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치 가운데로 보이는 평평한 푸른 언덕이 백마고지 이다. 앞은 철원평야이고 뒤는 비무장지대이며 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뽀족한 산이 북녁 김일성고지 이다.
아치 가운데로 보이는 평평한 푸른 언덕이 백마고지 이다. 앞은 철원평야이고 뒤는 비무장지대이며 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뽀족한 산이 북녁 김일성고지 이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조국을 위해 산화한 말 없는 군상들이 그림자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들이 무리지어 머무는 철원 백마고지를 찾았다. 가까운 역에 내려 수수밭 사이로 아련한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감자꽃 피는 한적한 길을 한참 걸으니 저만치 야트막한 언덕 위에 멍석만한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바라보노라니 나그네의 가슴이 뭉클하다. 이 땅의 꽃 다운 젊은이들이 피로 지켜낸 승리의 깃발, 자유의 깃발이 아니더냐!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인 '철의 삼각지대'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서로 한 뼘의 땅도 더 차지하려고 국군과 중공군이 6.25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곳이다. 무자비한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운 형상을 하였기에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이즈음 하늘을 이고 있는 녹음이 서럽도록 짙푸르다. 

지금부터 70년 전인 1952년 10월 6일에서 그 달 15일까지 열흘간 무려 24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밤낮없이 혈전을 치렀다. 개미떼 처럼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을 격퇴하고 마침내 국군이 고지를 장악했다. 지금 이 자리 승전비가 그날의 일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 4000여 명이 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고, 국군도 3천 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반도가 국제적 이념대결과 패권다툼의 대결장이 되어 동족상잔을 부른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중국 여행객들이 이곳에 와보고 왜 우리 측이 그 전투에 참여하여 그만치 피아간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는지 알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사죄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 위령비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새겨진 위령비 앞에 섰다.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신화속의 불사조처럼 그들이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상상해 본다. 집총한 병사들의 모습으로  자작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오르막길을 오르니 하늘을 찢는 포성과 백병전을 하는 용사들의 아우성이 이 순간 귓가에 맴돈다. 오늘따라 북녘 산하는 뿌연 안개로 가렸고 하늘에는 비구름이 떠가며 금방이라도 한줄기 소낙비를 뿌릴 듯하다.

칡(葛)과 등나무(藤)넝쿨은 지지대를 휘감고 위로 올라간다. 칡은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 방향으로 감기 때문에 이 둘이 같은 나무를 타고 오르게 되면 서로 목을 조르듯 얽히고설키게 된다.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의 방향이 다르면 끝없이 대립한다. 남한의 소총과 박격포는 우회전 강선으로 제작되었고 북한 것은 좌회전 강선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우측 방향으로 돌든 좌측 방향이든 효능에 도무지 무슨 차이가 있을까마는 편향된 고정관념이 서로를 다르게 하여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였다.

저 화살머리 고지 아래 구비 돌아 흐르는 역곡천을 떠도는 고혼들에게 물어보라,  잡초에 묻힌 이름 모를 백골들에게 물어보라, 왜 그대들은 그 토록 목숨 바쳐가며 피 터지게 싸웠는지를. 밭가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좌익은 무엇이고 우익은 또 무엇인지를 말이다. 정전협정을 종전선언으로 바꾼다고 전쟁의 쉼표가 마침표로 바뀌어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될까? 평화를 위한 만남, 싸우지 말고 서로 협력하자는 공동선언이 ‘한판 깜짝 쇼’가 된 것이 몇 번이었던가? 얻는 것도 없이 깊은 상처만 남기는 전쟁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전쟁을 잊어서도 안 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도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다. 

전쟁은 예술이 아니다. 전쟁터를 누비며 잔뼈가 굵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인간적인 선한 전쟁은 없고 악한 평화는 없다”고 단언했다. 전쟁에서 인도적 고려는 최악수이며 무자비하게 몰아붙여 속전속결 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적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가와 부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군인과 가난한 자들만이 죽는다”고 했다. 정작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싸운다는 것이다. 어느 저명한 형법학자는 “국가는 산에도 없고 들에도 없다”고 했다. 국가는 영토도 아니요, 주권도 아니다. 국민이 바로 국가이다. 그러니 국가를 위하여 국민이 목숨을 바치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루이 14세의 말대로 집권자가 국가란 말이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정전협정 장면 / 출처=위키 백과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정전협정 장면 / 출처=위키 백과

분단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지역 태생인 이 주섭 ‘DMZ 평화의 둘레길’ 전문해설사는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맙고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못가는 이웃에 사는 백발이 성성한 실향민들의 통한과 울부짖음에 가슴이 시리고 오금이 저린다고 했다. 그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두루미’를 남북간 화합과 체육, 문화교류의 상징 마스코트로 정해 줄 것을 제안했다. 호돌이 보다 더 의미 깊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당국에서도 삶의 현장에서 발상한 민초의 탁견을 귀담아 듣길 바란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전쟁의 잔혹함을 잊은 이들은 시간이 멈춘 이곳 백마고지를 찾아보라. 혹여 자기만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죽은 친구들을 묻어주고 그들을 연민 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들도 이곳에 와 보라. 전쟁은 위대한 서사시도 아니요, 영웅을 탄생시키는 영화 같은 해프닝이 아니라 모두에게 죽음과 극한의 고통, 피와 눈물만 남기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야만적인 전쟁놀이는 그만하고 멈추라. 핵으로 무장된 오늘 날,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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