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운넷 = 이로운관리자 에디터

사회적경제미디어 이로운넷과 지방분권전국회의는 올 한 해 동안 '지방분권'에 관한 담론들을 이슈화하는 데 서로의 역량을 모으기로 하고 공동기획으로 <지방분권으로 지역소멸과 인구절벽을 막자>라는 기획 특집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김정희 부산대학교 경제통상연구원 연구교수
김정희 부산대학교 경제통상연구원 연구교수

김정희 부산대학교 경제통상연구원 연구교수

  ‘최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경쟁적 민주주의 모델’은 민주주의가 시민의 의지에 의해 작동된다고 믿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단지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투쟁에 불과하며, 민주주의의 유용한 목적은 경쟁하는 엘리트들이 번갈아가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있다고 본다. 시민은 편견을 가지고 충동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투표자의 역할로 한정해야 한다는 이런 관점은 대의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이다. 그러나 경쟁적 민주주의 모델은 적지 않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스텔스 민주주의(stealth democracy), 청중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 등의 용어가 보여주듯,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유권자들의 ‘합리적 무지’ 가 민주주의의 위기로 작용하면서부터였다. 

   정치나 정책문제에 대한 정보를 얻는 비용이 해당 정보를 통해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수익보다 클 경우, 시민들은 정보를 얻지 않고 오히려 무지를 유지하려는 것을 사회학자들은 ‘합리적 무지’로 설명한다. ‘스텔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채 선출된 사람들에게 정치를 맡기기 때문에 결국은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것을, ‘청중 민주주의’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직업 정치꾼들의 연기를 보며 박수를 치거나 분노를 표출하는데 만족하는 수동적인 청중으로 존재하는 것을 비판하는 단어이다. 최근에는 온라인과 SNS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정치적 이분법과 이념적 양극화를 확산시키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새로운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원래 포퓰리즘은 긍정적‧부정적 속성을 다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포퓰리즘은 조직된 시민이 여론을 무기로 정치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치권이 극단적 팬덤에게 영합하면서 선동, 분열, 혐오 등을 확대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이런 경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가 바로 선거철이다. 이 시기만 되면 언론에 등장하는 단골 용어들이 있는데 정치생명을 건 후보자들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험지에 출격하다’ ‘최전선에서 맞붙다’ ‘격전지를 가다’ ‘사수냐 탈환이냐’등등... 주권자인 국민을 표몰이 대상으로, 국민의 삶터를 죽음의 전쟁터로 전락시키는 어법들이 2024년에도 버젓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천박성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전쟁에서는 아군과 적군만 존재하며, 내가 살고 적은 죽어야 하므로 상대는 악마가 되어야 한다. 선거가 끝난 후 승자는 달콤한 제왕적 권력을 향유하고, 패자는 설욕의 날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 것이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가 없다면 민주주의가 존재하기 어려운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엘리트들의 경쟁에 초점을 맞춘 선거는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일 뿐이며, ‘선거=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순간 정치인 팬덤이 기승을 부리고 민주주의의 사유화가 팽창하는 것을 막기 어렵다. 선출된 대표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채 정치적 방관자로 사는 것과 극단적인 여론 선동으로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얼핏 다른 선택 같지만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양자는 시민의 공적 책임과 대척점에 있는 행위로, 대의 민주주의의 결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는 지구촌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받고 있으며, 이런 도전들에 대응하기 위해 참여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 직접 민주주의(direct democracy),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같은 ‘새로운 민주주의’들이 등장하였다. 일찍이 엘리트 민주주의를 비판했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민주주의를 정치체제의 한 형태 이상으로 이해했다. 민주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보았던 그는 모든 성숙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형성에 함께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참여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등장하면서 국가나 지역 수준, 크고 작은 공동체 내에서 진행 중인 의사결정에 시민들의 광범한 참여를 가능하도록 민주주의의 형태를 발전시켜왔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특히 아테네에서 구현된 민주정에 뿌리를 둔 직접 민주주의를 현대적 버전으로 변형시켜 ‘시민발안에 의한 시민투표’와 같은 제도의 등장을 낳았다. 현대의 직접 민주주의는, 교육수준 향상으로 시민들이 여러 정책들에 대해 합당한 선택을 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도 다각도로 조명됐는데, 무엇보다도 대표적 도구인 시민발안 ‧ 시민투표의 경우 잘못된 정보로 형성된 선호를 토대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직접 민주주의가 특수 이익단체나 선동꾼들에 의한 조작에 취약성을 드러낸 미국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는 서구사회에서 1990년대 이후 숙의 민주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확산을 가져온 배경이기도 하다. 숙의 민주주의는 참여 민주주의의 이상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시민참여의 중심차원으로 대화와 토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두 민주주의를 구별 짓는 핵심 근거는 ‘공적 이성(public reason)’의 발휘이다. 다수의 참여를 증진하는 것만으로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민주적 정당성을 높일 수 없으므로 참여의 본질과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관점인데, 사려 깊게 판단하고 토론하는 숙의가 그 대안이라는 것이다. 숙의를 위한 공론장은 ‘날 것’의 여론이 아닌 정확하고 폭넓은 정보를 바탕으로 형성된‘정제된’ 판단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의 중앙․지방정부 정책과정에서 일부 활용된 ‘숙의형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를 창안한 미국 정치학자 제임스 피시킨(James S. Fishkin)은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개혁하지만, 기껏해야 참가자의 표를 동등하게 계산해주는 데 그치는 ‘숙의 없는 정치적 평등’에 불과하다”며 이를 ‘얇은 민주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다. 얇은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들끼리 모여 잘못된 정보나 가짜 정보를 공유하기 쉬우며,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두터운 민주주의’란 투표행위 그 자체나 시민참여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대화의 장을 제공해 그들이 심사숙고 후 사려 깊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민공론장에 참여해 지역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주민들 
주민공론장에 참여해 지역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주민들 

   이처럼 대의 민주주의든 현대사회의 ‘새로운 민주주의’든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은 없으며 지속적인 발전단계에 있다. 오늘날 지방자치 선진국들이 ‘민주주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대의-참여-직접-숙의 민주주의를 결합해 각각이 지닌 약점을 상호 보완하는 제도적, 실천적 노력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하이브리드 민주주의 혁신은 우리나라 읍‧면‧동, 통‧리에 해당되는 작은 단위에서부터 국가 단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우리의 현실을 보자.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국민만 보고 가겠다" "민심을 경청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데 국민과 민심은 하나가 아니고 고정불변한 것도 아니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특수한 이해관계에 놓여있고 현재의 환경과 생각은 언제든 변한다. 만약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과 생각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존경받을 일이 아니라 회피대상 1순위가 될 것이다. 사람과 세상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고 성장해야 하는데, 변화를 외면하는 사람은 상대를 설득이나 설교의 대상으로만 삼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야정당과 정치인들은 자신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며 정체성과 선명성을 강조하는데 급급하다. 이런 착각과 착시 때문에 생명과 희망을 일궈야 할 시민들의 소중한 삶터를 표밭 전쟁터로 오염시켜버렸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들이 수호하겠다고 외치는 민주주의는 앞서도 말했듯이 지금도 진화중이다. 교조적 이념에 사로잡혀 변화도 발전도 거부하는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따라서 청와대와 국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책무는 현재 누리고 있는 과도한 특권과 선민의식을 버리는 일이어야 한다. 국민들 위에 군림하며 시혜를 베풀겠다는 오만함 대신 주권자 국민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일, 중앙정부와 중앙정치권에 집중된 권력을 지역과 마을에 돌려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가 재개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중앙집권적 정치․행정시스템은 강고히 버티고 있고 중앙권력은 지방권력을 하수인처럼, 지방권력은 시민을 민원인으로만 대하는 관행이 만연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분권․자치제도는 1보 전진, 2보 후퇴,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으니 지방자치는 뼈대만 앙상하고 민주주의는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침체된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정치적 수사에 머물고 있는 지방자치를 근본부터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정치․행정체제의 개편이 불가피해 보인다. 과감한 지방분권과 마을분권의 단행이 그것인데, 대안 중 하나가 행정구역에 불과한 읍‧면‧동을 기초지방정부로 격상함으로써 마을 단위에서부터 시민들의 실질적인 참여와 숙의, 직접적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시민들은 정치적 주체로서 동등하게 참여해 자신의 이익과 쟁점을 드러내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끌어내며 자기책임성을 다하는 풀뿌리자치를 체험하게 된다.

   생활권 단위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작동되고 뿌리내려야 지역 민주주의, 국가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는데 지방자치 선진국들에 비해 우리나라 기초지방정부인 시‧군‧구의 인구 규모는 너무 비대해 풀뿌리자치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시민의 참여와 의사결정이 용이한 읍‧면‧동을 기초지방정부로 전환해 자치입법‧행정‧재정권을 부여하는 것과 함께 의결기관과 집행기관 구성의 자율화도 병행되어야 한다. 지역실정에 맞게 주민이 기관구성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선출된 지방의원이 자치단체장을 겸직하는 ‘기관통합형’이나 의회 대신 주민총회가 최고의결기구가 되는 ‘주민총회형’ 등 다양한 지방자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자치역량은 하루아침에 향상되지 않으며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누적된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마련이다. 시민들은 그간의 크고 작은 실험을 통해 이미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할 책임자들의 결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정권 안정론 對 정권 심판론’의 프레임으로 모든 정책의제를 삼켜버리는 정치, 보복에 눈이 먼 정치를 청산하고 지방분권과 풀뿌리자치 개혁을 진정으로 단행할 정당과 정치인을 길러내는 일이 시급하다.

김정희 : 부산대학교 경제통상연구원 연구교수(NGO학 박사), 지방분권운동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한국NGO학회 부회장, 한국지역사회학회 연구이사 등

논문/ 저서 : 주민참여예산제와 숙의 민주주의의 연계(2023), 숙의 민주주의 실험에서 시민의 역할과 권한 확대를 위한 과제(2022), 지방정부 정책과정에서의 참여·직접·숙의 민주주의 결합 모색(2022), 지방정부의 숙의형 시민포럼 사례 비교연구(2021) 외/ 시민행동지수로 본 한국시민사회역량(2020, 공저), 한국 지방자치의 발전과 쟁점(2016, 공저) 외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