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 <1> 법률이 너무해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 2001)>란 옛날 영화가 있다.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하버드 로스쿨에 간 금발 미녀 엘 우즈 역을 맡아, 여성, 특히 여성의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을 특유의 지혜와 용기, 매력으로 돌파해 나가는 이야기다. <소셜리 뷰티풀>이라는 칼럼 명을 지을 때 영화의 원제에서 감각을 빌려왔다.

2년9개월 전, ‘로봇하는 여자들의 네트워크’를 표방하며, 이공계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지원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을 만들 때도 엘 우즈의 방식을 차용했다. 분홍색과 보라색을 기조로 한 레트로 팝 아트 디자인으로 다양한 파티와 캠페인을 벌였다. 스스로도 풍성하고 과장된 헤어스타일과 바비인형 같은 메이크업을 하며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이용하고, 그에 걸맞지 않은 실체를 드러낼 때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공계 밖의 여자들이 꾸밈노동을 강요 받는다면, 이공계의 여자들은 외모를 꾸미지 않도록 요구 받는다. 진지한 페미니스트에게도 그렇다. 걸스로봇은 이공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기대되지 않았던 모습으로 나타나 젠더 운동을 시작했던 게다. 한국형 <마치 포 사이언스>를 진행하면서, 걸스로봇의 친구들은 미스코리아 머리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세종문화회관 광장을 행진하며, #Pussy_Hat(여성인권 행진에서 사용된 분홍색 고양이 모자)과 #I_Look_Like_an_Engineer(여성 엔지니어의 외모를 재단하는 편견에 저항) 캠페인에 동참했다. 패리스 힐튼이나 엘 우즈처럼 타고난 것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이미지를 통해 무슨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는 잘 알았다.

당초 엘 우즈 전략의 유효기간은 3년으로 설정했다. 정확히 3년차의 끝을 달리는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 지형의 분화와 갈등, 거대한 페미니즘 백래시를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변화 역시 시작했다.

영화 속 엘 우즈의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졸업식 축사 장면을 드는 이들이 많다. 내게는 부적절한 제안을 하는 원로교수를 거부하며 권위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는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미투라는 이름이 새롭다고 해서, 현상마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의 여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정황의 미투 사건을 겪는다. 특히 믿고 따르던 인물과 관계에서 그런 일을 경험하면, 삶과 경력이 동시에 끝장나는 듯한 상황에 놓인다. 보통은 피해자 쪽이 그렇게 된다.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지옥에서 혼자 버티는 것처럼 괴로울 테지만, 있다고 해서 천국을 거닐 듯 수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성폭력을 저지른 한 명을 ‘법대로’ 혼내주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며, 강간 문화를 옹호하는 거대한 시스템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드러날 때쯤엔 온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버린다. 미투란 자기 밖의 적들만이 아니라 자기혐오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곁에서 함께 싸우는 이들마저 ‘멘탈’이 나간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왕년의 과학영재였던 내가 한 학기 만에 공대를 그만두고 그 뒤로 이십 년을 “문송합니다”로 살았던 이유도, 학교와 회사를 오래 다니지 못하고 옮겨 다닌 것도, 자잘한 미투들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위험해질만하면 피했다.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는 점에서 사소한 미투란 없을 것인데, 그나마 큰 미투를 겪지 않은 것만도 운이 좋았던 거겠지. 그래서 남녀를 불문하고 미투 문제는 본질적으로 권력 문제라는 데 동의하고, 본능적으로 과몰입하게 된다. 최근에 한 이공계 성폭력과 2차 가해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면서 조직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

안희정 판결 이후, 조용히 살던 여자들까지 각자의 ‘미투 모멘트’를 떠올리며 집단분노에 사로잡혔다. 17년 전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는 가능했던 일이 17년 뒤 한국에서는 여전히 안 되고 있다는 것이 슬프지만, 부당함을 참지 않게 된 여자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만큼 이제야말로 뭔가가 바뀌게 될 거란 희망도 품게 됐다.

오랜만에 인생영화를 다시 보면서, 당시의 게이 감수성이 지금만큼 치열하지 않았음에 새삼 놀랐다. 그 점은 반성해야 할 지점. 또한, 나이 마흔에 처음으로 “법을 공부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다. 전태일에게 법대 친구가 필요했듯 ‘페미’들에게도 페미 율사들이 필요하다. 의심하는 것이 버릇인 검사마저 피해자 김지은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제 우리에겐 더 많은 페미 변호사, 검사, 판사들이 필요하다. 더 다양한 배경과 전공과 젠더를 가진. 패션을 품고 법을 선택하다니, 엘 우즈는 역시나 현명한 금발이었다.

 

글.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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