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4. 로컬에서 나비꿈을 꾸는 사람들, 로컬 이노베이터
[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4. 로컬에서 나비꿈을 꾸는 사람들, 로컬 이노베이터
  • 이진주
  • 승인 2018.11.1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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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4

로컬에서 나비꿈을 꾸는 사람들, 로컬 이노베이터

제주에 내려와 과학문화를 테마로 한 복합공간을 차린지 한 달이 되었다. 로컬에 뿌리내리겠다 결심을 한 뒤, 순전히 지역 이야기만 보고 들린다. 아기를 가지면 임산부만 보이고, 깁스를 하면 붕대 감은 사람만 보이듯,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꽂히면 일상이 온통 거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면서 나와 닮은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새삼 체득한다. 아이를 품은 에미에게 버스와 지하철 출퇴근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깨닫고,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불편하게 설계돼 있는지를 알게 된다. 지역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주에 입도한 것은 7년 전이다. 남편은 서귀포에 업장을 차리고, 아이들도 학교에 매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나는 묶인 데 없이 떠도는 몸이었다. 그래서 관광객만큼도 제주를 알지 못했다.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을 정도다. 제주국제학교가 있는 곶자왈 도립공원 근처에 터를 잡았으니 지도상으로는 서남쪽, 그래서 스스로를 <오즈의 마법사>와 <위키드>의 ‘서쪽마녀(엘파바)’로 명명하고, 내가 속한 영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로컬 이노베이터’ 친구들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페미질을 할 때는 페미 친구들이 세상 믿음직스럽더니, 이번에는 지역 활동가라고 하면 덮어놓고 와락 반가웠다. 시작은 안동이었다. <더 라이프스쿨>이라고 하는 성인들을 위한 대안학교 컨셉트의 2박 3일 여행 프로그램에 연사로 초대된 것이다. 컬리너리 투어를 포함해 100만원짜리 프로그램인데 연사료가 없었다. 조영신 SK브로드밴드 전략담당이나 문효은 <아트벤처스> 대표 등 다들 한 가락씩 하는 유명 연사 10여 명이, 귀한 시간을 통으로 헐어 연사료도 없이 봉사한다는 데 우선 호기심이 들었다. 또 누가 그런 시간과 비용을 식도락 여행에 쓰는지도 궁금했다. 공간 오픈 초기라 고양이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판에, 더구나 사회적 기업가라기보다는 페미니즘 운동가에 가까운 필자가, 보수적인 정신문화의 본산인 안동에 가서 뭘 할 수 있을지 영 불안했지만, 호기심이 의심보다 승했다. 
거기서 발견한 이가 안동 컬리너리 투어를 총괄한 안은금주 <빅팜컴퍼니> 대표였다. <6시 내고향> 등 지역 살림 프로그램의 노련한 리포터 출신으로 남보다 한 발 먼저 지역의 문제와 아름다움과 가치에 눈 뜬 그는, 아예 지역문화 컨설팅으로 업종을 전향했다. 안동이라는 지역은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란 질문이 아주 고급스럽고 은근한 방식으로 구현되는 곳이라고들 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뿌리를 찾고, 사돈의 팔촌이라도 피가 섞여야 겨우 슬쩍 돌아보는 곳을, 다른 동료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찾아다니며 일 년 동안 설득해 문을 열었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가 서애 류성룡 가문의 종가를 전세내 묵고 먹는 호사를 누렸다. 공교롭게도 류성룡 선생의 종손댁 종부 방을 배정받아 이틀을 지내면서, 이 기막힘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로봇과 페미를 다루는 내 강연을 듣겠다고, 고참 종부님 한 분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장을 하루 접고 찾아오셨다. 알고 보니 삼성전자 출신. 여기 종부들이 대개는 그렇다 했다. 모던한 신식 교육을 받고 최첨단 직장에 다니다가도 가문의 일을 이어 받으러들 내려온다는 거다. 동네에서는 숨 한 번 크게 못 쉬는 것 같아도 실제 집안을 돌리고 사업을 일으키는 주체는 종부들이었다. 가끔 시내에 나가 카페가 떠나가도록 수다도 떨고 인근 지역으로 쇼핑도 다닌다고 했다. 내가 알던 안동이 안동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종부가 종부가 아니었다. 와서 보고 듣고 만나지 못했으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속사정이었다. 안은금주 대표와 종부님들 같은 여성들이 로컬 이노베이션을 이끄는 장면을 목격하니 기뻤다. 역시 큰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주도한 전국 각지의 지역 혁신가 컨퍼런스에 찾아갔다. SNS에서야 제법 유명짜한 페미 셀럽이라고들 하지만, 로컬에서는 그저 뉴비에 불과했기에 일종의 선수등록을 하러 간 셈이었다. 국가적 차원의 혁신은 지지부진한 것 같아도, 적어도 로컬은 숨가쁘게 변해가고 있었다. 제주는 그 변화의 중심이었다. 10년 그림을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 변화의 그래프가 가속도를 그리며 꺾여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이며 투자자이기도 한 정지훈 교수의 분석대로, 살고 일하고 노는 것이 한 데 결합된 북유럽 모델 스타트업들이 공간과 사람과 문화를 중심으로 주도하는 혁신이, 지역의 어제와 오늘을 눈부신 속도로 바꿔가는 중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걸스로봇 1.0을 접고, 별곶 1.0.을 시작한 필자 역시도 어떠한 이론적 배경이나 참고문헌도 없었고, 다른 사례도 모르는 채 본능적으로 다시 한 번 로켓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걸스로봇 1.0에서 배운 것은 어떤 이념도 현실에 기반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변화에는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은 투자자나 후원자가 아니라 고객으로부터 나와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밀레니얼 여성들에게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실패의 근본원인이었다. 돈을 버는 데 죄책감을 느끼고 결벽증적으로 굴었던 것. 사회적 기업가도 기업가다. 운동으로서는 성공했지만 사업으로서는 실패한 걸스로봇 실험의 DNA는 별곶으로 이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살고 일하고 노는 공간을 중심으로, 남녀노소를 포괄해 유니버설하게, 기왕이면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이 함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데이터에 기반해, 젠더혁신을 이뤄나갈 것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받고, 스스로 자립하고, 구성원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면서, 운동으로서는 성공했지만 사업적으로는 실패하는 모순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도 10년 그림의 겨우 3년을 지났다. 기업의 형태로 운동을 하는 동료 혁신가들의 건투를 빈다. 제주에서 우주를 상상하고, 지역에서 나비꿈을 꾸는 로컬 이노베이터들, 별곶에서 한 번 모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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