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 일본의 도쿄에서 열린 제30차 국제협동조합연맹(ICA) 대회에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의 가치’라는 보고서가 제출됐다. 보고서는 당시 국제협동조합연맹의 회장이었던 마커스의 의뢰에 따라 스웨던 협동조합연구소 뵈크에 의해 작성됐다.

뵈크 보고서를 다시 꺼낸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마치 그때와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 사회적경제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대답을 조금 미루고 뵈크 보고서로 돌아오면, 뵈크의 질문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은 어떤 가치를 지켜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당시 협동조합인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수많은 협동조합의 파산과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영국 소비자협동조합의 지속적인 시장점유율 하락, 1970년대 네덜란드·벨기에 생협연합의 도산, 1983년 프랑스 브루타뉴생협의 도산, 1998년 조합원이 50만명 이나 되었던 도르트문트 생협의 도산 등 수 많은 협동조합들의 파산에 직면해 '협동조합은 어떻게 이 도전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내놓은 대답은 ‘협동조합 운동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다국적기업에 비한 경쟁력 부족이 아니라 협동조합이 조합원에 의한, 조합원을 위한 사업활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본질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뵈크의 문제 제기는 1995년 캐나다의 협동조합 학자였던 이안 맥퍼슨에 의해 정리되어 전세계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중 하나로 평가되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성명서’로 발전했다. 1995년 성명서는 모든 협동조합에 적용 가능한 규범이며 모든 종류의 협동조합들이 성장하고 협력하는데 필요한 공통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1995년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이 있고 25년이 지났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는 1995년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에서 찾을 수 있다./이미지=ICA

만약,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올해 12월 서울에서 국제협동조합연맹(ICA) 대회가 개최되었을 것이다. 2020년 제33차 세계협동조합 대회의 주제는 ‘협동조합 정체성의 심화’였다.

현재까지 세계협동조합 대회는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다행이다. 좀 더 차분히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운동을 돌아보고 다시 30년 후를 전망해 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질문으로 돌아와서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또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야 할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1995년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에서 찾는다.

다만, 1995년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을 좀 더 긴 역사적인 시각으로 바라 보길 권한다. 1995년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은 1980년 레이들로 보고서, 1988년 마커스 보고서, 1992년 뵈크 보고서, 1995년 이안 맥퍼슨 보고서로 이어진 일련의 결과물이다.

수 많은 협동조합들의 파산을 통해 지혜를 모으고 무엇이 협동조합을 협동조합 답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 오늘 지금 여기 협동조합들을 있게 한다.

1997년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은 체인스토어와의 대형화 경쟁을 포기한다.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은 하이퍼마켓을 지향하던 기존의 전략을 포기하고 중규모 상권을 공략하면서 지역별로 조합원들과 밀착도를 높이는 슈퍼마켓과 편의점 중심의 업태로 전환을 선언했다. 1985년 4.9%까지 떨어졌던 소비자협동조합의 시장 점유율이 2010년 7%까지 회복세를 보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암울하게 하던 때 미국의 신협, 스페인의 몬드라곤, 스위스의 생협 등은 경제적 위기에 더 강한 면모를 보이고 협동조합 조합원의 고용을 책임짐으로써 1995년 선언을 현실로 증명해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협동조합 선배들이 밝힌 보고서와 실천의 본질은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존경과 상호자조를 통해 경제적으로 진보해 가는 사람들의 역량에 대해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실패가 있었지만 협동조합 운동은 협동하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협동조합이 가지는 근본적 가치는 이런 신뢰에 기반하여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정치의 민주화가 경제의 민주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양극화로 귀결되고 ‘좌파 신자유주의’에 의해 좌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뉴딜이 진짜 뉴딜이 되기 위해서라도 시민들에 의한 자발적 경제활동인 협동조합 운동, 사회적경제가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다 해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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