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9

로봇과 여성: 소프트로봇계의 여자들

소프트로봇이라는 미래형 로봇이 있다. 모양과 용도가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지고 주로 금속으로 만들어져 딱딱한 기존의 로봇과 달리, 모양도 불규칙적이고 용도도 불명확하며 인공근육이나 피부 등 부드러운 소재를 쓰는 로봇이다. 그런 소프트로봇의 최첨단에 여성이 있다.

소프트로봇이라는 컨셉트 혹은 패러다임이 본격화된 것은 2009년 즈음의 일이다. 1950년대에 이미 최초의 인공근육이 개발되고, 1980년대에는 폴리머를 사용해 유연하고 늘어날 수 있게 만든 전기소자와 전극이 등장하는 등 기초적인 연구가 수행됐다. 그러다 2000년대 후반 영미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우수한 연구인력들이 다수 배출됐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로봇이냐” “도대체 어디다 쓰냐”는 비아냥과 비판을 들었지만, 십 년이 된 지금은 로봇계의 대세가 돼 가고 있다. 십 년 전부터 소프트로봇을 연구했다고 나서는 학자들도 꽤 많다. 이제 소프트로봇이라는 테마가 빠진 학술대회나 연구과제는 거의 없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페미니즘이나 젠더의식의 미래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처음엔 온갖 소리를 듣겠지만, 곧 그게 상식이 될 거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던 사람들도 원래부터 성평등주의자였던 것처럼 나설 거다. 그게 대세니까. 

지난 2009년, 4년간 121억원의 자금이 투입된 유럽의 옥토퍼스 IP(Octopus IP) 과제를 통해 문어 다리를 모사한 소프트로봇이 처음 등장했다. 이걸 만든 사람이 여성이 체칠리아 라스키(Cecilia Laschi) 이탈리아 SSSA 교수다. 그는 2016년 4월에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로보소프트>라는 이름으로 열린 첫 국제 학술대회와 사상 최초의 소프트로봇 경진대회 ‘로보소프트 그랜드 챌린지’를 주도했다. 내가 그를 ‘소프트로봇의 어머니’이자 ‘로보소프트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다.

같은 해부터 역시 4년 동안 115억이 투입된 미국 국방성 DARPA의 켐봇(Chembot) 프로젝트를 통해 MIT와 하버드대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그 해 2009년, 하버드대 역사상 최고액인 1300억원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위스 인스티튜트(Wyss Institute)에서 생체모사로봇 등 8개의 큰 주제들이 제안됐다. 조지 화이트사이드(George Whitesides), 롭 우드(Rob Wood), 코너 월시(Connor Walsh) 등 소프트로봇계 거장이라 불리는 연구자들이 참여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현재 활동하는 소프트로봇 연구자들의 상당수가 이 그룹 출신. 이 안팎에서 활약한 여성이 다니엘라 러스(Daniela Rus) MIT CSAIL 소장이다. 얼마 전 블랙홀의 이미지를 촬영한 프로젝트를 통해 큰 화제를 모은 케이티 보우먼(Katie Bouman) 칼텍 신임 교수가 최근까지 속해있던 연구실의 수장인 것. 러스 교수는 로봇계만이 아니라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의 대모이며, 남성들에게도 깊은 존경을 받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이 봄, 체칠리아 라스키 교수와 다니엘라 러스 교수를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조직위원으로 참여한 로보소프트2019 학술대회에서다. 이탈리아 첫 대회 이후, 두 번째 대회는 조규진 인간중심소프트로봇기술연구센터가 유치했다. 조 센터장은 첫 그랜드챌린지 우승팀 ‘스누맥스(SNUMAX)’를 이끌기도 했다. 3회 대회는 다시 여성인 레베카 크레이머 보티글리오(Rebecca Kramer-Bottiglio) 예일대 기계 및 재료공학과 교수가 맡는다. 

지난해 전미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회의에 참석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올해도 내년에도 여성이 이 세계 최대의 과학단체 회장을 맡았다. 그 해 기조연설자 전원이 여성인데, 남성은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 정도가 막판에 끼어들었다. 놀랍고 통쾌했다. SF가 아닌 현실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함께 다녀온 걸스로봇 멤버들이 큰 힘을 얻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구나. 한국은 아직 조금 남았구나.’ 미래를 한 발 먼저 만나고 온 느낌이었다.

소프트로봇계의 리더들 중에 워낙 쟁쟁한 여성들이 많아선지, 대회는 기조연설자 네 명의 성비를 2:2로 정확히 맞췄다. 보통의 경우에는 남성 연사들로 무대를 가득 채우거나, 걸스로봇 같은 단체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이 두려워서 여성 한둘을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는다. 그나마도 자기 분야에서 여성을 키워내지 못했거나, 발견하는 눈이 부족하거나, 단지 게을러서, 인접 분야나 영 동떨어진 곳에서 찾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계적 평등을 맞추려고 여성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성별이 여성인 대가들을 정성을 다해 모셔온 상황이었다. 이 거물들이 비행기에서 타고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직위원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기조연설을 마친 뒤, 그와 사진이라도 함께 찍고 질문이라도 직접 해보겠다고 길게 줄을 선 남성 연구자들을 보며, 덩달아 어깨가 쫙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걸스로봇이 센터와 공동기획하고 진행한 시티즌포럼 강연에서도 4:4로 성비를 정확히 맞췄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총연합회가 기획하고 출간한 <과학하는 여자들>의 대표주자 박문정 포스텍 교수, 곧 TED 메인 무대에 데뷔하는 제이미 백 스위스 EPFL 교수가 함께 했다. 한국SF협회의 부회장이며 아시아SF협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맡은 윤여경 작가도 참여했다. 여기에 구색을 맞추려고 끼워 넣은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50명의 시민들, 특히 딸을 데려온 부모들의 열기로 시티즌포럼은 대성공을 거뒀다. 백 교수에게 함께 <로봇걸스>를 쓰자고 설득한지 4년만에 오케이를 받아냈다. 마침내 시민과 할 이야기를 찾았다는 거다. 

이 여성 거물들의 동아일보/동아사이언스 단독 인터뷰를 주선하고, VIP디너부터 공항 센딩까지 밀착 마크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이번이 초면인 다니엘라 러스 교수는 자녀들을 키우는 이야기와 일-가정 양립에까지 이르는 귀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사적인 내용이라 공개하기는 어려워도 크게 위안이 됐다. 그는 “20년 연구 생활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연구들이 다 새끼 같아서 무엇 하나 잘난 것을 골라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직을 이끄는 것이 첫 번째고, 연구는 두 번째”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의 최신 연구는 IEEE가 선정하는 ‘비디오 프라이데이(Video Friday)’에 또 올라갔다. 무엇보다, 반짝거리는 주얼리와 핸드폰 장식을 좋아하고, 쫙 빠진 정장과 드레스들을 사심없이 칭찬해주는 점도 즐거웠다. “나도 패션에 더 신경 쓰고 싶어요!” 그는 말했다. 

“내가 필요하면 말해요. 언제든 도와줄게요!”

“케이티 보우먼 교수도 한국에 초청해요. (아, 제가요?) 그럼요, 못할 게 뭐에요?”

로봇계 여성 네트워크를 표방하며 걸스로봇을 만든지 4년만에, ‘캡틴 마블’ 못잖은 든든한 언니 지원군들을 잔뜩 얻었다. 풀메탈 바디 하드로봇이 아닌 전혀 다른 분야에서 길을 열고, 유연한 상상력을 발휘해 로봇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 이들이, 다름 아닌 여자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혁명은 언제나 변방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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