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매년 3월 중순이면 농막부터 찾는다. 겨우내 묵은 때도 걷어내야 하지만 당장 3월 말, 감자를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마늘 이랑에서 보온용 볏단을 제거한다. 여기 저기 손톱만한 싹들이 인사를 한다. 작년에는 혹한으로 절반 가까이 동사하는 바람에 이번엔 좀 더 두텁게 덮어두었다. 비닐터널 아래서도 봄동, 상추, 시금치 들이 겨우내 죽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봄에 심어도 된다지만 겨울을 나면 더 달다는 얘기에 혹해 매년 가을에 파종을 하고 비닐터널로 보온을 해둔다. 2.모터는 또 고
1.“요리법 좀 알려주세요.”가끔 페이스북에 음식을 올리면 중년남자들이 가끔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본다. 어렵지 않아 보이니까 그대로 따라 해서 가족들에게 점수 좀 따고 싶다는 얘기다. 물론 마음이 가상해 자세히 알려주기는 한다. 하지만 종종 집에서 음식을 한다면 모를까, 그저 어쩌다 한 번 해볼 생각이라면 결과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요리법은 그저 머릿속 약도에 불과하다. 정작 약도를 들고 나서면 이것도 헷갈리고 저것도 이것 같아 목표지점에 도달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내가 이곳에 내놓는 요리법은 내
1.이라는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보내기 위해 소위 ‘관리비용’으로 2억 원, 3억 원이 기본이라는 얘기는 이런 저런 통로로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아들 어렸을 때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가? 공부를 하도 안하기에 야단을 쳤더니 울면서 그런 얘기를 한다. “그림, 만화를 그리고 싶은데, 공부를 하면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 불안하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아들을 앉혀놓고 설득을 해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2.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 교육문제를
1.오랜만에 텃밭에 나왔다. 겨울이야 특별히 할 일도 없지만 눈과 빙판으로 진입로도 막히는 통에 이맘때가 돼야 나들이가 가능하다. 나는 우선 겨우내 씌워둔 비닐터널을 걷어내고 시금치, 봄동, 상추에게 봄바람을 선물한다. 겨우내 얼마나 답답했을꼬. 마늘 밭에서 보온용 볏짚을 치우니 여기저기 꼬무락꼬무락 새싹들이 보인다. 텃밭을 가꾸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새싹들과 인사하는 때가. 2.아직 땅이 다 녹지 않았지만 3월 중순이면 감자를 심어야 하기에 장소를 골라 미리 퇴비를 뿌려둔다. 올해 첫 농사인 셈이다.
1.그야말로 가족들이 호들갑이다.강의를 떠난 지 2년이니 꽤 오랜만이다. 비록 1주일에 두 시간 정도이지만 강의안 작성하고 과제 만드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 강의를 시작할 때면 늘 이렇게 긴장하는 버릇이 있다. 진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은 기본이다.몇 년 전에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져 시작부터 5분간 멍하니 서있기도 했다. 트리플 A형의 슬픔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강의 얘기가 나오면 나보다도 가족이 더 호들갑이다. 사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번역가, 작가잖아. 젊은 편집자들 만나야 하니
1.강원도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복수초를 보았다. 아직 꽁꽁 언 겨울이건만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초면 어김없이 이렇게 노란 황금잔을 내민단다. 그래서인가? 얼음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고 해서 우리말 이름도 얼음새꽃이다. 복수초를 비롯한 봄꽃들의 생존전략은 신기하다. 꽃받침을 꽃잎으로 만들고 꽃잎은 암술처럼 바꾸어 꿀샘까지 만든다. 개미 등 곤충을 유혹해 꽃가루를 전하기 위해서라지만 내가 감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곳은 따뜻한 양지가 아니라 춥고 어두운 산의 북사면 계곡이다. 남쪽은 서두르지 않아
1.“아빠, 나 아침에 설사했어.”아빠들은 딸한테 약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자식인데도 아들이 배앓이를 하면 그냥 “한 끼 굶어, 인마!”하고 끝내면서도 딸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이상하게 내 배까지 아프다.대학 1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더니 쉽게 배앓이를 한다. 아무래도 먹는 것도 신통찮고 먹는 시간도 들쭉날쭉하기 때문이겠다. “아빠, 나 그냥 집에서 다닐까? 시간표 조절하면 지하철 직행 타고 오갈 수 있는데.” 그러라고 했다. 집에서 먹고 다니면야 제 속도, 내 속도 편하지 않겠는가. 정 들
1. 명절이 되면 난 오히려 부엌에서 자유롭다. 모셔야 할 조상도 없고 찾아갈 고향도 없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내 임무는 포천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뵙는 것만으로 끝이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전을 부친다든지 설음식을 만드는 것도 옛날 얘기다. 먹고사는 게 더 빠듯해진 탓인가, 언제부턴가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바쁘다. 한가한 틈에 책을 한 권 읽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서령 작가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란 책이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다. 음식 얘기, 조리법 얘기인
1. 이곳에서야 주로 음식 얘기를 하지만 내 직업은 소설번역가다. 15년 이상 90권 가까이 번역을 하고 7년쯤 강의를 하고 얼마 전에는 번역 입문서 도 출간했으니 나름 중견번역가 반열에는 들었을 것 같다. “번역기가 좋아지면 번역가가 필요 없어질 텐데 그럼 어떻게 합니까?” 기계번역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요즘 심심찮게 듣는 질문이다. 번역기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야 이해는 가지만 내가 우려할 수준의 번역기는 100년, 200년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이전에
1.동생을 데리고 가출한 때가 1976년 봄, 내가 열일곱 살이었다.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며 괴롭히는 새엄마의 횡포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후 곧바로 서울 구로동 형 집에 가서 몇 개월 지내다가 그 후 진주, 부산을 떠돌며 금은세공, 인쇄 등의 일을 배웠다. 2.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4년 후였다. 서울 북아현동으로 이사와 신촌로타리에서 인쇄 일을 하던 때였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아버지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았는지 동두천에서 신촌 인쇄소까지 찾아왔다. 인쇄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에
1.지난 아내의 생일. 새벽에 24시간 마트에 나가 굴을 사와, 굴미역국을 만들었다. 아내는 일어나 미역국을 먹고 출근했다. 음식을 시작하고 15년 이상 한 번도 아내의 생일에 미역국을 걸러본 적은 없다. 쇠고기미역국, 황태미역국도 해봤지만, 아내 입맛에는 굴미역국이 제일 맞는단다. 겨울에 태어났으니 굴미역국이 제격이기도 하다. 2.생일에 아내를 위해 해줄 건 아침 미역국밖에 없다. 결혼 초기 먹기 살기 어렵다는 핑계로 생일선물을 생략하기로 합의한 터라, 지금껏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해본 적은 없다.
1.“형아, 저 두꺼운 프린트 묶음이 뭔지 알겠어?”“응? 아니 모르겠는데?”“방탄소년단 노래들 가사를 모두 뽑아서 인쇄했어요. 무슨 얘기인지 잘 안 들려서.”아내는 요즘 남자 아이돌 그룹에 푹 빠져 있다. 이따금 유투브까지 뒤지며 동영상을 찾아보고 방탄소년단이 나온다고 하니 지난 연말 가요프로그램도 꼭꼭 챙겨서 봤다. 식사를 하면서 화제의 절반은 방탄소년단이다. 덕분에 나도 이런저런 아이돌 그룹의 노래와 이름에 익숙해지고 있다. 방탄소년단, 엑소, 위너, 트와이스……2.아주 아주 옛날, 아내는 조용필한테 빠져
23. 가지탕수육과 새해 다짐 1.2019년은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되는 해다. 예전 세대라면 환갑이니 회갑이니 호들갑을 부릴 나이건만 난 이상하게도 심드렁하기만 하다. 나이 예순?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심정? 오히려 지금 생각해보면 마흔이 되던 해가 더 정신적으로 충격이었던 것 같다……세상에 내가 벌써 이렇게 늙다니!2.더 이상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나이가 된 걸까? 사실, 이 나이가 되면 나이가 아니라 건강이 문제다. 오는 나이는 있어도 가는 나이는 없다지 않는가. 바람이라면, 늙는 건 상관없는데 병치레에 시달리며 지내고 싶지는
22. 돼지고기 불고기와 특별한 전화1.따르릉~“여보세요?”“아, 영학이니? 나 병학이야.”신문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아주 특별한 전화를 받았다. 군 시절 함께 마산 통합병원에서 폐결핵 치료를 받던 고참 형님이다. 외가가 부자라며 내가 검정고시, 학력고사 시험 준비를 할 때는 독서실을 차려 공짜로 쓰게 하시고 공부는 체력 싸움이라며 틈틈이 고깃집에 데려가곤 했다. 대학원 가겠다고 하니까 등록금을 모두 내주시기도 하셨는데. 결혼 후 정신없이 살면서 연락도 끊기고 생사를 알 길도 없었건만 인터뷰 기사를 보고 신문사, 출판사에 전화해 내
21.크리스마스 통오리오븐구이와 지도교수님1.“영학이 널 보면 정말 종교인 같아.”“예? 선생님, 전 종교가 없습니다.”선생님은 물리적인 종교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서 늘 뭔가를 갈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고 하셨다. 그랬던가? 대학원 시절, 가난과 싸우며 허겁지겁 수업을 쫓아다니는 꼴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2.“사람이 제일 다이내믹할 때가 언제인줄 알아? 영학이가 잘 알겠다. 네 얘기니까.” 수업시간에 느닷없이 이런 질문도 하셨다. 난 얼떨결에 “좋아하는 일을 할 때”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정정해주셨다.
20. 소고기무국과 술탐1.건강한 편이다. 어릴 때 결핵에 세 번이나 걸리는 등, 큰 병치레를 자주 한 데 비하면 요즘은 잔병도 잘 걸리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직업이기는 해도 매주 텃밭에 나가 땀을 흘리고 산행을 즐긴 덕이리라. 얼마 전 건강검진도 그럭저럭 선방이라고 자평한다. 대개는 정상인데 다만 혈압이 조금 높고 간수치가 살짝 정상치를 넘어섰다. 이제는 아랫배도 눈에 띄게 부풀었다.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나 아무래도 그놈의 식탐과 술탐이 문제다. 2.내가 만든 밥이 맛있고 내가 빚은 술이 맛있으니 어찌 하랴.
19. 단호박죽과 책임감1.'저자가 되면 책임을 져야 해요.'출판사 대표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북토크, 북콘서트, 강연, 방송 출연 등, 책 판매를 위해 저자도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요구다. 적어도 마음만은 그렇다. 2.지난번에 부끄러운 책을 하나 내고 나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강연, 인터뷰……그 정도는 나도 불만이 없다. 문제는 언제나 방송출연이다. 방송일정만 나오면 그때부터 머릿속이 하얘지고 식욕이 없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겠으니 말이다.3.결국 가까스로 두 번의 라디오방송을 치르면서 진행
18. 1. 텃밭을 하면서 김치 담그는 일이 잦아졌다. 이번 가을만 해도 동치미, 총각김치, 민들레김치 등, 밭에서 나오는 재료들을 어떻게든 소화해야 했다.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소들이다. 그냥 내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2. 김장은 처가에 모여 함께 한다. 우리, 장모님, 처제 둘, 처남. 가평 텃밭에서 무와 배추를 실어가면 그때부터 1박 2일의 장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첫 날은 배추를 절이고, 속에 들어갈 재료들을 씻고 자르고 채를 썰어두고, 다음날은 새벽부터 배추를 씻고 속을 버무려
17. 1.소셜미디어에서지만 요즘 나를 ‘사부’로 삼겠다는 중년남성들이 몇 분 있다. 물론 농담처럼 하는 얘기지만 실제로도 종종 자기가 만든 음식을 소셜에 올리고 자랑스럽게 요리법을 공개하기도 한다.아니, ‘사부로 삼을 생각’은 없다 해도 요리에 도전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에 요리를 했던 남자들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예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2.얼마 전 만난 선배는 안식년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요리학원에 등록했는데 요리가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
16. 1.식탐도 술탐도 많다. 하루 일이 끝나고 저녁 시간만 되면 슬슬 술 한잔 생각이 나는데 직접 음식을 만드는 탓에 나도 모르게(?) 저녁 반찬은 술안주 비슷하게 되고 만다. 김치 찜, 감자탕, 닭발, 찜닭 등등. . . 결국 밥도 술도 과하기 일쑤. 2.문제는 뱃살이다. 살이 안찌는 편이건만 조금씩 조금씩 뱃살이 늘어난 것이다. 지금껏 별로 개의치 않던 아내도 내 나이가 60가까이 되자, 서서히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어휴, 이 뱃살 어쩔겨!” “건강검진 가면 상복부 초음파 신청해요.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