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모 국회의원이 청문회에서 비혼의 여성장관 후보자에게 “출산의 의무부터 다하라”는 황당한 주문을 했단다. 사실 그 국회의원이 특히 가부장적이어서 비난을 받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 생각엔 그런 식의 남성중심적 가치관, 관점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결혼하면 여성은 당연하다는 듯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만 그 노고마저 경력단절, 부엌데기 같은 언어로 폄훼한다.요리와 육아, 어느 쪽이나 오랜 경험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전문영역이건만 이 사회는 아무 가치 없는 허드렛일 정도로
1.남들은 명절 준비다, 명절 증후군이다, 명절 앞뒤로 몸과 마음이 바쁘다지만, 우리 형제 가족은 그런 기분과 거리가 멀다. 예전에는 형님 댁에 모여 윷놀이도 하고 트럼프 놀이도 하고 고궁도 산책했는데 10여 년 전 아버지 돌아가신 후 교통이 뜸해지더니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하신 뒤로는 지방요양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벅차다. 다들 먹고사는 게 바쁜 탓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다는 듯 차례도 사라졌다. 시장을 보고 전을 붙이고 절을 하는 등의 번거로운 행사는, 가톨릭 신자인 형이 성당 미사로 대신
1.아내와 딸은 방학 동안 복싱을 배우러 다녔다. 건강과 다이어트가 목적이라지만 얘기를 들어보면 운동이라기보다는 춤을 추다 돌아오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름도 뮤직복싱이다. 모녀가 나란히 체육관에 다녀오는 모습이 보기 좋기는 했다. 단 불똥이 내게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만이다. 두 사람은 기껏 춤추러 다니면서 방학동안 나한테 유세를 부렸다. 아내는 툭하면 내 배를 노려보았고 딸은 아예 배를 쓰다듬으며 이 배 어쩔겨, 이 배 어쩔겨? 놀려댔다. 올해 바쁘다는 핑계로 산행을 게을리 한 잘못이 있기는 하다. 매주 기껏
1.매년 8월 20일 경이면 김장용 배추와 무, 알타리무, 쪽파들을 심는다. 농사는 한주 전 농작물 심을 자리를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6월 말 감자를 수확한 곳에 심어야 하는데 두 달이 지나니 잡초가 무성하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 차가운 지하수를 뒤집어 써가며 몇 시간 풀을 제거하니 거의 실신 지경이다. 그 위에 다시 유황과 퇴비를 뿌려둔다. 퇴비에서 가스가 발생하면 생장에 문제가 있기에 적어도 한 주 정도는 미리 뿌려두는 게 좋다. 다음 주에도 할 일은 태산이다. 일단 이랑을 만들어야 한다. 삽으로 고
1.1984년 KBS 이라는 아침방송에 출연하라는 얘기가 있었다. 당시 검정고시 합격자 몇을 불러 사연을 듣는 취지라고 들었으나 난 고민 끝에 포기했다. 가난을 과장, 포장해 시청자들의 동정을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카메라 공포증이 더 컸다. TV 방송국에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리고 하늘이 아득했다. 몇 해 전 를 출간했을 때도 몇 차례 연락이 왔으나 그때도 난 딱 잘라 거절해야 했다. “TV는 무서워서 못나갑니다.” 사실이다. 라
1.내 또래는 SNS에 약하다. 카카오톡으로 누군가의 링크를 수동적으로 받아본다면 모를까 적극적 소통이 필요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은 아무래도 거북살스러울 것이다. 내가 참여하는 SNS는 페이스북이 유일하지만 활동이 활발한 편은 아니라 페이스북만으로도 버겁게 느낄 때가 있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습관적으로 페이스북 앱을 클릭하는데 그러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기 때문이다. 2.그래도 난 제자들에게, 소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SNS, 특히 페이스북을 권한다.
1.프라이팬을 '또' 사들였다. 이번엔 스테인리스.프라이팬 코팅이 벗겨진 게 얼마 전, 고민하다가 헌 팬을 모두 내버리고 스테인리스 제품을 한 세트 구입했다. 다루기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반영구적이라고 하니 매번 교체하는 것보다 경제적일 듯싶었다(핑계일까?). 인터넷을 뒤져 다루는 요령도 배웠다. 약불에 가열하되 물방울이 도르르 굴러다닐 정도여야 한다. 그리고 식용유를 두른 뒤 잠깐 기다렸다가 사용하라. 그 방법으로 해본 결과 계란후라이도 눌어붙지 않게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2.문제는 오
1.- 그때는 왜 그렇게 심하게 매를 드셨어요? 우리를 부랑아로 여기셨나요? 개교 목적이 교육보다는 교화에 있었던 건 아닌가요?얼마 전, 오랜만에 은사님을 뵙고 그간 궁금했던 일을 물어보았다. 1973년 입학했으니 벌써 45~46년 전 얘기다. 재건중학교는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한 이른바 무자격 교육기관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무취학 아이들을 수용한다는 명분하에 전국에서도 꽤 많은 지역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다닌 학교는 그중에서도 유독 가혹하게 학생들을 다루었다. 등교하
1.“당신을 보면 정말 신기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거든.” 며칠 전 동갑내기 지인을 만났는데 그런 얘기를 한다. 아내를 대하는 내 모습에 대한 얘기다. 아내를 대하는 방식이라면 그동안 책과 신문매체에 실렸기에 다들 잘 알고 있지만, 동세대 남성들에게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아내, 가족을 위해 정성껏 식사를 마련한다.” “아내, 가족이 편안하도록 집안 분위기를 유지한다.” “집안일 모두에서 아내를 해방시켜준다.” “아내가 원하는 바는 뭐든 따르기 위해
1.장마철이다. 난 비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주룩주룩 큰비가 좋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내다보는 것도 좋아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것도 좋아한다. 요즘 같으면 농막 데크에 앉아, 후두둑 하염없이 차양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저 앞, 벼 익어가는 논에서 백로, 왜가리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싶다. 장마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홍수였다. 경기도 양주군에 살던 시절 큰 비가 내려, 신천이 넘치고 집과 소와 돼지가 떠내려갔다. 그리고 옆집 사람이 물에 빠져죽었다. 물에 퉁퉁 부은 시체를 본 것도 그
1.이맘때면 텃밭은 늘 잡초와 전쟁터가 된다. 하루 뙤약볕에 작물 크는 모습도 눈에 보일 정도라지만 잡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농막에 도착하면 지난해 예초기로 정리한 곳에 벌써 개망초와 달맞이꽃이 무릎 높이까지 자라니 오죽하겠는가. 우리나라 밭에서 자라는 잡초는 약 400종이라고 한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밭에도 쑥, 개망초, 애기똥풀, 환삼덩굴, 바랭이 등 족히 40~50종은 될 것 같다. 2.제거하지 않으면 수확에 영향이 있을 뿐 아니라 텃밭이 정글처럼 변할 테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렇
1.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은 신혼여행이다. 지금껏 외국에 나가본 것도 세 번에 불과하다. 형편이 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별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60 나이에 해외문물을 익혀 입신양명할 일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자연풍광이라면 우리나라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별 의미도 없는데 여행 준비하고 출국 수속하는 일들이 귀찮을 따름이다. 아비가 이 모양이라서인지, 아이들이 벌써 대학생이건만 지금껏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딸이 방학을 맞이해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가겠단다. 그동안
1.“나 정도면 와이프한테 잘해주는 거 아냐?” 내가 오래 전부터 밥상을 차린다는 건 이제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오랜만에 만나 술 한 잔을 하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사느냐?”에서 시작해, “잘했다. 불쌍한 여자들, 위해주면서 살아야지”까지 반응도 다양하다. 그러다가 한 놈이 얼큰하게 취하더니 아내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는다. “이 정도면 와이프한테 잘해주는 거 아냐?” 이것도 해줘, 저것도 해줘, 그런데 웬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단다. 2.그놈은 억울할지 몰라도, 사실 부부의 불화는
1.- 형, 이번 연휴에는 우리도 남들처럼 해외여행 가볼까?- 좋지, 까짓거 어디든 갑시다. 아내와 이런 대화를 자주 한다. 대화뿐 아니라 그 후 얼마간 아내는 열심히 여행상품을 뒤지고 여행지까지 결정한다. 정작 여행계획이 무산되는 건 결제 단계다. - 아무래도 우리 형편엔 어렵겠어. 이것저것 부가경비 따지니까 지출이 장난 아니네. 그냥 강원도나 다녀올까 봐요.2.결혼한 지 25년이 지났건만 부부 동반 해외여행이라고는 5년 전 상해 패키지여행이 전부인 이유도 그래서다. 생일이든 기념일이든 늘 계획만 거창
1.농막, 주말 농장, 세컨드하우스. 아무래도 중년남자의 다섯 번째 로망쯤 되는 듯하다. 평일에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주말이면 자동차를 몰고 교외에 나가 하루 느긋하게 텃밭을 가꾸거나 잔디를 손질한다. 커피나 맥주 한 잔 하며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독서를 할 수도 있겠다. 여건만 맞는다면 낚시를 하거나 뱃놀이도 가능할까?사실 이런 꿈은 말 그대로 로망에 가깝다. 막상 농막이든 세컨드하우스든 마련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늘 문제가 생긴다. 주말 교통체증에 발이 묶이기도 하고, 이상하게 휴일 약속, 행사도 많
1.얼마 전, 성 평등을 주제로 토크쇼를 했다. 30명 가까운 참가자가 모두 여성이고 진행자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난 주로 밥상을 차리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직업인지 얘기했다. 집에서 음식을 담당하면 부엌데기라고 멸시하는 사회분위기, 아무래도 남성 중심의 사고가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밖에 나가서 직장생활을 하면 자아실현, 집에서 밥상을 차리면 경력단절. 가족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정성껏 상을 차리면서도 주부들의 자존감이 떨어지는 이유다.2.식단을 짜고 재료를 구입하고 조리를
1.며칠 후면 결혼기념일이다. 생일이든, 결혼기념일이든 특별히 챙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선물은 서로 해본 적이 없고 행사라봐야 가족과 가볍게 외식을 하는 정도다. 결혼 초 어려운 형편에 현실적으로 살다 보니 습관이 그렇게 굳어졌지만 아내는 지금껏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왜 아내가 나와 결혼할 생각을 했는지 그것부터 미스터리다. 나이는 일곱 살이나 많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데다 방을 구할 돈조차 없는 빈털터리. 장모님조차 식겁하며 고개를 저었다지 않는가. 나라도 내 딸이 나 같은 놈과
1.“아무래도 여기선 김장이 어렵겠지?”장모님이 불쑥 이렇게 말씀하신다. 매년 처가 마당에 처남, 처제 부부가 모여 함께 김장을 했는데 얼마 전 마당 없는 빌라로 장모님이 이사를 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좁은 빌라에서 100포기 김장을 하기엔 무리다. “예, 이제 각자 집에서 해야겠죠. 저도 예전처럼 김장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텃밭에서 열무, 얼갈이 심어서 그때그때 김치 만들면 되거든요.” “그래, 그게 낫겠어. 나도 두 통만 있으면 1년 충분히 먹어.”“예, 장모님 김장은 제가 해서 드릴게요.”2.결혼
1.1년 농사 중 이맘때가 제일 바쁘다. 본격적으로 텃밭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밭을 마련하려면 4월 중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먼저 작물 종류를 정하고 그에 맞게 밭을 구획한 다음, 퇴비를 뿌려준다. 완전히 부숙하지 않으면 가스가 발생해 식물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에 이랑을 만들고 비닐로 덮어주는 일은(멀칭) 7~10일 이후에 하는 게 좋다.4인 가족이 한 계절 신선한 채소를 즐길 목적이라면 다섯 평 정도면 충분하다. 대다수 도시 텃밭이 그런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땅은 아낌없
1.“너, 생일에 뭐 먹고 싶냐”“아빠가 해주는 거.”“외식하고 싶지 않아”“아냐, 난 아빠 요리가 좋아. 집에서 밥 먹을 새도 별로 없잖아. 돈도 아끼고.”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예전보다는 풍족한 듯하지만, 그래도 돈 벌기 쉽지 않다는 정도는 깨달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수업 따라가랴, 아르바이트 하랴, 일주일 절반은 밖에서 자고 절반은 밤늦게나 돌아오니, 제대로 밥해 먹일 기회도 없었다. 생일에도 밤을 새워야 한다고 해서 모처럼 쉬는 날을 따로 잡아 조촐하게 음식파티를 하기로 했다. 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