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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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독립성과 타인과의 일체감 사이의 갈등을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온기를 더해 추위를 이기고자 더 가까이 하고 싶지만 바늘 같이 날카로운 가시때문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찔리고 너무 멀어지면 온기를 나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가까이 했다가 찔려서 죽고 멀어졌다가 얼어서 죽기를 반복하다가 그들은 서로 안전한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시는 고슴도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장미에도, 탐스러운 산딸기에도 아픔을 주는 가시가 있다. 더욱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 감정의 동물’이기에 가시도 없고 가시에 찔리지도 않는 거북이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만남에서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온기를 느끼게 하는 적정한 거리가 에티켓이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가슴 속에 심어져 자가 증식을 일으키고 때로는 바이러스처럼 전염시키기도 한다. 개에 물린 상처는 반나절이면 치료되고 칼에 찔린 상처는 꿰매면 아물지만 혀에 베인 상처는 치료약도 없어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관계에서 서로 친밀해 지기를 바라지만 행여라도 관계 속에서 자존감이 손상되고 평정심을 잃을까 두려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가정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체면치레와 같은 허식을 버리고 서로가 부담을 갖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어 던져버리고 스스로의 고귀함을 지키고 진실되게 산다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 

특히 지금은 언택트 문화가 대세다. 이미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온라인으로 의사소통과 정보공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기업에서도 저비용으로 표적집단에 효율적으로 맞춤형 마케팅을 할 수 있는 SNS를 통한 소통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내 아바타가 가상현실을 즐기는 메타버스의 시대에 까지 왔다. 이제 인간은 서로 몸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흩어진 퍼즐처럼 떨어져서 서로 조각을 맞추어 보는 ‘고독한 존재’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접촉할 필요가 없는 관계는 정리되면서 오히려 세포 단위의 가족이나 긴밀한 접촉이 필수적인 업무관계는 그전보다 훨씬 더 돈독해지는 딥택트 현상이 보여 지기도 한다. 코로나의 여파로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맞벌이 부부들은 관계가 더 깊어지고 줌, 구글미트, 디스코드와 같은 화상회의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정보공유와 상호관계는 더 활성화 되고 있다. 

본디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써 다른 사람과의 공생적 유대관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지만 전염병이 창궐하자 세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사회적 교류가 위협적인 일로 인식되어 고립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코로나는 국경을 넘어 정치, 경제, 문화의 교류를 넓혀가던 세계화의 거센 물결도 단번에 막았다. 백신으로 이를 극복 할 것을 기대했지만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하면서 부터는 이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남들과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말자고 늘 다짐을 해왔다. 만남은  애증이 교차하는 과정의 연속이고 만남에는 헤어짐이 따른다. 그럴때 미련없이 쿨하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람들과의 친교를 가지되 가급적이면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과 더 가까이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틈만 나면 베낭메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나가 하염없이 걷는다. 사람들과 가까이 할수록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그 상처로 인한 아픔까지도 사랑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는 오랫만에 서너 명의  친구들과 한적한 곳에서 정담을 나누다가 얘기를 다 마치기도 전에 서둘러 일어났다. 정해 놓은 시간을 넘겨서 어울리면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고발하고 그러면 사회적 비난과 함께 벌금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스스로 잠입할 시간과 거리를 미리 정해 놓고 그 찬스를 잡기 위해 시계와 거리를 재는 줄자를 가지고 다닐리는 없다. 정부가 방역을 위해 정한 고육지책과 정의감에 넘친 사람들의 고발정신도 이해는 가지만 세상 살이가 점점 더 각박해져 가는 듯해 씁쓸하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 고슴도치 딜레마는 해결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사회성과 위험 감수성, 역동성 등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행동양태가 달리 나타날 수 있고 고슴도치 신드롬은 포스트 코로나에도 이어질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부단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정치인이 가장 굵고 짧게 살고, 늘 자연과 더불어 하는 정원사가 제일 정서가 안정되어 오래 산다고 한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격랑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는 누구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며 살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차라리 소설 속 절해고도(絶海孤島)의 등대지기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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