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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녀왔습니다.”

교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아이가 꾸벅 인사를 한다. 잠시 후 하얀 태권도 도복에 파마기로 머리가 곱슬곱슬한 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온다. 

“준성아, 너 머리띠 좀 해라. 삼촌이 조금 있다가 머리 묶어줄게.”

샤워부터 하겠다며 긴 머리를 휘날리며 욕실로 달려가는 아이의 양말 색은 진한 핑크빛으로 남다른 패션 감각을 뽐냈다. 새터민 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 ‘가족’의 일상이다.

김태훈 대표와 아이들.  그룹홈 '가족'은 서울 성북구 2층짜리 단독 주택에 둥지를 틀었다. 부엌과 거실, 6개의 방 그리고 작은 마당이 딸려있다. 
김태훈 대표와 아이들.  그룹홈 '가족'은 서울 성북구 2층짜리 단독 주택에 둥지를 틀었다. 부엌과 거실, 6개의 방 그리고 작은 마당이 딸려있다. 

이곳에는 11명의 새터민 아이들과 40대 총각엄마 김태훈 대표가 산다. 아이들은 김 대표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가족’의 첫인상은 ‘그룹홈’이란 앞 글자를 떼어놓고 보면 그저 애들이 많은 다둥이 가정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다. 김 대표는 그런 ‘특별함’이 없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다른 애들이랑 똑같아요. 게임 좋아하고 공부하긴 싫어하고.. 부모 없이 자랐지만 애들 얼굴이 참 밝아요. 그늘도 없고 눈치도 안 봐요. 들어온 시기나 나이가 제각각이어도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걸 보면서 애들은 이곳을 ‘시설’이 아니라 진짜 ‘집’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꼴찌 해도 괜찮아

많은 새터민 가정의 부모들이 ‘왕따’나 ‘학력 결손’을 걱정해 자녀를 대안학교로 보내지만 그는 일반학교를 고집한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 수는 3만 3천여 명. 이 가운데 탈북청소년은 약 2500 명으로 추산된다.

생일 축하파티. 김 대표는 아이들의 생일상을 손수 차려준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아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고 전했다. 
생일 축하파티. 김 대표는 아이들의 생일상을 손수 차려준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아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고 전했다. 

“동기동창의 소중함이 있잖아요. 자기 고향 친구들끼리만 어울려 그들만의 리그로 살아가선 안돼요. 전 애들한테 공부 좀 못해도, 꼴찌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대신 학교는 졸업해라, 그리고 친구들 잘 사귀라는 말은 꼭 해줍니다. 다행히 애들이 즐겁게 학교를 다녀요.”

그는 “탈북 과정이 길어지면서 나이는 찼지만 학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보통 2~3학년을 낮춰 보낸다” 라고 덧붙였다.

리더십이 있는 아이들은 전교 학생회장도 하고 예체능이 능한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며 재능을 키워간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잘 치는 주영이는 서울시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1년에 2번 무대에 선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은 미대 진학을 꿈꾼다. 

미술대학을 나온 김 대표는 그림에 소질있는 아이들을 발굴해 그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기업의 사회공헌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한다. 아이들과 미술전시회도 열었고 아이들의 글과 삽화가 들어간 문집 '밸이 난다(짜증난다는 뜻의 북한말)"도 출간했다.
미술대학을 나온 김 대표는 그림에 소질있는 아이들을 발굴해 그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기업의 사회공헌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한다. 아이들과 미술전시회도 열었고 아이들의 글과 삽화가 들어간 문집 '밸이 난다(짜증난다는 뜻의 북한말)"도 출간했다.
바이올린을 잘 켜는 주영이는 서울시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이올린을 잘 켜는 주영이는 서울시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같은 그룹홈의 다양한 교육비는 후원금과 더불어 김 대표가 기업들의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찾아내 응모과정을 거쳐 해결한다. 

 

하루 만이 어느새 15년이 됐다

김 대표와 함께 사는 아이들은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보살피기 어려운 아이들이다. 그가 처음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하나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부터다.

“하나원을 퇴소한 한 모자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당시 엄마는 돈 벌러 지방에 갔고 아이 혼자 컴컴한 방에서 텔레비전을 켠 채로 잠이 들어 있었죠. 끼니는 잘 챙겨 먹나 싶어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반찬은 손도 안 댔고 밥솥에 밥은 말라비틀어져 있었어요. 부리나케 장을 봐와 계란과 소시지에 된장국을 끓였어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그 친구가 ‘오늘 자고 가면 안 되느냐’고 묻더군요. 차마 발이 안 떨어져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하루가 오늘까지 이어진 겁니다.”

그룹홈 ‘가족’의 시작점이 된 만남의 주인공 염하룡 씨. (좌) 그는 고교시절 전국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뒤 세계 봉사대회 한국 대표로 선발돼 미국 워싱턴 DC도 다녀왔다.  특전으로 교육방송(EBS) 교재의 표지 모델로도 뽑혔다.
그룹홈 ‘가족’의 시작점이 된 만남의 주인공 염하룡 씨. (좌) 그는 고교시절 전국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뒤 세계 봉사대회 한국 대표로 선발돼 미국 워싱턴 DC도 다녀왔다.  특전으로 교육방송(EBS) 교재의 표지 모델로도 뽑혔다.

그는 당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그냥 자신이 아니면 이 애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일렁였다” 라고 설명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하룡이는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이다. 

당시 이직을 준비 중이던 김 대표는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에 학원 강사로 틈틈이 일하며 하룡이를 돌봤다. 김 대표의 이야기가 북한이탈주민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알음알음 소개로 맡게 된 아이들은 금세 4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2009년 이 길로 들어서기로 마음먹고 ‘가족’이란 이름의 그룹홈을 시작했다. 현재 11명이 함께 살고 있고 성인이 돼 이곳을 떠난 아이도 10명에 이른다.

“큰 성공을 거둔 아이들은 없지만 다들 자기 인생을 찾아 살고 있어요. 간호사, 자영업자, 농부 그리고 알바를 뛰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까지.. 이 가운데 2명은 강원도 철원에 문을 연 카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최북단 철원에 카페를 열다

김 대표는 2년 전 철원에 카페 ‘오픈 더 문’을 열었다. 그동안 그가 진행해온 통일 공감대 형성과 북한이탈주민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나온 결과물이다. 

철원 카페 '오픈 더 문' 의 야경. 이탈리안식 브런치와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음료를 즐길 수 있다.
철원 카페 '오픈 더 문' 의 야경. 이탈리안식 브런치와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음료를 즐길 수 있다.

“저와 함께 살던 친구 2명이 이 카페에서 일하면서 철원 주민이 됐어요. 카페는 자립을 지원하고 일자리도 창출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카페 바로 앞에 철원평야가 보이고 좀 더 가면 민통선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최북단에서 즐기는 커피가 주는 상징성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카페는 새터민 청년들이 지역주민들과 소통해가며 자연스럽게 정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철원·연천·포천의 인근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고 주말이면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통일 운동에 관심 있는 손님들이 방문하곤 한다.

 

생애 처음으로 나눈 경험들..

그룹홈 ‘가족’의 아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생애 처음 해본 것들이 많다. 처음으로 받아 본 생일상, 바다 구경, 크리스마스, 비행기 탑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대 출신인 김 대표는 아이들과 함께 미술전도 열고 자신들의 일상을 담은 책도 발간했다. 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찍었다. 이 가운데 아이들이 서로 우의를 다지고 폭풍 성장하게 된 계기는 태국의 치앙라이로 떠난 봉사활동 이후부터다. 

치앙라이의 아카족이 사는 고산지대는 태국 인구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외딴 지역이다. 그 부락에 봉사자들이 선생님이 돼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학교가 있다.

태국 소수민족이 사는 치앙라이로 봉사활동을 떠난 '가족' 식구들. 김 대표는 "한국에선 탈북자들이 소수민"이라면서 "같은 입장에서 소수민족인 아카족을 도와주자는 취지로 아이들에게 봉사를 권했다" 라고 말했다.
태국 소수민족이 사는 치앙라이로 봉사활동을 떠난 '가족' 식구들. 김 대표는 "한국에선 탈북자들이 소수민"이라면서 "같은 입장에서 소수민족인 아카족을 도와주자는 취지로 아이들에게 봉사를 권했다" 라고 말했다.

 “치앙라이는 탈북 경로 중 하나인 메콩강과 가깝습니다.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는 공산국가라 붙잡히면 북송되기 때문에 이 강을 건너야 비로소 한국에 올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마지막 관문인 셈이죠. 봉사지역으로 치앙라이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이젠 안전한 신분으로 그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여유와 자유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

그는 “아이들이 봉사 후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우의가 돈독해졌다”라고 설명했다.

 

통일보다 사회 통합이 우선 

아이들은 추석과 설이면 다 함께 철원에 문을 연 카페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차례를 지낸다.

“애들은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잘 몰라요. 정치 수용소로 끌려간 부모들의 경우 생사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전 애들한테 자립해 혼자 살더라도 부모님 차례상은 꼭 차려드리라고 말합니다. 와서 잡숫고 가는 게 아닐지라도 한 번쯤 이때라도 부모님을 생각해보자는 뜻이죠.”

추석날 고향인 북녘땅을 바라보며 차례를 지내는 '가족' 식구들.
추석날 고향인 북녘땅을 바라보며 차례를 지내는 '가족' 식구들.

김 대표에게 통일이 되면 가장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통일이 되면 애들이랑 각자 살았던 마을에 다 같이 가기로 했어요. 혹자는 통일이 되면 국방비 예산을 아낄 수 있다거나 북한의 풍부한 광물과 우리 기술이 만나 잘 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이 가슴에 와닿으시나요? 전 가족을 만나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더 간절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는 “통일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라면서 “통일에 앞서 3만 명에 이르는 북한이탈주민과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들 사이에 통합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적대시하거나 얕잡보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이들을 정치적인 색깔로 바라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김 대표는 사회통합의 첫 단추로 편견 없는 세상을 위해 그룹홈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를 시작했다. 

총각엄마 TV 브이로그의 한 장면. 영국의 BBC는 그룹홈 가족의 아이들과 김태훈 대표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다.
총각엄마 TV 브이로그의 한 장면. 영국의 BBC는 그룹홈 가족의 아이들과 김태훈 대표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다.

“코로나19로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만 있다 보니 한 번 시도해봤어요. 과연 저 집은 어떻게 살까 우리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이 찾아주셔서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통일공감대나 북한이탈주민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총각엄마 TV 많이 찾아와주세요.”

사진제공 = 김태훈 그룹홈 가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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