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그림=Jung J Lee
 까치밥/그림=Jung J Lee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의 한국사랑은 유별했다. 그녀는 한국 근대사의 격동기에 한 양반 가정의 일대기를 그린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에서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예찬했다.

​그녀가 1960년 가을,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고도 경주를 탐방하기 위해 지프를 타고 경주 안강 들판 길을 지나던 중 한 농부가 지게에 볏단을 가득진 채 소달구지를 몰고 가고 있었다.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거기에 타고 가지 않고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가느냐?”고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는 대답했다. “이 소도 나와 같이 오늘 하루 종일 일했어요. 일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고 가는 중이지요”   

​펄벅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홍시가 매달린 것을 보고는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저 높은 가지에 달린 감은 따기 힘들어서 그냥 남긴 건가요?", "아닙니다. 저건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 둔 거라오. 아침마다 까치가 찾아와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지요" 그 말에 펄벅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저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본 고적이나 왕릉 이상이다. 한국인은 참으로 고상한 민족이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밭에 콩을 심을 때도 하나는 하늘에 나는 새를 위해, 하나는 땅속의 벌레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싹을 틔워 나와 이웃이 나눠먹기 위해 뿌렸다고 한다. 산야에 눈이 쌓인 엄동 설한에 새들을 위해 남겨 둔 까치밥은 지극히 작은 생명 하나도 배려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인정이었다. 새와 벌레까지도 더불어 하는 이웃이 되어 소중하게 보살피고자 한 생각과 생활방식은 환경보호운동에 앞서 자연과 하나가 된 조상들의 공생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요즘 시골에는 고구마 옥수수를 가꾸어 놓으면 수확 철에 고라니와 멧돼지들이 사돈네 팔촌까지 끌고 와서 하룻밤 사이에 거덜 내고 어지러운 발자취만 남긴다. 새들은 아예  수백 수천마리가 떼거지로 몰려와서 곡식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물망을 치고 허수아비가 밤낮 없이 팔을 비틀어 가며 춤도 추지만 막무가내다. 인간들이 나누어 주기는커녕, 산속에 있는 그들의 먹잇감인 도토리, 약초, 버섯, 심지어 땅속깊이 박힌 칡뿌리 까지도 캐내어 몽땅 거두어 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감나무 가지는 부러지기 쉬워 사람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고 긴 장대를 휘저어서 감을 딴다. 어릴 적 감나무에 올라가서 홍시를 따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땅에 떨어져 팔이 부러진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아파트 화단 감나무 옆에 서있는 대추나무에는 대추 몇 알이 달렸지만 새들은 쳐다 보기만 하고 땅에 떨어져 있는 것만 굴러가면서 쪼아 먹는다. 아마도 대추나무 가지가 너무 가늘어서 새들이 올라 앉을 수 없기 때문인가 보다. 누군가에 어께를 내어주려면 튼튼한 가지처럼 넉넉한 인정과 도타운 믿음을 심어야겠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똑같이 살 수는 없지만 함께 할 수는 있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나름의 맡겨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녹녹치 않는 삶을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이어간다.  주위의 응원과 격려, 도움을 받으면 무거운 짐도 한결 가벼워지고, 흔들어대고 아픈 상처를 건드리면 더 힘들어 진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거리두기를 하는 이때 일수록 상부상조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따뜻한 나눔이 절실하다. 사랑은 나누면 배가되고, 호주머니는 비우면 채워진다.

겨울날 감나무 우듬지에 매달린 홍시의 정경을 바라보면서, 이방인도 극찬한 우리의 미풍양속인  ‘까치밥 문화’를 통해 다시금 배려와 공존, 상생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세상을 눈으로만 보지말고 마음으로 보자. 그래서 인정이 강물처럼 흐르는 '더불어 잘 사는 세상, 살맛나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아 있음으로 해서 그 누군가가 더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진정 성공한 삶이다.”-Ralph Waldo Em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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