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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경제미디어 이로운넷과 지방분권전국회의는 올 한 해 동안 '지방분권'에 관한 담론들을 이슈화하는 데 서로의 역량을 모으기로 하고 공동기획으로 <지방분권으로 지역소멸과 인구절벽을 막자>라는 기획 특집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안성호 석좌교수
안성호 석좌교수

안성호 대전대학교 행정학과 석좌교수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V-Dem연구소의 <민주정치보고서 2024>는 한동안 민주화의 모범국가로 거론되던 한국의 민주정치지수가 최근 다시 하락 추세로 바뀌었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정치지수(liberal democracy index)’는 2020∼2021년 세계 17위까지 상승했으나 2023년 세계 47위로 추락했다. 

불행하게도, 2023년 한국은 전제화(autocratization)가 진행 중인 42개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되었다. ‘자유민주정치’ 국가군으로 분류된 32개국 중 전제화가 진행 중인 나라는 한국뿐이다. 전제화 추세를 멈추지 않는다면, 한국이 자유민주정치 국가군에서 탈락할 날도 멀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패 스캔들과 대규모 탄핵시위 이후 인권운동가 출신의 문재인 대통령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향상되었지만, 우익 보수 성향의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한 뒤 전임 정권의 민주화 성과가 무효화 되었다"고 진단했다.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와 그 정책을 공격·비난하고 전 정부의 인사를 처벌하기 위해 경찰과 검찰 및 감사원 등을 동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 보고서 표지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 보고서 표지

  2023년 세계 평균인이 누리는 민주정치 수준은 1985년 수준으로 후퇴했다. 현재 세계인구의 71%(약 57억 명)는 전제국가에 살고 있다. 범세계적 전제화의 물결과 함께 극단주의 포퓰리즘이 글로벌 민주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2016년 미국 국민은 극우 포퓰리즘을 자극한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재임 중 온갖 물의를 빚은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하자 지지자들에게 선거결과에 불복하도록 선동했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5명의 사망자와 120여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폭동을 일으켰다. 다시 4년이 지난 요즘 트럼프는 수많은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각종 여론조사는 올 11월 대선에서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전체주의의 부활을 경고한 한나 아렌트는 "뉴잉글랜드의 타운미팅을 연방과 주의 헌법에 제도화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미국 건국자들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아렌트는 타운미팅 민주정치를 전체주의를 예방하고 인간다운 활동적인 삶(vita activa)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헌정질서(constitutio libertatis)의 토대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스탈린의 폭정을 비판한 죄목으로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8년의 옥고를 치른 후 미국 뉴잉글랜드에 망명해 18년간 살았다. 솔제니친은 소련이 무너진 후 1994년 12월 카벤디쉬 타운의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귀국 송별사에서 "그동안 러시아에서 벌어진 6천만 명의 학살과 인간 존엄성의 말살, 그리고 빈곤과 무질서는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풀뿌리 민주정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인간적 규모(human scale)의 풀뿌리 민주정치는 전제정을 예방하는 강력한 백신이며 번영을 견인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다. 역사적으로 인간적 규모의 풀뿌리 민주정치는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다. 아테네 도시국가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을 물리치고 180여 년 동안 번영을 구가하며 찬란한 문명의 금자탑을 쌓았다. 티베르 강 동쪽 언덕 위에 세워진 보잘것없던 도시국가 로마의 민회는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탁월한 로마문명을 잉태했다. 12∼13세기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의 민회는 근대적 가치를 창조하고 문화의 혁신을 이룩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아메리카 뉴잉글랜드의 타운미팅 민주정치는 식민지 해방과 대륙 규모의 민주제 건국을 성취한 미국혁명과 노예해방과 인권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평균인구 4천 명에 불과한 스위스 코뮌의 풀뿌리 민주정치는 전국이 고루 잘사는 다민족 의지국가(Willensnation)의 기적을 일궜다. 

  구한말 시베리아의 한인촌락에서도 인간적 규모의 풀뿌리 민주정치가 번영의 지렛대로 작용한 사실이 한 외국인 탐험가에 의해 확인되었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네 차례 조선을 답사했다. 그녀는 한반도 민중의 처참한 삶을 목격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무능한” 한국인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비관했다. 그러나 한반도 접경지역의 러시아 영토 내 시베리아 한인촌락을 방문한 후 이런 비관이 속단이었음을 깨달았다. 약 2만 명에 달하는 시베리아 한인의 활기차고 윤택한 삶은 이제까지 한반도에 사는 한인의 처참한 모습을 보아온 그녀에게는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비숍은 시베리아 한인촌락의 번영 비결이 '좋은 자치'에 있음을 발견했다. 

시베리아 정착 한인은 사실상 자치를 시행했다. 촌장은 마을의 크기에 따라 한 명에서 세 명까지 관리를 두고 마을을 관장했다. 경찰도 한인이었다. 법관은 서기를 두고 경범죄를 심리했다. 치안과 세금징수를 책임지는 촌장은 급료나 다양한 수당을 받았다. 모든 관리는 한인에 의해 뽑힌 한인이었다. 정부의 세금은 해마다 각 농장에 10루블씩 부과되었다. 마을주민은 도로, 수리, 다리, 학교 등을 운영하기 위해 연 3루블 이내의 지방세를 정했다.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해마다 1~2루블의 지방세가 부과되었다.

    시베리아 한인은 혹한의 땅에 거주하는 이민자의 각박한 삶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이 허용한 비좁은 공적 자유공간에서 자치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인 촌락자치는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고 경제적 번영을 촉진했다. 비숍은 한반도 민중의 풀죽은 모습, 게으름, 낭비벽, 의심, 낙담을 활기찬 모습, 부지런함, 검약, 확신, 희망을 품은 품성으로 변화시키고, 굶주린 빈농을 번창하는 부농으로 성장시킨 힘이 시베리아 한인 촌락자치에서 발원했음을 간파했다.

  뉴잉글랜드 타운미팅을 반세기 동안 연구한 프랭크 브라이언은 만일 20세기 초반 독일에 뉴잉글랜드의 타운미팅과 같은 풀뿌리 민주정치가 있었다면 히틀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풀뿌리 민주정치에서는 결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나올 수 없으며, 만에 하나 그런 인물이 생기더라도 “정신이 나간 얼간이”로 취급되어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으로 보았다. 브라이언은 풀뿌리 민주정치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주민의 심성에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민주정치를 직업정치인의 전유물로 간주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국민은 엘리트 정치인의 권력투쟁을 팔짱 끼고 관람하며 품평하는 구경꾼이 되었다. 국민의 주권은 몇 년에 한 번 투표장에 나가 대표를 고르는 권한으로 축소되었다. 대의제 과두정치에 대한 구경꾼의 불만과 불신은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를 키우고 있다.

  '구경꾼' 민주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엘리트 정치인의 정치를 시민의 정치로 바꾸는 정치혁명이 필요하다. 이 정치혁명은 인간적 규모의 풀뿌리 민주정치의 실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1963)에서 풀뿌리 민주정치를 “잃어버린 보물”로 호칭했다. 인간적 규모의 풀뿌리 민주정치를 세우는 일은 자유헌정질서의 토대인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는 일이다.

  도산 선생의 나라 사랑은 마을공화국 실천에서 시작되었다. 조국에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도산은 이민 동포의 무너진 삶을 목격하고 학업까지 미루면서 '파차파 공화국'을 세웠다. 파차파 공화국은 자치규약에 따라 선출된 자치위원 3인과 자치경찰 2인이 이끈 마을공동체였다. 마을공회당 전면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펄럭이는 파차파 공화국에는 모든 주민이 참여하는 야학이 개설되었다. 한국 교민사회의 놀라운 변화에 감동한 한 미국인 실업가는 파차파 공화국의 사무실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일부 영사업무를 파차파 공화국에 위탁했다. 이 파차파 공화국은 훗날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을 감당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이어 멕시코 교민사회에도 마을공화국이 세워졌다. 도산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만주에 설립하려던 '한인 모범촌'도 주민이 스스로 자치규약을 정하고 주민이 뽑은 리더가 이끄는 마을공화국이었다. 그러므로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선언한 "민주공화정"은 건국의 아버지 도산이 평생 목숨을 걸고 실천했던 마을공화국을 아우르는 민주공화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위기에 직면한 민주정치와 추락하는 경제를 구출하기 위하여 도산 선생의 ‘나라 사랑’ 마을공화국 실천을 계승하여 자유헌정질서의 잃어버린 보물, 곧 인간적 규모의 풀뿌리 민주정치를 일으켜 세우는 시민운동이 필요하다. 

 

안성호 대전대학교 석좌교수, 지방분권전국회의 고문, 개헌국민연대 공동대표, (전) 한국행정연구원장

<저서>

「왜 서번트리더십인가」(2인 공편저, 2021), 「왜 분권국가인가」(개정판 2018), 「양원제 개헌론」(2013), 「현대 리더십의 이해」(2인 공저, 2010), 「East Asian Cooperation in the Glocal Era」(co-authorship, 2006), 「분권과 참여: 스위스의 교훈」(2005), 「지방거버넌스와 지방정책」(2인 공저, 2004), 「스위스연방민주주의 연구」(2001), 「한국지방자치론」(1995), 「리더십철학」(역서, 198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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