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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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꽃망울글방’이라는 공부방의 자원교사 활동을 했다. 당시 관악구에는 봉천동과 신림동 일대로 넓게 산동네가 펼쳐져 있었고, 동네마다 공부방과 탁아소는 가난한 맞벌이가정 아이들의 돌봄 공간이자 주민들의 모임, 배움, 공동체를 경험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공부방과 탁아소의 운영자들은 대부분 주민을 조직하는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아이들 돌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들을 만나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주민지도자들을 조직해서 동네의 소소한 문제부터 강제철거 등과 같이 큰 문제까지 함께 의논해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주민조직을 만드는데 역할을 했다.

산동네에서는 공부방 말고도 주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공동체로 극복해 보고자 했던 다른 도전들도 있었다. 바로 생산공동체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건축기술과 현장경험이 있는 주민 8명과 활동가가 모여 ‘건축일꾼두레’라는 공동체 회사를 만들었다. 내가 활동했던 봉천3동의 옆 동네에서도 ‘나섬건설’이라는 생산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후에 ‘건축일꾼두레’와 ‘나섬건설’이 합쳐져서 ‘나래건설’이 되었다. 수도권 곳곳의 산동네, 공단마을에서 건축, 봉제의류, 부업, 도시락으로 많은 생산공동체들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생산공동체의 경험이 자활사업과 자활기업의 시작이 되었다.(자활기업은 원래 2000년 당시 명칭이 ‘자활공동체’였는데 2012년에 변경된 것이다) 그래서 생산공동체와 자활기업은 매우 닮았다. 생산공동체 건축일꾼두레는 ‘건축일꾼들이 뜻을 모아서 건축 직거래를 함으로써 건축주에게는 공사비를 덜 들게 하고, 일꾼에게는 이익을 많게 하려는 모임’으로 ‘월산동의 건축 일꾼들이 서로 돕고 사랑하면서 한식구가 되어 일하는 공동체’를 천명하였다. 또, 일꾼 두레가 하려는 일로서 1) 8시간 일하고 일요일은 쉰다 2) 월급제를 시행한다 3) 성실하고 책임있는 공사를 한다. 4) 일꾼 두레의 살림은 공개한다 5) 이익을 공평하게 나눈다 6) 손해를 함께 메운다 7) 일꾼두레는 공사장의 관행을 바로 잡는다 8) 건축용어를 바로잡는다 9) 일꾼두레 식구들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이웃을 사항하고 우리가 사는 마을을 좋은 동네로 가꾸어 간다로 함께 정하였다.(출처: 일판사랑판, 허병섭)

일꾼두레 뿐만 아니라 많은 생산공동체들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이 당당하고 행복해 지는 일터를 만들고, 나아가 가난이 만들어지는 불합리한 구조를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바꾸어 보자는 사회적 사명도 함께 세웠다. 이러한 정신은 자활기업으로 이어졌다. 자활기업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자활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돌봄, 주거복지, 청소, 재활용, 양곡배송과 같이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꼭 필요한 일들을 제공해 왔다. 돌봄 자활기업들과 사업단들이 담당했던 취약계층 무료간병사업이 이후 돌봄분야 사회서비스사업 제도화의 기반이 되었다. 청소 자활기업들이 초창기 진행했던 학교화장실 무료청소사업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학교화장실관리 일자리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 좋은 사례이다.

이처럼 자활기업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층 등 저소득층이 협동방식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는 기업으로서,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면서 제도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했다. 자활기업은 90년대 생산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시작된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념과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좋다. 자활기업은 2012년에 변경된 명칭으로, 원래의 명칭은 자활공동체였으며, 여기서 ‘공동체’는 생산공동체에서 이어져 온 것이다.

그래서 자활기업의 대부분은 협동조합기본법이 생기기 이전부터 협동조합 방식의 정관을 사용하고 있다. 자활기업은 수급자, 차상위자를 포함한 저소득 취약계층이 자활을 목적으로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설립하고 운영하므로, 자활기업의 존재와 운영 그 자제가 사회적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것은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 다른 사회적경제조직과 구별되는 자활기업의 고유성이다.

그러나 자활기업의 존재가 사회적가치 그 자체라고 해도 이러한 가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식되지 않으면 그 의미도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활기업은 지난해 협회부설연구소에서 ‘자활기업의 사회적가치 지표’를 만들었다. 물론 고용노동부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가치지표(SVI)가 사회적경제기업에 대한 보편적 가치 기준을 측정하도록 제시되어 있으나, 자활기업의 고유한 가치가 드러날 때 사회적경제기업으로서 가치도 살아날 수 있고, 자활기업을 자활기업답게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표를 개발했고, 현장 적용을 준비하고 있다.

자활기업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적경제기업은 각자 스스로의 고유한 사회적 가치와 역할(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와 역할이 드러날 수 있을 때 그 존재의 의미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자활기업이 제품홍보를 위해 1시간짜리 미팅을 하면 자활기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55분 해야 한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을 만큼 개념과 가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의 경우도 공공기관의 관련부서나 관련된 사람들 중심으로 인지도가 높은 편이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마찬가지로 그 개념과 가치가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회적경제는 지속가능한 사회경제 발전을 위한 대안적 경제체제로써 주목받고 있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해소 등 시장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낮고, 사회적경제 주체들의 힘이 아직은 약하며,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부차원의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지원방안은 미흡하다.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이 매우 필요한데, 특히 사회적경제의 가치를 시민들이 알아보고 같이 인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는데 기본법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사회적경제기본법안에는 사회적경제 기본원칙으로 ①공동체 구성원의 공동이익과 사회적 목적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가치 추구 ②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운영 ③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운영구조와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 촉진 ④발생한 이익의 재투자 및 조직에 대한 기여를 중심으로 한 배당등 사회적 목적 실현을 위한 우선적인 사용 ⑤지역공동체 발전을 위해 상호협력의 촉진과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하도록 함(제2조) 이라고 되어 있다.

자활기업도, 다른 사회적경제기업들도 사회적 가치를 스스로 실천하고, 사회적가치가 더 널리 퍼져나가길 희망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보다 더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고 높아져야 한다. 물론 기본법 제정만큼이나 당사자들과 이해관계자들의 노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제도적 기반이 되는 것이 기본법 제정인만큼 그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으로 국민들이 자활기업의 가치를 더 잘 알아보고,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과 다른 사회적경제조직들의 중요성을 더 잘 알아보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박기홍 한국자활기업협회 사무총장
박기홍 한국자활기업협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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