해야 제대로 마르는데, 각도를 계속 바꿔 시도해보니 어느새 되더라고요. 일반 스테인리스 통에 펴서 말리면 제대로 안 마르겠더라고요.”

집단지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적극적이었고,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을 모았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줬다. 이러한 문제해결 방식이야말로 공동체 활동을 하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아닐까.

생강차 만들기.
생강차 만들기.

유원홍은아파트는 다른 같이살림 프로젝트 참여 단지들과 달리, 이미 대량생산 및 판매의 경험이 풍부한 곳이다. 제품의 품질이 균일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처지에서는 서운한 법이니, 가장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이미 비결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판매할 거니까 전부 정확히 계량해야 해요. 어떤 건 많이 갈고 어떤 건 덜 갈면 차이가 나서 안 돼요. 얇게 써는 건 이 정도로 통일하는 게 제일 효율적일 것 같아요. 설탕도 전부 똑같은 양으로 넣어야 해요.”

이웃에게 가서 바로 빌려온 녹즙기.
이웃에게 가서 바로 빌려온 녹즙기.

이은주 대표가 갑자기 일어선다.

"도깨비방망이로 생강을 갈려니 너무 오래 걸리네요. 녹즙기 빌리러 잠깐 바로 앞에 잠깐 갔다 오려고요.”

무언가를 하다가 필요한 것이 생겼을 때, 부탁할만한 이웃이 바로 떠오르는 곳. 이러한 이웃에 대한 신뢰와 경험이야말로 이 아파트가 사회적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지탱하는 특징이다. 경쟁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울에서 어떻게 이런 모습이 가능할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모여 효율적으로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유원홍은아파트에는 입주자대표회의나 부녀회가 아닌 특별한 마을공동체가 있다. 바로 '유원홍은아파트사랑방'이다. 사랑방을 처음 만든 이 대표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2007년 1월에 이곳으로 이사 왔어요. 어느 날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주민회의가 있었어요. 매번 하는 입주자대표회의도 아닌, 중요한 의결사항인데도 젊은 사람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그날 모이신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들이 참여를 많이 해줘야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데에 관심들이 없으니 안타깝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어요.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 수 있도록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주민회의에 참석하신 분들이 만장일치로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날 밤 바로 카페를 만들었어요. 그게 2013년 1월 30일이고 사랑방 창립일인 셈이죠. 제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아주 크게 현수막도 만들어 걸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에 50명이 가입했더라고요.

현재 사랑방의 단체 채팅 방에는 115명이 함께하고 있다. 299세대인 이 아파트로서는 디지털에 익숙지 않은 고령층을 제외하면 많은 세대가 가입한 셈이다. 이 대표의 과감한 시도가 유원홍은아파트에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됐다.

카페를 좀 더 활성화하려고, 주민생활과 밀접한 서울시나 서대문구의 정보를 올렸어요. 그중에 서울시 뚝섬장터, 녹색장터도 있었죠. 2015년에 주민 한 분이 우리도 그런 장터를 열면 좋겠다고 해서, 그 주 일요일에 바로 열었어요.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서 1년에 2번씩 정기적으로 하게 됐고, 그게 해마다 이어오는 ‘유원홍은마을 마을축제’ 전통이 된 거죠.

사랑방이 장터에 참여하는 모습
사랑방이 장터에 참여하는 모습

이야기가 이어지자 생강청을 만들던 주민들이 앞 다투어 ‘사랑방’에 대해 자랑 어린 소개를 해주었다. 사랑방 대표에 대한 애정과 신뢰도 엿볼 수 있었다.

​“오늘 같은 활동이나 모아장터나 여기 이 이은주 대표가 다 추진하는 거야.”

​“여기 사람들도 옆에서 지켜보다가, 혼자 동동거리는 게 안쓰러워서, 또 좋은 의미가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그동안의 희생을 보면서 미안하니까 도우려고 노력하는 거지요.”

8년여 동안 공동체를 위한 한 사람의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사람들의 신뢰와 참여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방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달걀, 참기름, 들기름, 미역, 다시마 등 주민들이 원하는 제품을 생산자 직거래로 들여온다. 이윤을 남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택배비 등 손해를 감수한다. 이 대표는 이 활동이 8년씩이나 이어질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영양란 공동구매였다고 회상한다.

“2016년도 인근 아파트에서 축제 때 영양란을 산지 농장과 직거래했었어요. 저 혼자 사 먹어봤다가, 혼자 먹기 아까워 주민들에게 알리고, 대신 사다 주게 되면서 규모가 커졌어요. 그 농장주가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매월 ‘모아장터’를 열게 된 거예요.”

그는 자신이 금전적으로 손해를 좀 보더라도 주민들에게 소규모 생산자로부터,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직거래한다는 원칙을 흔들림 없이 고수해왔다. 그 깐깐함이 크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 항생제 달걀 파동 당시였다.

전국이 댤걀을 믿지 못하고 무항생제 달걀을 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곳의 주민들은 든든했다. 이미 과정을 다 확인하고 업체를 선정했고, 소형 농장과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민들의 믿음을 샀고, 이후 사랑방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한 사람의 노력에 이웃들이 관심으로 화답하면서 공동체 경제를 활성화하는 선순환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모아장터는 원칙이 있어요. 재배과정이 가장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농작물을 찾아요. 또 대규모 농장(농부)보다는 판로 확보가 어려운 소농을 찾아서 직거래해요. 농민도 도매로 넘기면 이윤이 별로 없이 팔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직거래는 농장주가 이윤을 더 붙여도 우리가 시중에서 유기농, 프리미엄 상표 달고 사는 것보다는 저렴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가격을 깎지도 않아요. 그냥 농부님이 책정한 가격을 존중해요.

중간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 신선한 상품을 유통 마진 없이 주민들에게도 매입가격 그대로 줘요. 참기름 같은 건 깨지기 쉬워서 택배로 못 부치니까 제가 서울 반대편 끝까지 직접 제 차로 가서 전부 싣고 와야 해요. 쉽지는 않지만, 믿을 수 있는 제품으로 선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희생이라기보다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수익이 없어도 계속하는 거예요.

​유원홍은아파트가 사회적경제 공동체로서 미래가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대표가 열정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권혁미 반장은 이것이 선순환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라고 했다.

“여기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와요.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시는 분들은 길게 가요. 오히려 우리가 억지로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오는 분들은 오래가지 않잖아요. 우리 주민들은 힘들다는 등 이러지 않아요. 매월 한 번씩 열리는 모아장터 팀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이런 꾸준함이 신뢰를 만들고 서로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갈수록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품목이 다양해지니까 모아장터가 더 활성화하고 인근 주민들까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잘 이용하게 되는 선순환이에요.”

유원홍은아파트 전경.
유원홍은아파트 전경.

사회적경제의 본질은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도 있지만, 그 기저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따뜻한 환경을 만드는 것에 있다. 이러한 공동체 활동은 이웃 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 기회를 매우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 오늘 생강청을 위해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이웃사촌이 태어났다.

“저기... 아까 0동 0호 사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남편분 성이 권씨 아니세요?”

​“맞아요. 권00이예요.”

​“맞네, 예전에 동대표도 하시고 반장도 하시고 하셨던 분. 앞장서서 역할을 많이 하셨잖아요. 사실 저도 권 씨거든요. 권00. 돌림자 보니까 항렬도 알 것 같은데요!”

​“그러네, 권 씨는 본이 하나잖아. 어머 친척뻘이네! 하하하”

​사랑방은 얼굴만 조금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이름을 알게 되고,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사이로 발전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사회적경제의 본질에 충실하다.

이러한 아름다운 선순환이 지속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대표 개인의 희생과 봉사에만 의지한 채 명맥을 이어왔다. 그사이에 대표의 모습을 보며 함께 돕고 참여하기로 한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들 역시 순수한 봉사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 온 젊은 사람도 많아졌다. 20대의 새로운 입주자에게 무조건 무료로 봉사하라고 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또한 기존 이웃들의 무료 봉사는 언제까지나 당연할까? 그것이 우리 주민공동체가 오래가는 방법일까?

“저는 다른 활동도 너무 바쁘고, 말 그대로 공동체 활동으로 해왔던 거라 한계가 있어요. 이 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시스템화가 필요하고 새로운 사람들도 계속 유입되어야 하겠죠. 그러려면 리더가 직장을 그만두고 여기에 집중해야 해요. 하나의 기업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이 대표는 같이살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대부분의 아파트단지는 같이살림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그때부터 홍보하고 사람을 모은다. 유원홍은아파트도 올해 하반기에 선정돼 1단계를 밟고 있다. 하지만 다르다. 사람들은 이미 모였고, 공동체 활동에 대한 경험도 충분하다. 이제 체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누군가 전담해 현금 흐름은 물론, 구매 생산 판매 등의 과정을 관리해야 하고, 단지에 새로 입주하는 젊고 새로운 이웃들의 유입을 기대하려면 기존의 무료 봉사만으로는 어렵다. 수고에 대한 비용을 적게나마 책정하고, 투명하게 관리하여야 한다. 이제는 마을공동체를 넘어 경제공동체를 이룰 때가 온 것이다.

이 대표는 이것의 해답으로 같이살림 프로젝트를 통한 협동조합의 설립을 꼽았다.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마을기업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자부담 출자도 생각하고 있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아니다. 마을기업은 사람도 체계적으로 채용하여 지역주민 일자리 창출에도 이바지할 수 있고, 기업이 되면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지출하고 증빙하는 것도 더 투명하고 체계화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수익이 발생한다면 정말 하고 싶었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며 훨씬 보람 있고 지역사회 공동체에 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잖아요.

​경제공동체의 수익은 다시 마을로 환원된다. 유원홍은아파트사랑방의 협동조합 활동이 활기를 띠면, 당장 작은 일거리라도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일자리 창출까지, 이웃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 믿고 먹을 먹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퍼져나갈 것이다. 사랑방 대표의 열정과 희생이 같이살림 프로젝트를 통해 오랫동안 지속되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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