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9~20일 온라인으로 '2020 젠더서밋 글로벌'이 열렸다. 주제는 ‘UN지속발전가능목표 달성을 위한 젠더혁신의 역할 점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포함한 연사 60명 이상, 세계 68개국에서 시청자가 몰렸다. 이들은 UN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채택 5년을 맞이해 점검 과정에서 성별 정보가 얼마나 고르게 반영됐는지 확인했다. SDGs 중 성평등 항목이 따로 있지만, 다른 목표들에도 성 인지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거다.

‘젠더혁신’이란 성·젠더 분석을 하나의 도구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혁신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이다.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과 젠더의 차이를 고려하겠다는 거다. 젠더‘를’ 혁신하는 게 아니라, 젠더‘로’ 혁신을 이룬다는 개념이다. 지난달 31일, 기자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혜숙 이화여대 수학과 명예교수는 그동안 각종 과학기술 분야 데이터에서 여성들이 소외돼왔다고 설명했다. 성별 보편성을 잃은 데이터는 결국 여성들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 이혜숙 교수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여성과총) 회장,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 소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등을 거쳐 현재 여성과총 부설 젠더혁신연구센터(GISTeR)에 수석연구원으로 있다.

이혜숙 젠더혁신연구센터 수석연구원. 사진=GISTeR
이혜숙 젠더혁신연구센터 수석연구원. 사진=GISTeR

국내에 젠더혁신 개념 들여온 장본인

“1997~2000년 사이에 미국에서 의약품 10종이 회수된 사례가 있어요.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이었죠. 그런데 미국 감사원에 의하면 그중 8종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치명적인 걸로 밝혀졌습니다. 동물실험 단계에서는 수컷을 활용하고, 임상실험 단계에서는 남성에게 더 많이 실험됐기 때문이죠.”

젠더혁신의 필요성을 부각하는 대표 사례다. 오랫동안 과학기술·의약 분야의 연구와 제품개발은 주로 남성들에 의해, 남성 (또는 수컷)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이 교수는 “여성들은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위험한 약을 복용하고, 의료비용까지 낭비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젠더혁신’이라는 용어는 2005년 론다 슈빙어 박사가 만들었다. 2009년 7월 스탠퍼드 대학에서 젠더혁신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2011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젠더를 통한 혁신’이라는 전문가 집단을 만들었다. 그해 3월에는 젠더, 과학 및 기술에 대한 UN 결의안이 통과됐다. 2012년 1월 미국국립과학재단(NSF, National Science Foundation)도 젠더 혁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교수는 국내에 젠더혁신 개념을 공식적으로 들여오는 데 기여했다. 그가 소장으로 있을 때, WISET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젠더를 통한 혁신’ 전문가 집단과 낸 보고서 <과학기술 젠더혁신-젠더 분석이 연구에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번역해 발간했다.

스탠포드 대학 젠더혁신 프로젝트팀과 협업으로 국내 사례 연구도 했다. 이 교수는 “생물학적 성은 물론, 지리·경제·교육 측면을 다루는 사회적 요소(젠더)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분야 연구에서 성·젠더 요소를 도입하면, 그냥 ‘사람’으로 뭉뚱그려 연구했을 때와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성별에 따라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독성 물질이 달랐습니다. 이런 건 생물학적 측면이고, 사회적 측면도 있습니다. 한창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터졌을 때, 피해를 본 건 여성과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가족 중에서 아버지는 주로 밖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집에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환경 요소가 반영된 일이었죠.”

GISTeR는 2016년 출범했다.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젠더혁신을 연구에 도입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고 시행 기반을 확충한다. 

GISTeR(Center for Gendered Innovations in Science and Technology Research) 홈페이지. 사진=홈페이지 캡처

"과학기술 신뢰성·책임성, 젠더혁신으로 다진다"

이 교수는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에도 힘썼다.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부터 여성 인력 양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과학기술분야에 훌륭한 제자들을 인력으로 추천했는데, ‘우리는 여자 안 뽑는다’라는 답을 들은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이 교수는 학생들의 이공계 분야 진출을 돕는 교내 WISE(Woman into Science and Engineering) 프로그램을 개발해 후배들을 이끌었다.

2012년에는 WISET에서 여성과학기술인의 경력복귀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경력이 단절된 여성 과학자들이 복귀할 때 적응하기 어려운 요소 중 하나가 ‘장비’라는 점에 착안했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실험 장비도 바뀐다. 초기 사업으로 39명의 여성과 좋은 장비를 가진 연구기관을 연결해 배우게 했다. 해당 사업은 규모가 계속 커져 작년에는 426명의 경력단절여성의 연구 현장 복귀를 지원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나 봐요. 평가를 잘 받았어요. 성공사례 홍보를 위해 수기를 요청했는데, 어떤 분은 시어머니가 글을 썼어요. 며느리가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서 안타까웠는데, 이 사업으로 다시 꿈을 이룬 걸 보는 게 너무 좋다고요.”

이 교수는 “여성 인력을 육성하는 데 한동안 노력했다면, 이제는 '이로운 과학'이 정책과 법·제도로 구현되도록 힘쓰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젠더혁신이 남성·여성을 넘어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이로운 과학'과 맞물린다고 본다. "특히 성·젠더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연구결과를 남녀 모두에 적용하는 건 신뢰성, 책임성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젠더혁신으로 이를 방지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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